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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들을 기억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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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의 순교자들(1) - 다시 그들을 기억하며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 금년은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1년)에 일어난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로, 조선시대 천주교의 4대 박해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박해는 1801년 1월 10일(음력) 대왕
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12월 22일(음력)에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신유박해는 초기 한국교회나 당시 조선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박해의 의의와 영향을 간추려보면 첫째, 이전에 있었던 지역적, 부분적인 박해와는 달리 최초의 전국적이며 본격
적인 박해로서 조선시대의 사목을 위해 어렵게 입국한 첫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초대 교회 지도자들 대부
분이 순교하거나 유배당하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이후 두 번째 사제가 입국할 때까지 33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버
려지고, 지도자마저 사라져 지리멸렬한 상태로 빈사상태에 이르는 타격을 받았다.
둘째, 천주교를 사악한 무리로 규정하는 반교문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언제든지 박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 고 신자처벌의 선례를 남겨 신앙의 자유를 박탈됐다. 그리고 천주교를 또 반국가적 종교로 인식하여 배척하면서 천
주교와 함께 서학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서양의 발달된 과학문명까지 배척하여 조선의 과학기술이 낙후되고, 근대
화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이 박해를 계기로 세도정권 수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으로 정권을 잡은 정수왕후 김씨는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체제공 일파를 제거하고, 또 남인 공서파를 이
용하여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과 노론의 시파를 물리치고 세도정권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넷째, 이 박해가 초대교회에 참혹한 타격을 주었지만 오히려 이후 교회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신 자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천주교가 오히려 전
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신유박해를 거치며 교회의 지도층이 양반 선비층에서 서민계층으로 그 중심으로 옮겨져 만중신앙으로 자리 잡고 깊이 뿌리 내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이하여 이 뜻깊은 박해 전후기에 순교한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려는 것은 단순히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위대한 증거자
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야할 또 다른 까닭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박해시기를 교회 창설 때인 1784년부터 교구가 설정되던 1831년까지를 초기박해기로, 교구설정 이후부 터 신교의 자유가 묵인되던 1882년까지를 후기 박해기로 나누어보면 초기와 후기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초
기 박해기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노력에 의해 교회가 창설되고 유지, 발전하던 평신도의 교회로 주님의 은
총속에 성직자의 종교 교육 없이 평신도가 스스로 교리를 체득하며, 신앙을 토착화했던 교회로 성령이 직접 인도하
신 교회라 한다면, 후기 박해기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교황청의 허가로 조선선교를 맡아 입국하여 성
직자 중심의 교회로 되면서, 교회문화가 서구화되고, 선교사의 사목적 특성에 종속화 되어 역동하던 평신도의 토착화
한 영성이 침잠해가는 교회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초기 박해기에 해당하는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은 서양선교사
들의 사목적 정책이나 사상적 영향을 덜 받은 순수한 한국인의 영성을 지닌 순교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살펴보며 생각하려는 것은 그들을 통해 그들을 총해 초기 교회의 토착화한 신앙과 그
열절한 한국인의 영성을 살펴봄으로써 새천년을 맞고 있는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청되는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열
정과,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새로운 방법과 한국인의 사고와 정서에도 거부감 없는 복음의 새로운 표현
을 찾아보고자 함에 소중한 뜻을 둔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살아 있는 그래서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함께하는 순교성인 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데 의의를 두려한다.
우리는 지금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노력으로 소중한 한국순교성인 위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순교성인의 탄생에는 시복시성의 복잡하고 엄격한 교회법 절차에 치중한 나머지 그 성인들 가운데 몇몇 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인들에 대해서는 사랑과 존경을 느끼지 못한 체 모셔지기만 하여 마치 관제성인을 모시는 것 같은 처지가 된 현실
을 깊이 성찰해야 하겠다.
이제 바뀐 교회법에 따라 각 교구에서 추진되고 있는 시복시성운동에 즈음해, 먼저 그 대상자들에 대한 다양하고 적 절한 소개로 우리 마음에 새겨 사랑할 수 있는 성인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기획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빈다. <가톨릭신문, 2239호,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