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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자 유다에 대한 다윗의 예언들 외 - 사도행전 1,15-26 #<나부활7주일1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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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3 ㅣ No.1553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5월14일 마티아 사도 축일 독서 말씀 중 16절 말씀  "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말씀이 이루어 져야 했습니다."  여기에 관한 다윗의 예언 말씀 나오는 구약성경 부분 좀 알려주세요.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5-17.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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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4) 아래의 사진은 제1530번 글을 공개한지 30분도 경과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에, 동일한 ip(인터넷 접속 주소)를 사용하면서, 한 명이 한 개 이상의 id를 사용하여, 반대적어도 두 번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조회 2건반대 3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한 명이 동일한 ip(인터넷 접속 주소)로 접속하게 되는 단체 혹은 자신의 컴퓨터에서 한 개 이상의 자신의 가족들 혹은 단체 구성원들의 id을 사용하여 고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였다면, 악의적 의도를 지닌 자가 아니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 인터넷 게시글 대화의 환경이므로 다른 이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이라는 대단히 잘못된 판단과 무지 때문에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서 위와 같은 추한 행동을 하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자 때문에라도,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은 유의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표준국어 대사전: 나쁜 일을 아무리 남모르게 한다고 해도 오래 두고 여러 번 계속하면 결국에는 들키고 만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는 속담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됩니다.

 

 

 

+ 찬미 예수님!

 


 

 

답변:

 

1. 들어가면서

우선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부활 제7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1,15-17.20ㄱ.20ㄷ-26 입니다.

 

그리고,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발췌하신 사도행전 1,15-17에만 국한할 경우에는,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2.

2-1. 그리고 다음은 "새 번역 성경" 사도행전 1,15-26 전문입니다:

 

출처: http://bible.cbck.or.kr/bible_read.asp?p_code=&GS=S&Bible=51&Jang=1&x=16&y=15

(발췌 시작)

마티아를 사도로 뽑다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18 그런데 그자는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
19 이 일이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알려져, 그 밭이 그들의 지방 말로 ‘하켈 드마’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피밭’이라는 뜻입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2-2. 그리고 사도행전 1,16의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 은 시편의 어떤 특정 부분을 말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의 저자가 다윗(David)이라고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3.

3-1. 그런데 위의 발췌문의 구조를 잘 들여다보면, 사도행전 1,17-19에서, 청중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유다에 대한 부연 설명이 성 베드로에 의하여 말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사도행전 1,20에서, 시편에서 발췌된  다음의 두 절들이 한 개의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성 베드로에 의하여 청중들에게 말해지고 있습니다:  

 

(i)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는 시편 69,26에서 발췌된 것이고, 그리고

(ii)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시편 109,8에서 발췌된 것입니다.

 

출처: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나해-I 부활 제7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1,15-17.20ㄱ.20ㄷ-26)의 제20ㄱ절 및 제20ㄷ절에 대한 해설.

 

3-2. 따라서, 사도행전 1,25에서의 언급을 또한 고려할 때에, 제16절에서 말하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 은 시편 69,26 시편 109,8 둘 다를 말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바는,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7-407년)의 사도행젼 1,16에 대한 해설에서도 또한 언급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sites.google.com/site/aquinasstudybible/home/
acts-of-the-apostles/st-john-chrysostom-on-acts

(발췌 시작)
Furthermore, before he declares where David had spoken, he relates what had been the case with Judas, that from the things present he may fetch assurance of the things future, and show that this man had already received his due.

 

더구나, 다윗이 이미 말하였던 장소를 그가 선포하기 전에, 그는 유다와, 현재의 일들로부터 그가 미래의 일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올 수도 있는 바를 관련시키며, 그리하여 바로 이 사람이 자신의 몫을 이미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4.

4-1. 질문 2: 그렇다면,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배반자 유다는 어떤 인물이었는지요?

