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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송 해설 - 출처 : 청주교구 최법관신부님 홈페이지에서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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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호 [kgh0727] 쪽지 캡슐

2007-11-17 ㅣ No.7765

 http://cafe.naver.com/cakorea/133

출처: 청주교구 최법관신부님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근데 좀 많이 깁니다.ㅡ.ㅡ;;;;

 

1. 성모송의 구성과 형성

 

성모송은 성 마리아와 관련된 기도이다. 그러나 이 기도는 성모님께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로 구성된 성모송의 첫째 부분(I)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 찬사이며, 둘째 부분(II)은 죽음과 죄가 지배하는 인생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도움을 청하는 교회의 기도이다.

인간은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기에 앞서 자기의 삶 안에 이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 의지가 스며들어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그래서 첫째 부분에서 마리아에게 베푸신 은총을 찬미하고 그 은총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베풀어지기를 신뢰하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의 순박한 인격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크게 작용한 탓도 있지만, 이보다 먼저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계셨고 마리아를 모든 여인 중에서 복된 여인으로 축복하신 것이다.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온유하고 섬세하며 따뜻하고 자비로운 은총을 마리아를 통해 드러내 보이셨음같이 우리에게도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기도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아멘'으로 끝을 맺는다.

 

1) 성모송 구성과 우리말 번역

성모송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 부분은 천사와 엘리사벳의 인사이고, 둘째 부분은 교회의 기도이다.

 

첫째부분(I)

천사의 인사(1):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ㄱ).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ㄴ). (루가 1,28)

엘리사벳의 찬미(2): 당신은 여인 중에 복되시며(ㄷ)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ㄹ). (루가 1,42)

 

둘째부분(II)

교회의 기도(3): 성 마리아님, 하느님의 어머니,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우리말의 성모송은 가브리엘의 천사의 인사(ㄱㄴ)와 엘리사벳의 찬미(ㄷㄹ)를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형식상으로 매끄럽지 못하다. 우리말의 성모송에는 "아버지가(ㄱㄴ) 방에 들어가신다(ㄷㄹ)" 라고 되어야 할 것이 마치 "아버지(ㄱ) 가방에(ㄴㄷ) 들어가신다(ㄹ)"는 식으로 배열되어 있는 꼴이다. 물론 내용상으로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의 차이만큼의 오류는 아니더라도, 축복과 신앙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내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말 성모송은 불가타 성서와 몇몇 사본의 배열을 따라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ㄴ)하는 천사의 말에 본래 엘리사벳의 찬미인 "당신은 여인 중에 복되시며"(ㄷ)를 중복하여 붙여놓았다. 그러나 이 두 문장을 (...이니)로 연결하여 놓아서 어디까지가 천사의 인사이고 어디부터가 엘리사벳의 찬미인지 알아보기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를 오히려 천사의 인사로 여기게 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다음에 마침표를 찍고, "여인 중에 복되시며..."로 문장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성서의 원뜻에 충실하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을 "여인 중에 복되신" 이유로 여기게끔 나열된 우리말 성모송은 성서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해할 소지도 갖고 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라는 우리말 표현에 따르면, 마리아가 축복받을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가복음 본문에 따르면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은 마리아가 축복받을 이유라기보다는 기뻐해야 할 이유에 더 가깝다. 설령 불가타 성서에 따라 "여인 중에 복되다"는 말이 천사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해도, 우리말 번역문처럼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이 "마리아와 태중의 아기가 복된" 근거로 이해할 수는 없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복되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와 마리아의 신심과 더 관련되어 있다.

또 주님께서 함께 계신 것도 복되다는 의미 이전에 동정으로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가 당황함을 이기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탄생예고를 듣고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루가 1,29)하였던 것이다. 마리아의 그런 처지를 볼 때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은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루가는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하고 말하게 한다. 신앙하는 자는 복이 있다. 신앙 가운데 얻은 아들의 잉태와 그로 인한 기쁨이 축복의 원천이다. 예수님은 이런 신앙과 축복의 결실이다. 성모송은 기쁨과 신앙에 차 바치는 기도이다.

