청년게시판

삼성산 세 성인의 벽화를 보면서

인쇄

원재연 [wjyhs2] 쪽지 캡슐

2004-04-03 ㅣ No.692

삼성산에 세워야 할 기념비 하나

 

아 위대한 영혼의 승리여 !

 

서울의 관악산 한 자락(관악구 신림동) 정상 부근에는 1839년에 순교하신 프랑스 선교사 세분의 묘지가 있고 자그마한 기념비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거룩한 얼굴 모습도 그곳 삼성산 성지에서 멀지 않은 신림동 성당의 큰 벽면 한쪽을 모두 할애하여 그려져 있으므로, 근처를 지나가는 시내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이 세분의 순교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에 앞서서 성직자 없는 우리 나라에 교황대리 감목구를 설정하도록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말없는 행동으로 설득하는데 크나큰 공적을 세우신 발토로메오 브뤼기에르 초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님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어디에도 교회의 기념비나 안내판 하나도 없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물론 인근 삼성산 본당이나 신림동, 봉천동, 난곡동 성당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도 알려주는 이도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오호통재(嗚呼痛哉)" "통재통재(痛哉痛哉)"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원래 샴의 부교구장 주교님이셨는데, 자기가 속한 파리외방전교회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조선 선교를 망설이고 있을 때 과감하게 나서서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고 나섬으로써, 결국 많은 반대와 주저함을 물리치고 파리외방전교회가 결국 조선 선교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변변한 교통수단 하나없이 머나먼 중국 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거의 도보로 횡단하시다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동료 천주교인들의 무관심과 방해 등에 지치고 힘들어하시다가 조선 국경을 멀리 앞에 두고 만주 벌판에서 영양결핍과 과로사로 선종하셨습니다. 그토록 그리워 하던 꿈의 조선 땅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셨습니다.

 

1874년 두권의 책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펴내신 달레 신부님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오늘날 우리는 이 두권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세권으로 나온 한국교회사연구소본 <<한국천주교회사>>상,중,하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것은 한글 번역본 중권 326-327쪽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덕행 중에서도 가장 빛난 것은 열심이었다. 이 불같은 열심이 있으므로 해서 조선에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서 아무 자력(資力)도 없이, 또 다른 선교사들이 뒤를 따를지도 모르는 채 홀로 몸을 바치게 되었고, 그렇게도 심한 피로와 곤핍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썼다.

 

"나는 아무 것에도 놀라지 않고 무엇이든지 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 포교지를 청하고 수락했을 때에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겠으며,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어야 하겠는지를 미리 알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덜 위험을 당했습니다. 천주께서는 곳곳에 계시고 이 세상에서 내가 당하는 일 치고 천주의 명령과 허락이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것은 언제나 옳고 언제나 우러러볼 만한 것입니다. 그러니 내 본분은 그 명령과 허락을 은총의 도우심으로 따르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버림을 받기 전에는 그리고 혼자서는 여행을 절대로 할 수 없게 되기 전에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길을 떠났을 때에는 이미 병이 들어 심한 두통으로 무척 고통을 당했고 기진한 위(胃)는 무슨 음식이든지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걸음을 걷기도 몹시 힘들었고 거기에다 추위는 또 혹독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은 모든 장애물보다 더 강하여, 오직 죽음만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천주의 사랑은 아무리 피로하여도 기진하지 않고, 아무런 장애에도 오므라들지 않으며, 아무런 두려움에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이 위로 치솟고, 모든 장애를 무사히 지나간다."(준주성범 3권5장)

 

------------------------------------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조선 땅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셨으나, 그의 위대한 열성에 감동된 모방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이땅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가 확실하게 설정되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 이래 30여년간 목자없던 이 조선교회가 다시 폐허와 잿더미에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소 브뤼기에르 발토로메오 주교님이 우리 한국 교회와 상관없다고 계속 팔짱만 끼고 강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기만 해야겠습니까?



57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