 

4-2. (질문 2에 대한 답변)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Judas Iscariot" 에 대한 설명입니다. 질문 2에 대한 좋은 답변이라 생각되어 전달해드립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j/j080.htm

(발췌시작)

JUDAS ISCARIOT

 

Son of Simon, the only Apostle who did not come from Galilee. His special interest was money, so he was in charge of the common fund of the Apostles (John 13:29). It was an unfortunate assignment, according to John. He referred to Judas as “a thief … who used to help himself to the contributions” (John 12:6). Moreover, Judas remonstrated sharply with Jesus for allowing Mary Magdalene to anoint his feet with a costly ointment, arguing that the money should have gone to the poor (John 12:1-8). His inordinate greed motivated him to betray Jesus. He knew that the high priest, Caiaphas, was anxious to arrest the Master, so he made a deal with the chief priests to identify Jesus at an opportune time for thirty pieces of silver (Matthew 26:14-16). The Apostles were startled at the Last Supper when Jesus said, “I tell you most solemnly, one of you will betray me” (John 13:21). Judas lived up to the terms of his agreement with Caiaphas by leading a number of armed men into Gethsemane and kissing Jesus as a symbol of identification, whereupon they arrested Jesus (Matthew 26:47-56). Scripture reports that when Judas learned that Jesus had been condemned to die, he was filled with remorse (Matthew 27:3-5). There is no way of knowing his motives. He returned the silver, protested that Jesus was innocent, and, when his protest was ignored, went out and hanged himself. The Gospel writers made no attempt to explore Judas’ betrayal. They simply said that Satan had entered into him and they all referred to him as the betrayer (Luke 22:3). His place in the Apostles was taken by Matthias (Acts 1:26). (Etym. Greek ioudas from Hebrew yehudhah, let him [God] be praised. Greek iskari?t?s.)

 

유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

 

갈릴래아(Galilee) 줄신이 아니었던 유일한 사도인, 시몬(Simon)의 아들을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흥미는 돈(money)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사도들의 돈주머니(the common fund)에 대한 책임에 있었습니다(요한 복음서 13,29). 사도 요한(John)에 따르면, 그것은 한 개의 불운한 할당된 일이었습니다. 그는 유다(Judas)에 대하여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던 ... 도둑" (요한 복음서 12,6)으로서 언급하였습니다. 더욱이, 유다는,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e)가 예수님의 발들에 값비싼 향유를 바르는 것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심에 대하여, 그 돈은 가난한 이들에게 반드시 나누어 주어졌어야 한다고 논쟁함으로써(요한 복음서 12,1-8), 예수님께 날카롭게 항변하였습니다(remonstrated). 그의 과도(過度)한 탐욕(inordinate greed)이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그를 자극하였습니다(motivated). 그는 대사제인 카야파(Caiaphas)가 [자신의] 스승님을 체포하고자 열망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그는 은돈 서른 닢과 교환으로(for) 어떤 알맞은 시기에 예수님을 식별하는 거래를 이 대사제와 맺었습니다(마태오 복음서 26,14-16). 사도들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요한 복음서 13,21) 라고 말씀하셨을 떄에 짬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무장한 사람들 다수를 겟세마니(Gethsemane)로 인도함으로써 그리고 식별(identification)의 한 상징으로서 예수님께 입맞춤을 함으로써, 카야파와 자신의 합의의 조건들에 따라 행동을 하였는데(lived up to), 그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26,47-56).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들 받으셨음을 유다가 알았을(learned) 때에, 그는 뉘우침(remorse)으로 채워졌다고 성경 본문은 보고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27,3-5). 그의 [뉘우침의] 동기(his motives)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은돈을 되돌려주었고, 예수님이 결백하다(innocent)고 항의하였으며, 그리고, 자신의 항의가 무시되었을 때에, 밖으로 나갔고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유다의 배신을 탐구하고자(explore) 하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탄(Satan)이 그자 안쪽으로 들어갔다고 단지 말하였으며 그리고 그들 모두는 그자에 대하여 배반자로서 언급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서 22,3). 사도들에 있어 그의 자리는 마티아(Matthias)에 의하여 채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26). [어원. Greek ioudas from Hebrew yehudhah, let him [God] be praised. Greek iskar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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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피조믈인 사람들의 사랑(love)에는 크게, (i)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인 애덕(charity, caritas), (ii) 애덕이 아닌 사랑(love), 즉,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y, cupiditas),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며, 두 번째 사랑은 "모든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의 뿌리" (1티모테오 6,10(#); 1요한 2,15) 라고 불린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들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3.htm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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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원문 및 영어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84, a1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악(evil)"은, 소위 말하는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를 말하므로, 여기에서의 표현과 아래의 해당 표현을 오늘 날짜로 바로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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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 번역자 주: 
(1)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의 한 명이었던 시몬의 아들인 유다 이스카리옷의 경우에, 비록 그자의 이 후회에 대한 동기들은 성경의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 인물의 평소의 행실들로부터 인지되는 그자의 의지의 성향(disposition, 기울어짐)은, 그가 애덕(charity, caritas)이 아닌 사랑(love), 즉,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y, cupiditas)을 자신의 의지(will)의 동의와 함께 받아들여 이미 실천해 왔던 자임을, 이 사전의 설명에서처럼, 우리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2) 유다가 그러한 자였기에,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가 있던"(루카 복음서 4,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38항) 악마(사탄)가, 기다리고 있었던 그 기회가 다시 자신에게 왔다는 판단과 함께, 그자에게 들어갔던 것이다(루카 복음서 22,2-3). [달리 말하여, 애덕(charity, caritas)이 아닌 사랑(love), 즉, 세상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upidity, cupiditas)을 자신들의 의지(will)의 동의와 함께 받아들여 실천하는 자들 중에만 오로지 악마가 들어가는 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may).]