 

2) 형성

천사의 인사(루가 1,28)와 엘리사벳의 찬미(루가 1,42) 및 교회의 기도로 구성된 지금의 성모송은 6세기경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천 년간 형성되었다. 먼저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찬미가 한데 묶여 하나의 기도문으로 형성된 것은 대략 6세기경 시리아 교회의 세례예식에 나타난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7세기경의 토기 조각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볼 수 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당신은 여인 중에 복되시며 당신의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님을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는 대림 제 4주일 봉헌기도에 성모송의 첫째 부분을 도입하였다. 전례로부터 일반 신심으로 이 기도가 차츰 확산되어 바쳐지면서, 사람들은 청원한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반복하기도 하고 화살기도 형태로 바치기도 하였다. 도장, 종, 그릇, 촛대, 가구 등에 이 기도문을 새기기도 하였다. 1090년경 독일의 아다 공작부인은 이 기도를 매일 60번씩 바쳤으며, 아이베르트 성인은 150편의 시편에 따라 매일 150번씩 바쳤다. 거기다 점점 보속행위까지 더해졌다. 이다 복자(+1310)는 매일 천백 번씩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면서 이 기도를 바쳤고, 18세기의 마리아 막달레나 복자는 매일 천 번의 성모송을 바쳤는데 성모송을 한 번 바칠 때마다 한 번씩 바닥에 엎드렸다고 한다.

둘째 부부(하느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의 경우, 처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첨가되다가 1568년 교황 비오 5세 때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그 중에서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의 형태는 14세기에 나타났고,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는 1551년에 공식적으로 합의되었다.

 

2. 기뻐하소서

 

우리말 성모송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으로 시작하지만, 성모송의 기원이 되는 루가 복음 1장 28절은 그리스말 "카이레"로 시작한다. 그리스말 '카이레'는 '기뻐하다'(마태 5,12; 루가 15,32 등)는 의미를 지닌 동사에서 파생된 그리스식 인사말로, 성모송에서는 '기뻐하소서'로 되어 있다. 모든 인사가 그러하듯 '카이레'도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마태 26,49) 혹은 헤어질 때 '안녕히 계십시오'(필립 3,1; 4,4)나 편지 첫머리의 인사말(야고 1,1) 등으로 쓰인다. 굳이 유다식의 인사로 바꾸어보자면 샬롬(Shalom: 평화)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이 카이레를 예로니모 성인이 라틴말로 옮길 때 '아베(Ave)'로 번역했다. 이 '아베'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베 마리아(Ave Maria)'의 '아베'이다.

카이레가 그리스인들이 널리 사용하는 인사말이긴 하지만, 마리아가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였다(29절) 라든지, 일반적인 인사말로 루가가 '카이레' 대신에 '샬롬'을 사용한 점(루가 10,5; 24, 36) 등을 들어,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이 인사를 단순한 인사로 보기보다는 마리아를 기쁨으로 초대하는 명령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인사는 '마리아님 안녕하세요?'라는 정도를 넘어 '마리아님 기뻐하세요'라는 명령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명령형은 이미 구약성서의 여러 군데서 보인다: "시온의 딸아, 한껏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즈가 9,9). "시온의 딸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시온아, 두려워 말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스바 3,14-17).

이와 같이 예언자들은 주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기뻐하라고 명한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인사도 이런 명령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리아님, 기뻐하세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처음부터 자기를 죄와 고통에서 구해 줄 해방자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구원자를 갈망하며 희망하여 왔다. 그런데 이제 그 구원자가 탄생할 것이다.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없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천사는 이 기쁨 안으로 마리아를 초대한다. 천사의 인사는 초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첫째,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루가 1,30)이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가득한 마리아를 하느님의 성전(聖殿)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거처로, 당신의 어머니로 삼으셨다. 그 궁전에 잉태된 아기는 곧 하느님의 아들(루가 1,35)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기뻐해야 한다. 둘째,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루가 1,28)이다. 하느님의 성전(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자)이 되었으니 기뻐해야 하고,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마리아의 모태에 성령의 열매가 자라기 시작했으며 마리아 안에 성자와 성령이 작용하고 있으니, 마리아는 무조건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쁨이 또한 믿음에 이어 복됨의 근원이다.

 

3. 마리아

 

우리말 성모송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야'로 시작하고 라틴말 성모송은 '아베 마리아'(기뻐하소서 마리아)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리스말 신약성서 원문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원문은 "기뻐하소서. 은총을 받은 이여(루가 1,28)"라고만 되어 있다. 마리아의 이름은 두 절 다음(1,30: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에 나온다. 후에 성모송을 구성할 때 30절의 마리아 이름을 삽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이름은 단순히 부르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기울이는 정성이나 애정은 크다. 성서에서도 작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여러 군데서 본다. 가령 즈가리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들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였고(루가 1,57-63), 요셉 또한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붙였다(마태 1,25).

