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성당 게시판

소록도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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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은숙 [m.maria] 쪽지 캡슐

2002-02-23 ㅣ No.1376

* 저는 손발이 없습니다 *    From 이행심마리아

                                    

 

  저는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님은 두 분이 다 한센병환자였습니다.

자식으로는 저와 남동생 둘뿐이었는데 저희 두 남매도 환자였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면허가 없는 의사로서 어릴 적에는 그다지 어렵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돈을 벌어오시겠다며 부산으로 가셨는데 몇 해후에 돌아오실 때는 아편중독이 되어 오셨으며 기침도 심하게 하셨읍니다.

 

  아편을 하시는 아버지 때믄에 가세는 기울게 되었고 급기야 모든 가족이 소록도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저는 아버지의 아편 값을 대기 위해 갯벌에 나가 낙지랑 조개랑 캐어 팔았으며 돈만 생기면 남몰래 아편을 구해 아버지께 주사를 놓아 드리곤 했습니다. 약 기운이 있을 땐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고르게 되고 기침도 많이 가라앉곤 했습니다.

 

  저희는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빚만 몽땅 지게되어 배급되는 네 사람의 식량에서 두 사람 몫은 빚쟁이들이 가져 갔으며 나증엔 장롱이나 가재도구도 그들이 다 들고 갔습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아버지도 한 달 뒤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열일곱이었고 동생은 열네살 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물려 주신 빚을 갚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손에서 피가 나도 아픈 줄을 모르고 매일 갯벌에 나가 조개나 굴을 따서 돈을 마련하여 빚쟁이들에게 조금씩 갚으면 " 너는 아버지가 살아서도 효녀이더니 죽어서도 효녀이구나 " 하시며 빚을 더러 탕감해 주셨는데 빚은 혼자 힘으로 다 갚았습니다. 그때 하나있는 동생마저도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서른세 살 때였습니다. 산청이라는 곳에서 한 남자가 소록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절보고 자꾸 밥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 처음엔 싫다고 하다가 나중에 몇번 해줬더니 이번엔 같이 살자고 매달려서 본의 아니게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소록도에서 결혼하려면 남자가 먼저 정관수술을 해야하며 혹 아기를 갖게 되면 소록도에서 살 수 없습니다.

 

  제가 원치 않은 임신으로 불안한 때에 남자가 갑자기 급하다며 돈 25 만 원을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여러 곳에 부탁하여 돈을 마련해 주었더니 얼마 후 그 남자는 아무소리도 없이 돈을 가지고 종적을 감췄습니다. 알고 보니 부인이 있는 남자가 계획적으로 절 속이고 이용했던 것입니다. 저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때문에 뱃속에 든 아기도 유산이 되었습니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저는 산청에 있는 남자의 집을 찾아 갔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으며, 저는 너무도 망막하여 얻은 빚 25 만원을 벌기 위해 산청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역에 내려 사람들에게 저 같은 환자들이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동대문에 가서 물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대문을 찾았더니 과연 저 같은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습니다.

 

  저는 책임자를 찾아가 동냥하는 것을 가르쳐달라 하여 서울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서 구걸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책임자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열심히 모았습니다. 처음엔 동냥을 못해 문만 두드리고 문 앞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지만 차차 익숙해 지자 얻어먹는 일도 쉬웠습니다. 저는 1 년 동안 벌어서 드디어 25 만원이 되었을 때 다시 소록도로 돌아와 빚을 갚았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중매쟁이 한 분이 오더니, " 이 신랑감은 도시락을 싸들고 삼 년을 찾아 헤매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착한 사람 "  이라고 하기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은 정말 착했습니다. 그때 결혼은 멏 사람 불러다 놓고 식사를 한 끼 대접하면서 우리가 같이 살게 되었다고 선언만 하면 되었습니다.그래서 제 나이 서른다섯 살에 새 가정을 가졌습니다.

 

  그때 저희는 아이를 갖고 싶어서 병원에 저희 결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아기가 들어섰을 때 그걸 감추기 위해 복대로 배를 칭칭 감고 또 헐렁한 옷을 입어서 임신을 숨겼습니다. 결국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를 낳은 후가 또 큰 일이었습니다. 소록도에선 환자가 직접 아기를 키울 수는 없습니다. 병에 감염될 위험 때문에 절대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키우려면 아기를 육지로 내보내든지 아니면 둘 다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저는 부탁할 곳이 없어서 수녀님을 통해 여러 군데 알아 봤더니 마침 부산에 그런 아이들을 키우는 보육원이 있다해서 아기를 그곳에 맡겼는데 아이는 거기서 잘 자라주었으며 나중에 고등학교도 나오고 취직을 해서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센병환자들은 자식들 결혼식 때가 제일 고민스럽습니다. 남들 이목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며, 대부분 자식들을 위해 부모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우리 아들도 호적을 큰집 앞으로 했다가 처음엔 부모를 숨겼는데 아들이 결혼 후 3 년만에 우리가 친부모라고 밝히자 며느리가 고맙게도 쉽게 이해해줬습니다. 지금은 명절만 되면 아들 며느리가 손자들을 데리고 찾아 옵니다.

 

  저는 나이가 이제 일흔둘입니다. 일을 너무 심하게 한 탓으로 손발이 없습니다. 서른여섯 살때 심한 관절염으로 다리 하나를 절단했는데 십 년 후에 다른 쪽 다리도 마저 잘랐습니다. 두 다리가 없는 저는 자동차 폐타이어를 반으로 잘라 발에 끼우고 무릎으로 걸어다니며 또 손가락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식사를 할 때는 손목에 고무줄을 감고 그곳에 수저를 끼워서 합니다.

 

  손발이 없어도 저는 지금도 밭농사를 불편없이 지으며 또 갯벌에 나가 여전히 조개도 캐고 낙지도 잡습니다. 늙었어도 악착같이 삽니다. 몸은 병으로 망가졌지만 불편한 줄을 모르고 열심히 사는데 이런 제 모습을 모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육지의 어떤 자매가 절 찾아와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남편과 이혼을 했다는 말을 하기에, 제가 제 손발을 보여주며  " 이렇게 된 나도 열심히 사는데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뭘 못해 먹겠느냐 ?"  하며 저의 지난 날 얘기를 해 주니까 그녀가 울면서 돌아갔는데 지금은 남편과 재결합했으며 그리고 식당에 취직해서 열심히 살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살려고 하니까 불행하게 됩니다.         

 

  남들은 제가 부모를 잘못 만나 고생을 한다고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제 부모를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팔자소관이요 제 운명이려니 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소망이 있다면 머지 않아 가게 될 천당에서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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