 

(3) 이에 대하여서는 추가적으로, 예를 들어, 다음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럭에 있어, 매년 주님 수난 성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요한 12,1-11)의 제4-6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palm_mon.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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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5.

5-1. 질문 3: 그런데, 이들 시편의 절들이, "새 번역 성경"의 구약의 번역 대본인, 기원후 9세기 경에 갈릴래아 호수의 서쪽 해변에 위치한 티베리아스에서, 소위 말하는, 마소라 학파에 의하여 유다교 용도로 편집되어 마련된마소라본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에서 발췌된 것일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화자인 성 베드로(St. Peter)가 살았던 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와 이어지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소라본 히브리어 성경은, 기원 후 9세기 경에 유다교 용도로 편집되어 마련됨으로써,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의 사도행전 1,20에서 발췌돠어 인용되고 있는 시편 69,26에서의 주어는 단수이나, 그러나 다음에 발췌한 "새 번역 성경"의 시편 69,26에서의 문장의 주어는 분명히 복수입니다:

 

(발췌 시작)

그들이 사는 곳은 황폐해지고

그들의 천막에는 사는 이가 없게 하소서.

(이상, 발췌 시작)

 

5-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어 사도행전 1,20에서 인용되고 있는 시편 69,26의 주어가 단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biblehub.com/text/acts/1-20.htm

 

5-3. 따라서, 마소라본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69,26에서 주어가 복수인 것과 관련하여, 자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칠십인 역 그리스어 구약 성경(LXX) 시편 69,26를 성 베드로가 인용하면서, 이 절이 특정 장소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에, 복수인 주어를 단수로 바꾸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는, 위의 제3-2항에 발췌해 드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7-407년)사도행전 1,16에 대한 해설을 따르고 있으며, 그리고 또한, 다음에 발췌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사도행전 1,20에 대한 해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출처: https://sites.google.com/site/aquinasstudybible/home/
acts-of-the-apostles/st-john-chrysostom-on-acts

(발췌 시작)
Psalm 69:25: this is said of the field and the dwelling: And his bishopric let another take; that is, his office, his priesthood. So that this, he says, is not my counsel, but His who has foretold these things. For, that he may not seem to be undertaking a great thing, and just such as Christ had done, he adduces the Prophet as a witness. “Wherefore it behooves of these men which have companied with us all the time.”