예수님의 어머니가 왜 마리아로 불려졌는지 그 유래를 성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리아라는 이름에는 이미 마리아란 인격이 지닌 구원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마리아는 모세와 아론의 누이의 이름인 '미리암' 또는 '마리암'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름은 '뮈르'와 '얌'의 두 단어가 복합된 것이다. 뮈르는 이집트말로 애인이라는 뜻이고 얌은 히브리말로 야훼의 축소형이다. 마리아는 '야훼의 애인', '하느님의 애인'이라는 뜻이 된다. 과연 마리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여인으로 선정되었으며 그 이름에서 그의 인격과 성격이 암시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모든 여인들로부터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이 여인에게서 나타내 보이셨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고 마리아 안에서 당신의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모습을 알리신다.

둘째,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큰 시리아의 옛 도시 우가리트에서 1929-1932년 사이에 발굴된 문서에는 '므림'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 단어는 히브리말 '마롬'으로 그 뜻은 '들어 높인 자'라는 뜻이다: "야훼께서는 아득하게 높이 계시면서"(이사 33,5), "높이 계신 하느님 야훼"(미가 6,6), "야훼께서 저 높은 성소에서 굽어 보셨다"(시편 02,19). 마리아의 어원을 마롬에서 찾을 경우 마리아는 구원사에서 높이 올림을 받은 고결한 여인이엇다.

셋째, 마리얌 또는 미리얌은 히브리말 '마르'(맛이 쓰다)와 '얌'(바다)의 복합어라는 설이다. 이럴 때 마리아의 뜻은 '고통의 바다'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고통의 길에 동참하였다는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것은 신심에 찬 해석이라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얻은 이름이기 때무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말로 표기된 마리아의 히브리 이름이 '마리'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다. 마리는 뚱보, 통통한 여인이라는 뜻으로, 마리아는 통통한 여인, 풍만한 여인, 살이 보동보동한 여인이라는 말이 된다. 히브리말로 통통하다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이어서, 이 경우 마리아는 '마리아의 여인'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 또한 세 번째의 경우처럼 신심에 찬 해석일 가능성이 많다.

위의 네 가지 해석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가 마리아 이름의 가장 근원적인 해석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 하느님의 애인, 은총을 받은 애인을 통해 구세주를 보내 주시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애인으로 인류에게 구원을 안겨 주었다.

 

4.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

 

성모송에서 세 번째로 살펴볼 중요한 단어는 천사의 인사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로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이다. 라틴어 성모송과 우리말 성모송에는 "은총이 가득하신(여인)"으로 되어 있지만 그리스말 신약성서 원문에는 '케카리토메네'(은총받은 이: 루가 1,28)라는 한 단어로 되어 이다. "은총받은 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은총을 붓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우다'라는 동사의 수동 완료형 분사이다. 이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채워진 자라는 말로서,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루가 1,30)에서 잘 설명된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 하느님이 아들을 낳도록 마리아를 선택하셨다(1,31-35). 예로니모 성인은 '은총받은 이'라는 단어가 충만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감안하여 이를 라틴말로 옮기면서(불가타 성서) '그라씨아 플레나'(gratia plena "충만한 은총")의 두 단어를 사용하엿다. "은총이 충만하다"는 이 번역은 점차 가톨릭 교회 안에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은총받은 이"라는 천사의 이 인사에는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는 죄인인 데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의해 불림받고 도 받아들여졌다는 은총론의 내용이 담겨 있다. 자비롭게 인간을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인자하심,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인격적 사랑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이제 구원의 중재자인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은총을 받은 이"라는 이 찬사는 그리스도론적인 주제이지만 마리아의 인격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신심은 이 점을 발전시켰다. 마리아의 의미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인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마리아의 이름에서 보았듯이 마리아의 인간됨에도 있다. 마리아는 성령의 현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천주 제 2위이신 성자만이 아니라 천주 제 3위이신 성령의 신비도 묵상하게 된다. 마리아는 성령이 작용한 상대이고 성령의 소식을 받고 이제 지속적인 성령의 소유자가 되었다. 성령께서 먼저 마리아를 사랑하셨고 마리아 안에 머물며 거처하신다. 마리아가 성령의 성전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은총을 입은 여인인 것이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 너를 감싸주실 것이다"(루가 1,35) 하고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을 알린다. 천사의 이 말에 마리아와 성령의 관계가 뚜렷이 나타나 있으며, 왜 마리아가 은총을 받은 여인인지 알 수 있다.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와 머물기에 마리아는 은총을 받은 여인이다.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와서 머문다는 것은 마리아가 곧 성령의 집이 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직접 마리아에게 와 머무신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령께서 머무는 성령의 집이 되었으니 마리아는 은총 그 자체를 받았고 그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신구약 성서 전반에 걸쳐 성령께서 한 여인에게 내려 왔다는 표현은 마리아의 경우가 유일하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리아를 두고 성령으로 형성된 새 창조물, 새 하와라고 서술한 것은 이런 근거에서이다(교회헌장 56).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마리아를 신적인 인간(하느님의 성전)으로 꾸미신 것이다. 마리아가 신적인 인간으로 꾸며지고 성령의 집이 되었기에,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도 거룩하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35).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인 것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마리아 스스로가 성령의 집이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 "은총을 받은 이"라고 한 천사의 인사는 마리아가 성령의 궁전, 하느님의 거처가 되리라는 인사였다. 때문에 마리아에게 무조건 기뻐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이 되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인사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구원을 동경하는 이간(구원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만나고 있다. 인류의 전 역사가 마리아 안에 결성된 그 점을 향하여 흐르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마리아에게 보여진 하느님의 크신 일에서 우리는 단순히 인류의 희망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기대가 실현되어감을 체험하게 된다. 어쩌면 엘리사벳은 이런 구원사가 마리아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를 "축복받은 여인"으로 칭송하였을 것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는 내용상으로 "기뻐하소서 하느님의 애인이여, 당신의 성령의 궁전입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성모송의 이 첫 구절은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보낸 사랑을 찬송한 노래이며 마리아가 성령의 궁전이 된 것을 기뻐하는 노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전에서 탄생하셨다.

