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성당 게시판

어느 날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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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wansub69] 쪽지 캡슐

2000-10-12 ㅣ No.2764

 

남들처럼 열심히 ’마련하기 하여’ 살아가는 이씨.

전세방을 얻기 위하여, 컬러 텔레비젼을 가지고자,

냉장고를 사고자, 마침내 집을 장만하고자,

앞선 친구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달려온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두통이 일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고통이었다.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먹어 보았으나 효과는 별로였다.

직장 동료의 권고에 따라 종합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보았다.

 

평소 안면이 있는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타났다.

"아직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에게는 이르지만..."

"그럼 암이란 말입니까?"

"그 결과는 사흘 후에 나옵니다. 그렇게 속단하지 마십시오."

"다 압니다. 친구가 나 같은 증상을 보인지 여섯달 만에 갔지요."

의사 앞에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동료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집에 와서 돌아보니 자신의 삶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평화보다는 불안이 많았던 나날.

몇 쪽 보다가 남긴 책이며, 항시 내일로 미루어 온 여행이며

마저 정리하지 못한 것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것들을 6개월 내에 완료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3년만 더 살게 된다면 몰라도.

아니 생명이 1년만 더 연장된다면...

그러나 그한테는 이미 하루가 넘어가 버린

5개월 29일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번 멋지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게 되다니...’

그는 신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에게는 이 세상의 행복을 단 한번도 맛보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불섶이 흥건히 젖도록 울었다.

사흘 후, 이씨는 입원 준비를 하여 병원으로 갔다.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제는 제가 오진을 했었습니다.

엑스레이 필름을 다시 검토해 보니 그것은 암세포가 아니라

작은 종양이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물결치듯 밀러드는 햇살을 느꼈다.

어느 하루 뜨지 않은 적이 없는 태양이건만 이때처럼 해가 찬란하게

느껴졌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돌틈에 피어 있는 냉이꽃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 네가 거기 있었구나.’ 그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자 풀꽃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저도 여기 있어요’ ’저두요’ 하고.

그는 풀꽃들에게 일일이 입을 맞추었다.

"그래 너희들이 거기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지냈구나. 미안했었다."

상쾌한 봄바람이 살짝 그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오, 너도 여기 있었구나.’

그는 바람을 소중히 여기는 손바닥에 받아든 듯이 하여 들이켰다.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공기 한모금.

’아, 이처럼 단 공기를 이제껏 내가 모르고 지냈었다니,

정말 죄송한 일이었어.’

그는 그제서야 행복을 제대로 알아본 것 같았다.

의사가 그의 곁에서 말했다.

 

"위기의 고비를 넘긴 사람은 대개가 당신과 같이 이 순간이 인생의

첫걸음인 것처럼 감격하고 다짐을 새로이 하지요.

허나 그것도 작심 사흘입니다. 며칠 지나면 다시 자기가

무한하게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몰염치해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꼭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루 하루를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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