 

사도행전 1,20: 시편 69,25(26): 이 절은 그 밭 그리고 그 거처에 대하여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에 대한 우리말 번역 끝).

 

5-4. 다음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시편 69,26에 대한 해설 전문입니다. 사도행전 1,20을 또한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시편 69,26에서 말하고 있는 장소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던 당시의 예루살렘이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fathers/1801069.htm

(발췌 시작)

26. "Let the habitation of them become forsaken" Acts 1:20 Psalm 68:26. This is now evident. For in the same manner as He has mentioned not only a secret deliverance of His, saying, "Give heed to My soul, and redeem her;" but also one open after the body, adding, "because of mine enemies deliver me:" so also to these men He foretells how there are to be certain secret misfortunes, whereof a little before He was speaking....For the blindness of the Jews was secret vengeance: but the open was what? "Let their habitation become forsaken, and in their tabernacles let there not be any one to inhabit." There has come to pass this thing in the very city Jerusalem, wherein they thought themselves mighty in crying against the Son of God, "Crucify, Crucify;" John 19:6 and in prevailing because they were able to kill Him that raised dead men. How mighty to themselves, how great, they seemed! There followed afterwards the vengeance of the Lord, stormed was the city, utterly conquered the Jews, slain were I know not how many thousands of men. No one of the Jews is permitted to come there now: where they were able to cry against the Lord, there by the Lord they are not permitted to dwell. They have lost the place of their fury: and O that even now they would know the place of their rest! What profit to them was Caiaphas in saying, "If we shall have let go this man thus, there will come the Romans, and take away from us both place and kingdom?" John 11:48 Behold, both they did not let Him go alive, and He lives: and there have come the Romans, and have taken from them both place and kingdom. But now we heard, when the Gospel was being read, Jerusalem, "Jerusalem, how often would I have gathered together your sons, as a hen her chickens under her wings, and you would not? Behold there is left to you your house forsaken." Matthew 23:37-38 ...

(이상, 발췌 끝)

 

5-5. 그리고 다음의 자료에 의하면, 가경자 성 베다(St. Bede, 672-735년)도 또한 위의 제5-3항에 발췌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 347-407년)사도행전 1,20에 대한 해설 그리고 위의 제5-4항에 발췌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시편 69,26에 대한 해설을 따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 https://sites.google.com/site/aquinasstudybible/home/acts-of-the-apostles/acts-1

(발췌 시작)

1:20 This is a quotation of Psalms 69:25. Indeed these verses are clear and plainly set forth by the blessed Peter's interpretation. On the one hand Judas received a deserved penalty for his double-dealing, on the otherhand, by St. Matthias's acceptance of the place of Judas's ministry and apostolate, the most sacred fullness of apostolic perfection was restored. (St. Bede)

 

사도행전 1,20: 이것은 시편 69,25(26)의 발췌입니다. 정말로 이들 절들은 분명하며 그리고 복된 베드로의 해석(the blessed Peter's interpretation)에 의하여 몀백하게(plainly) 설명됩니다.(*) 한 편으로 유다는 자신의 표리부동(double-dealing)에 대한 응당한 처벌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유다의 사역 및 사도로서의 직무의 자리에 대한 성 마티아의 수락에 의하여, 사도의 완미(apostlic perfection)의 가장 성스러운 충만함은 회복되었습니다 [성 베다(St. Bede)].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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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성 베드로(St, Peter)의 이 해석은, 그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 의하여 교화되어 구약 성경 본문에 대한 더 충만한 이해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 당시에 열두 사도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내렸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 지적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26항(복음서들의 형성과정)제2단계[구전(口傳), the oral tradition]을 참조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c126.htm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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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출처 2: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저서명: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Old Testament, VIII, Psalms 50-150,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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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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