 

5.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은총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이 갖는 인격적 만남의 최고 형태를 마리아 안에서 나타내 보인다(성부의 딸, 성자의 어머니, 성령의 신부). 그렇기 때문에 천사는 "은총을 받은 여인이여"라는 말에 이어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고 그 이유를 댄다. '주님'(퀴리오스)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이름 '야훼'대신 그분을 최대 존경의 표시로 불렀던 '아도나이'의 그리스식 표현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주님의 영이 너희와 함께' 또는 '주님께서 너와 함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이 말은 단순한 인사말로도 사용되었지만(판관 6,12), 예언자적 선언으로도 쓰였다. 이 경우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선언은 하느님께서 모세 등과 같은 당신의 종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시는 신탁과 관련한다. 천사는 이 말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마리아는 처음 천사의 인사를 받고 당황하였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30절).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은 또한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계약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지속적인 현존과 항상 이스라엘 편에 서 계심을 보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계약을 맺음으로써 마리아를 하느님의 집, 성령의 궁전으로 만드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새로운 계약의 궤가 되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계약의 궤와 함께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였듯이, 신약에서는 인류의 새로운 계약의 궤인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활동을 체험하게 된다. 마리아에게서 구세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으니, 마리아는 성령의 궁전, 성부의 딸, 성자의 어머니이시다.

 

6.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성모송의 첫째 부분(I)의 둘째 구절은 엘리사벳의 찬미로 시작한다: "여인 중에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성령의궁전으로서 태중에 육이 되신 아들을 잉태한 뒤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다. 마리아의 문안인사를 받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가 뛰놀았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마리아의 인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고 큰소리로 외친다: "모든 여인들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십니다"(루가 1,42).

엘리사벳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는 것을 느끼며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복되다'(에우로게인)는 말은 성서에 자주 나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성서적 해석은 '감사를 표하다', '축하하다', '축복하다', '복을 빌다', '칭찬하다', '-에 대해서 기쁘다', '칭송과 영광을 돌리다', '찬미하다'(루가 1,64), '번영케 하다'(사도 3,26) 등이다.

마리아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너는 기뻐하고 찬미할 이유를 가졌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구세주 아기를 잉태하셨으니 복되고 또 믿으셨으니 복이 있다. 한 생명을 잉태한 것은 분명히 복이다. 그러나 루가에의하면 이 아기는 장차 마리아에게 기쁨보다는 아픔을 가져다 줄 존재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가슴에 칼을 꽂을 그런 존재이다. 그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셨지만 높은 데 머물러 계시지 않고 가난하게 되셨으며, 고통과 십자가와 하나가 되셨다. 구세주라기에는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존재였다. 도저히 행복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고,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멀리 피하여 달아나야 할 십자가를 지신 분이셨다.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의 어머니라면 바로 이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마리아가 축복받은 여인이라면 이 고통의 예수님을 잉태하였기 때문일진대, 그것을 축복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고통을 잉태하신 분 마리아가 모든 여인 중에 가장 축복받은 여인일 수 있을까? 엘리사벳은 인류가 그토록 복을 기원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고통을 외면하고 피해 가려고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이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큰소리로 외친다.' '큰소리로 외치다'는 감동에서 나오는 소리이다. 엘리사벳은 감동하여 마리아를 "여인중에 축복받은 여인"이라고 부르고,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나이다"하고 찬미한다. 이 찬미는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당신의 구원계획으로 쓰신 데에 대한 찬미이다. 엘리사벳은 45절에서 마리아가 복된 이유를 댄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믿음이 복됨의 이유이고 원천이다. 마리아가 복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점을 넘어선다. 더군다나 우리말의 성모송처럼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만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난한 이는 복이 있다"(마카리오스)고 하신 말씀(루가 6,22)과 관련해서 볼 때, 복음의 첫 행복이 주님이 말한 것을 모두 믿은 마리아에게 선언된 것이다.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엘리사벳의 찬미는 군중 속의 한 여인이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하고 외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한 데서(루가 11,27-28) 분명해진다. 엘리사벳과 이 군중 속의 여인의 외침에는 생모보다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복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믿음이 복됨의 근원이다.

