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다해) 마태 28,16-20 ’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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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10-08 ㅣ No.5182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다해) 마태 28,16-20 ’22/10/23

 

 

  

 

 

10월은 묵주기도 성월입니다. 그리고 또 전교의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어쩌면 아주 자주, 하루에도 여러 번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합니다. 묵주기도는 도미니코 성인이 선교를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묵주를 주시며 기도하라 하셨다는 데서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성모님은 1830년 파리에서, 1846년 라 살레떼에서, 1858년 루르드에서 벨라데따에게, 1871년 폰트매인에서, 1917년 파티마에서 6번이나 발현하실 때마다 죄인의 회개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묵주기도는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통해 언제나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묵상함으로써 더욱 우리 자신을 주님과 일치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매번 예비신자 환영식이 돌아올 때마다, 이번에는 누구를 데려와야 하나 하는 부담이 들 때마다,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으로 기도하고 힘을 얻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로마 8,24)

 

우리는 주님께 새 신자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선교의 대상자로 삼고, 그분이 성당이 오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바칩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그분이 성당으로 오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우리가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다 보면, 정작 언제 선교 나갈 시간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선교하지만, 정작 예비신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주보를 보고 왔다든지, 우리가 초대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그것도 자기 발로 찾아왔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럴 때면, 허탈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기도만 한답시고 활동은 소홀히 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25)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누군가를 성당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데려오시고자 하시는데, 뭔가 지상의 에너지가 필요하지나 않으실까? 그 에너지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26) 그렇게 따지고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작 필요한 곳으로 에너지를 분배하고 쏟아붓는 것처럼 쓰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데 필요한 도구이므로, 우리의 기도들을 다 모아, 주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상황에, 필요한 사람에게 부어주는 신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27)

 

우리가 지금 당장 어떤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당장 성당에 들어오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누군가 성당에 들어오는 데 망설이거나 주저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상의 에너지로 쓰시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이 사람 저 사람이 갖가지 기묘한 방법으로 성당을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선교 상황 그리고 성당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과 그 계기와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우리가 밤에 죽은 듯이 잠자고, 아침에 기적같이 일어나는 현상과 상황의 신비를 모르듯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흐름이 모두 주님의 섭리와 안배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별로 이상하지 않은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당구놀이의 쓰리쿠션처럼, 주님께서는 우리 노력을 당장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결실로 이어지게 만들어 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선교를 향한 우리의 기도를, 때로는 누군가에게 선교 전단을 마치 바람에 날려 보내는 기운으로 쓰실 수도 있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매일 성당 곁을 지나가면서도 성당에 들어오려고 하는 마음이 들지도 않고, 심지어는 성당이 거기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성당을 들어오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큐피드 화살처럼 쓰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낍니다. 기도하고 선교를 하여도 우리가 초대한 바로 그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도, 예비자 환영식마다 그야말로 미미해 보이면서도 소중한 새 예비 신자분들을 보내주시기는 하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29)

 

이처럼 때로는 우리의 외적 활동과 노력과는 전혀 달라서 가끔은 허탈하게 여길 정도로 전혀 다른 기회에 다른 의도로 성당에 들어오시는 분들을 볼라치면, 주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원하는 사람을 보내주시겠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신비롭게 여기저기서 이러저러한 계기와 방법대로 누군가를 성당에 예비신자로 들어오도록 해주십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사제로서 살면서 묵주기도와 선교를 바라보는 체험적 시각이며, 아무런 인간적인 이해와 사고방식과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전혀 이해 관계없이 성당에 들어오시는 예비 신자분들을 바라보며 깨닫는 신비입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30)

 

아울러 주 하느님께서는 누구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짊어지도록 하지도 않으시고, 누구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거두어들이도록 하지도 않으십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6.9) 그리고 복음사업 특별히 선교에 있어서 누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쳐, 마치 내 것처럼 여기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복음사업을 이루는 데 있어서, “내가 기도해서 데려왔다.” “내가 데려와서 세례받게 해주었다.”라고 자만에 빠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9)

 

이렇게 놓고 보면, 묵주기도만이 주님께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충분한 도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청하는 우리를 보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은총은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복을 주고 고통의 아픔을 치유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 공동체 모두에게 주님의 뜻이 전달되고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주님의 은총이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축복과 풍요와는 반대가 될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주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기를 빌어야 하며, 주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뜻에 맞추어 변화시켜 주시기를 아울러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우리가 이것을 달라고 주님께 청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이것을 주시지 않고,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저것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당장 주님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영 안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방향으로 나갈 때, 때가 차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청하는 것을 주님께서 꼭 들어주시리라고 기대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청하고 의도하는 바가 주님의 뜻 밖에 있다면, 우리가 기도 생활 안에서 수정하도록 깨우쳐 주실 것이요, 우리가 알아듣지 못했다면,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에페 3,20-21)

 

그럼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 우리가 청하지도 않아도, 주님은 필요하다면 주실 것이고, 우리가 청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안 주실 터인데, 그냥 처분만 바라고 살면 되지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을 얻으려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께 엄마 나 배고파. 빨리 밥 줘!”라고 말해야만 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그리고 어머니가 보시기에 내가 배고파 보이면 밥을 차려주십니다. 그럼 그렇다고 우리가 어머님께 우리의 청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어머님께 청하고, 그렇게 청하면서 어머니와 관계를 맺게 되고, 어머니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어머님도 우리가 배고프다고 표현할 때, 더욱더 확신을 가지고 우리에게 우리가 청하는 간절함과 적극성에 따라 더 빨리, 더 많이, 밥을 내어주지 않으십니까? 또 그렇게 우리에게 밥을 차려주시면서, 어머님은 가끔은 귀찮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행복해하시고, 밥을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고 뿌듯해하지 않으십니까? 주님도 그런 의미의 연장에서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의 염원을 들어주려고 하시고, 또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 보이면, 다음에 다른 방법으로, 또는 우리가 청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과 다른 방법으로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려고 하십니다. 마치 고기만 먹지 말고, 채소도 먹으라고 하시는 듯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알아듣지 못하고, 빨리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방법과 자신에게 적절한 방향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맞이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꺼이 우리와 하나 되고자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주 하느님께 틈나는 대로 묵주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구원을 향한 정성과 노력 그리고 맞갖은 봉헌을 바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현세생활과 미래 구원을 위한 모든 필요를 가득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럼 우리는 그렇게 주님 은총으로 채워주신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웃과 나눔으로써, 선교의 삶을 살기로 합시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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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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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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