엘리사벳의 이 찬미에는 은총이 선물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엘리사벳은 '복되다'는 말에 이어 "여인들 가운데"라는 말을 덧붙인다. 엘리사벳이 보기에 마리아는 모든 여인들 중에 우뚝 솟은 방식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여인이다.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우신 그런 사람이야말로 인정받겠기 때문"(2고린 10,18)일 것이다. 선물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이며, 선물받은 인간을 내면적으로 새로 정돈하고 새로 창조하여 하느님 마음에 들게 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성령의 궁전으로서, 인간이 되시는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어느 누구보다 축복받은 여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성령의 궁전인 메시아의 어머니로 은총을 받았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이유가 충분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축복하다'가 수동분사로 쓰였다는 것이다. "너는 찬미받을 자이다." 즉 마리아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원칙적으로 성령의 활동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축복받은 자가 되었다. 인간이 되기까지 하신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이 마리아를 은총의 여인으로 부르신 것이다.

말아가 모든 여인 중에서 축복을 받은 것은 온전히 하느님의 덕이며, 엘리사벳의 찬미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마리아 안에 활동하고 계신 성령 때문이다. 천사의 인사 중에 나오는 '은총을 받은 자'나 엘리사벳의 찬미 중에 나오는 '축복받은 자'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인 중에'라는 표현은 최상급의 표현이다. 즉 마리아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성령의 궁전이며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마리아의 삶 안에서 하나로 만난다. 마리아는 축복받은 여인으로서 인류사에 여성의 역사적 죄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다. 예수님의 족보(마태 1, 1-16)를 훑어보면 모든 여성이 다 축복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 여성들은 한결같이 불명예스러운 여인들이다. 즉 죄인들이다. 가령 다말은 남편의 대를 이어준다는 뜻은 가상했으나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아기를 가졌고(창세 38장), 라합은 이방 창녀였으며(여호 2,11), 다윗의 증조모인 룻도 이방인이었고(룻 1,4), 우리야의 아내였던 바쎄바는 다윗의 정부(情婦)였다가 남편의 억울한 죽음 후에 솔로몬의 어머니가 되었다(2사무 11,2-27).

그리스도는 이런 죄 많은 여인들의 후손이었으며 이렇게 해서 죄 많은 인류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 마리아는 죄 많은 역사의 마지막 일원이 되신 것이다. 마리아와 함께 이제 부정적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마리아는 진실로 모든 여인 중에 복된 여인이다.

마리아가 모든 여인 중에서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 됨으로써 '여성적인 면'도 축복을 받았다. '여성적인 면'이란 꼭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다. 여성적인 면은 '생명'과 관련이 있다(하와=생명, 창세 3,20참조). 생명의 기원, 생명의 보호, 요리(요즘엔 부엌일을 돕거나 야외에 나가서 밥짓는 일 등을 남자들도 곧잘 분담하는데 이는 남성이 자기 안의 여성적인 면을 드러내는 일로 전인 형성을 위해서도 좋은 현상이라 하겠다). 창조, 직관력, 감수성, 주의력, 섬세함, 사랑, 따뜻함, 부드러움, 포근함 등이 여성적인 것을 나타낸다.

어느 누구보다 마리아의 삶 안에서 이런 여성적인 면이 체험되었고 마리아와 함께 이런 여성적인 면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마리아와 함께 여성적인 면이 인정을 받았다면, 마리아가 여성의 지위를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여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여성성을 찾아줌으로써 남녀 평등의 선구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마리아는 - 한 여자로서 -하느님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남성적이고 부성적인 면과 동시에 여성적이며 모성적인 면을 드러내는 심오한 존재이다.

하느님이 이 심오함은 역사적으로 보아 성령 안에 나타나는데, 이제 이 성령께서 마리아에게로 내려와 그 절정을 이룬다. 히브리말로 성령(ruach)은 여성명사이다. 성령은 창조적이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고아들처럼 버려진 자식(요한 14,18)을 위로하며(위로자 성령), 자상한 어머니이며, 자녀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희생과 봉사로 따르도록(로마 8,15) 기도로 안내해 주신다. 어머니 같은 이 성령 안에서 신자들은 기도를 바치며(로마 8,26), 세상 끝날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하기를 (묵시 22,17) 간청한다. 이러한 성령의 자상함과 모성적 배려가 역사상에서 흐지부지 흘러가버리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구체화되었다. 이것이 마리아의 구원사적 역할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세상 끝날 때까지 찬미받아 마땅한 여인 중의 여인인 것이다. "너는 여인 중에 복되도다."

7.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마리아는 성령의 궁전이 됨으로써 모든 여인 중에 가장 축복받은 여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장차 이 여인에게서 태어날 아기도 축복받아야 함은 당연하다. 이러하여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루가 1,42) 하고 예수님을 찬양한다. 본시 엘리사벳의 인사에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교황 우르반 4세(1261-1264)가 "태중의 아들"에 예수를 덧붙여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성모송의 주제는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넘어간다.

마리아와 예수님은 둘 다 성령으로 가득 찬 분들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가득 찬 것은 우선 성령의 작용으로 잉태되었기(마태 1,18-20; 루가 1,35)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물렀고(마르 1,10),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면서 낭독하신 이사야 본문도 성령과 관련된 것이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셨다"(루가 4,18-19; 이사 61,1).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마귀를 쫓아내셨다(마태 12,28). 그분의 몸은 영적인 몸이었다(1고린 15,44). 그 예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 축복받은 자"로 환영받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축복받아야 할 예수님의 삶의 의미는 예수라는 이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천사로부터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가 "예수"라 불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루가 1,31; 마태 1,21). 예수라는 이름은 원래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 예슈아, 예슈를 그리스식으로 표기한 이름이다. 팔레스티나에서도 헬레니즘이 일반화된 기원전 2세기경부터 예수라는 이름은 그 지역에서 흔한 이름중의 하나였다.

이 이름은 야훼(백성과 함께하고 백성을 위하시는 하느님)와 '요'(해방하다, 돕다, 구하다, 승리를 구하다)의 복합어로 '야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 하느님이다. 이처럼 예수라는 이름에는 벌써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마리아의 아들의 사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분은 인간의 체면을 깎아 내리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숙명적인 상황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구원하고자 하셨다.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 파멸의 세상 속으로인간이 되어 오신 것은 바로 그 파멸의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바오로가 왜 예수라는 이름에 구원의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9-10).

예수라는 이름은 인간과 하느님의 모든 원수를 굴복시킨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주님이시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가 1,33). 이 사건을 두고 성목요일 예절 때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이 우리에게 왔고 부활과 생명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구원되었고 해방되었다."

예수님과 함께 성모송의 첫째 부분은 끝난다. 성모송 첫째 부분은 마리아에게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난다. 마리아와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은총과 구원의 핵심을 만난다.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자신의 신비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아들과 성령의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성모송에는 인생의 근원적인 진리가 표현되어 있다.

 

8. 성 마리아

 

천사와 엘리사벳의 인사에 이어 성모송의 둘째 부분인 교회의 기도가 따른다. 이 기도는 "성 마리아님, 하느님의 어머니"(Santa거룩한/성 Maria마리아 Mater어머니 Dei하느님의: 산타 마리아 마테르 데이)로 시작하는데, 우리말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하느님의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으로 번역되어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진다. 라틴말 표현에는 "거룩한 어머니"가 아니라 "거룩한 마리아"가 강조되어 있다. 교회는 천사와 엘리사벳을 통하여 마리아를 기쁨의 여인, 은총의 여인, 신앙의 여인, 축복받은 여인으로 칭송하고는, 하느님 백성들로 하여금 조용히 "성 마리아님, 하느님의 어머니"하고 부르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이제와 죽을 때에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간청하게 한다. "성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하고 부르며 우리 인간을 위하여 이제와 죽을 때에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간청하게 한다. "성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부름에는 인간이 처한 각박한 상황과 구원을 갈망하며 어머니께 매달리는 연약한 인간의 마음이 애틋이 그려져 있다. 원문에 따라 그 뜻을 새겨 본다.

앞에서 우리는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찬미를 살펴보면서 마리아(하느님의 애인)가 성령의 궁전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태어남을 보았다. 이제 교회는 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성' 마리아라 부른다. 성서에게 거룩함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이다.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다(대영광송). '거룩함'이란 하느님께만 적용되는 말로서 인간에게 사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거룩함이란 우리가 흔히 "저 사람 성인이다..."하고 말할 때의 깨끗함이나 착함 등 도덕적 의미 이상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꼬데쉬'인데, '떼어놓다',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은 그분이 세상의 것과는 '다른' 분으로, 인간과 세상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함(聖)과 속됨(俗)을 구분짓는 인간의 언어와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지극히 다른 분이기에 거룩하시다.

모세가 활활 타오르는 가시덤불에 접근하려 했을 때 "가까이 오지 말라. 지금 네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어라"(출애 3,5) 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하느님께서 완전히 다른 분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다름 앞에서 인간은 일상의 먼지가 묻은 신발을 벗어야 한다. 두려움에 말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모세가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될까 겁이 나서 자기의 얼굴을 가렸던(출애 3,6) 것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얼굴을 마주 바라본다는 것은 대등한 위치를 말한다. 자기와는 격이 다른 어른 앞에서 인간은 눈을 내리깔아야 한다. 모세는 하느님을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거룩한 분으로 체험하였다.

이제 교회가 마리아를 '성 마리아님' 하고 부른다면 그 거룩함을 이제 마리아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거룩하시다.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나 아예 세상 밖에 존재하시지 않고, 인간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 계시면서 사랑으로 인간을 감싸주고 어루만져 주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함을 항상 인간에게 전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삶 속에서 매순간 매사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체험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인간들 마음속에 현존하시고 또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기에 인간도 거룩하다. 마리아는 자기의 존재로 이 거룩함을 보여 주셨다.

거룩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 예수님은 거룩하시다. 인간 예수님은 그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똑같이 흠숭과 찬양을 받으신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진실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체험하게 된다. 교회는 또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을 거룩하다고 한다. 예언자, 사도들은 거룩하다. 그리고 교회도 거룩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을 전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신약은 그리스도의사명에 충실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거룩하다 했으며, 인간뿐 아니라 신적 기능에 쓰이는 물건들(성전, 제대, 성작...)도 거룩하다 했다. 물건은 거룩한 하느님과 관계할 때 거룩해진다. 자기 삶을 거룩한 하느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은 거룩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하느님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인간에게 끊임없이 거룩해지기를 요구하신다. 하느님처럼 완전하게 되려는 행위는 거룩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행위의 모범이다. 이렇게 볼 때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진실되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며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한다.

우리가 '성 마리아'라고 하는 것은 마리아가 이 거룩함을 자기의 인격 안에 구체화하였기 때문이다. 성령의 궁전인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마리아는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런 면에서 우리말의 성모송에서 "성모님"(聖母:거룩하신 어머니)이라고 번역한 것은 의의가 있다.

 

9. 천주의 어머니

 

신약 성서 전반에 걸쳐 마리아를 두고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표현한 데는 단 한 곳도 없다. 마리아는 다만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불릴 뿐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내 주님의 어머니'(루가 1,43)라고 부른다. 여기서 주님은 예수님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3세기경부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에페소 공의회(431)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신앙조문으로 삼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참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인간의 조건을 지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 예수,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 예수께서 영원한 성자이시기에 우리의 인간성은 그냥 부패해버리는 흙덩이가 아님을 주장할 수 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어머니라는 것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부정하면 예수님의 신성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인 것은 성령에서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인 것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 참 하느님인 까닭도 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낳게 될 것이라고, 성령의 궁전이 될 것이라고 알리면서 마리아의 모성을 신격화시켰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인 것은 마리아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모성을 신적 모성으로, 다시 말해 영원한 성자의 어머니가 되도록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심으로써(루가 1,37) 마리아는 성령의 궁전, 생활한 궁전이 되었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계약의 궤가 되었다. 마리아는 성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어머니께 기도할 때 우리는 어머니의 존재를 새삼 느끼게 된다. 어머니는 단순히 아기를 낳는 것으로 얻어지는 품위가 아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알게 모르게 그 아기의 일생을 동행한다. 진정한 어머니는 아기가 처음 잉태되었을 때의 심정으로 평생을 지켜본다. 마리아는 그러한 어머니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한 이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일생을 동행하였다.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지켜보는 모습이나 죽은 아들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모습 또한, 처음 예수를 잉태한 그 마음 그 자세 그대로였을 것이다.

 

10.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성 마리아님"하고 부르는 교회의 의도는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이어지는 기도에서 분명해진다. 인자하시고 축복받은 어머니 앞에서 우리 죄인들이 간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를 위하여 빌어달라는 것 말고 무엇이 또 있겠는가? 성령의 궁전이며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감싸고 있는 신비에 대한 묵상은 이렇게 해서 구원을 간구하는 인간들의 간절한 기도로 끝맺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달라고 마리아께 간청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는 것일까? 아니, 인간은 도대체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칠 수 있기나 한가? 성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서의 다른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면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요구하신다(루가 11,1-13).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그 어느 부자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며 그 어느 가난한 이라도 도움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인간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도 죽기 전에 하느님께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마르 14,36) 하고 기도하지 않으셨던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상황은 때로는 '울다, 부르짖다' 등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는 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우리가 억눌려 고생하며 착취당하는 것을 굽어보셨습니다"(신명 26,7). 하느님께 울부짖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청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비하셔서 인간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마태 7,7).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셔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엘리사벳이 나이 많아 아기를 가진 것이라든지 마리아가 처녀로 아기를 가진 것이 벌써 하느님의 전능으로 일어난 일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루가 1,37; 마태 17,20 참조).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 너희가 기도하면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3-24).

마리아는 하느님의 이런 자비와 전능의 마음을 신뢰한 여인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하고 보통 사람 같으면 실의에 바지고 절망할 상황에서도 마리아는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리아에게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매순간에 늘 함께 있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 하느님께서 강생하실 때,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낫게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발치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그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마리아는 늘 함께 있었다. 구원사의 매순간에 늘 함께 하시는 우리 기도의 중개자인 마리아에게서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을 보게 된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통해 아버지의 신비가 또 전달된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 죄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빗나간 사람이다. 이웃과 올바르고 형제적인 관계를 맺고 세상 모든 것에 책임을 지며 어린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살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멀리한 사람이다. 죄는 창조에 대한 폭력이며, 인간됨을 포기하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이런 죄스런 상황에서 우리는 마리아께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구한다. 우리가 우리의 죄스런 존재를 위하여 빌어달라고 마리아께 청하는 것은 마리아는 '죄인들의 피난처'(refugium peccatorum)이기 때문이다.

 

11.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이제'는 우리의 죄스런 현재 상황이다. 마리아는 이 죄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지만, 특히 우리가 '죽을 때' 기도해 주실 것이다. 마리아는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외로운 사투를 벌이는 모습과 임종을 그 아래에서 지켜 보아야 하셨다. 십자가 아래서 아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그때 어머니는 어떠한 기도를 바치셨을까? 어머니의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모두를 용서하시고,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의 죽음이었다.

성모송을 바치면서 우리는 임종하는 아들을 지켜보시는 그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그 기도로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성모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틀림없이 마리아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기도해 주시리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우리는 죽음이 더 이상 인간에게 무섭고 끔찍스런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죽음은 인생을 마감시키는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인생을 종합하는 대사건의 순간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는 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평생 맺어왔던 사랑의 관계를 마지막 언어와 눈짓과 몸짓으로 종합하여 고백하는 순간이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이별하기 싫은 순간이다. 죽음은 사랑의 행위이다. 죽음은 또 모든 것을 절대 신비에 맡기고, 자기의 지금까지의 삶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엄숙한 순간이다.

죽음의 순간, '죽을 때' 인간은 가장 나약한 모습을 띠지만, 가장 겸손하고 사랑스런 자세로 사랑하는 사람과 절대 신비앞에 서게 된다. 죽음이 이런 신비스런 사랑으로 한 인간에게 나타날 때, 죽음이 한 인생을 이런 사랑과 신비와 하나가 되도록 관계를 맺어줄 때, 인간은 이기적인 자아(ego 에고)의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나 구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성모송은 인간을 그런 사랑과 신비의 순간으로 안내한다.

사람은 잘못 죽을 수 있다. 미움과 증오 가운데 원수가 되어 죽을 수 있다. 때문에 성모송은 성모님께서 우리가 죽을 때 우리 곁에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사랑 가운데 죽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사랑과 자비 자체이신 하느님을 느낄 때 인간의 죽음은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성모송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고 죽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이신(vita, dulcedo et spes nostra) 마리아께 인사드린다(salve).

 

12. 아멘

 

성모송은 아멘으로 끝을 맺는다. 아멘은 하느님의 고귀한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그 일이 비록 힘들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아멘은 믿음이요 확신이다. 성모송이 아멘으로 끝맺는다면 아멘의 이런 뜻을 마리아에게서 보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앙은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시키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해준다. 성모송은 신앙의 기도로 현세의 어려움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희망의 기도이다. 때문에 은총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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