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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1일(6월3일) 성 요한23세 교황, 제2차 바티칸공의회♬시편15(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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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10-11 ㅣ No.1416

  

축일: 10월11일(6월3일)

성 요한 23세 교황, OFS

San Giovanni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

Sotto il Monte, Bergamo, 25 novembre 1881 - Roma, 3 giugno 1963
(Papa dal 04/11/1958 al 03/06/1963).

È stato beatificato il 3 settembre del 2000.

Canonized : 27 April 2014 by Pope Francesco at Saint Peter’s Square, Rome 

 

Pope JOHN XXIII (재위 : 1958.10.28∼1963.6.3).

1881 at Sotto il Monte, Italy - 3 June 1963 at Rome, Italy

Beatified: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Canonized : 27 April 2014 by Pope Francesco at Saint Peter’s Square, Rome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에서 12km 떨어진 소토 일몬테(Sotto il Monte)에서 가난한 농부인 조반니(Giovanni Roncalli)의 13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요한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제상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는 베르가모 신학교에서 2년 간 교육을 받고, 로마(Roma)의 성 아폴리나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중, 1902년 10월 영성 지도자인 구속주회의 피토키(Francesco Pitocchi) 신부를 만나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Dio tutto, io sono nulla)라는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04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다음해에 베르가모의 테데스키(G.R. Tedeschi)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어 1914년 주교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신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연구 작업은 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가 된 라티(A.D.A. Ratti) 추기경과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끝난 후 1921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는 그를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이탈리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어 1925년 아레오폴리스(Areopolis)의 명목상의 대주교 및 1935년 불가리아의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불가리아 · 그리스의 교황 사절, 파리주재 교황청 대사(1944∼1953년)를 거쳐 1953년 1월 12일에는 사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1958년 10월 비오 12세(Pius XII)에 이어 77세의 고령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한 그는 11월 4일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우선 교황이 된 후 처음으로 개최한 추기경 회의에서 추기경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는, 식스투스 5세(Sixtus V)부터 내려오던 규정을 폐지하였다. 1958년 12월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였는데, 그 중에는 밀라노(Milano) 교구장으로 후에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가 되는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까지 그가 임명한 추기경은 모두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1월 25일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로마 교구 시노드 개최, 공의회 개최, 교회법전 개정 등 세 가지 계획을 선언하였다. 로마 교구 시노드는 1960년 1월 24-31일까지 라테란 대성전에서 개최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는 교황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펼쳤다.
 

   그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테 총대주교 막시모스(Maximos) 4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경본과 시간전례서(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예식 규정을 인가하고(1960년), 미사 통상문의 성찬 기도에 성 요셉(Josephus)의 이름을 삽입하였으며(1962년), 교회법전 개정을 위한 교황청 위원회를 구성한(1963년) 일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60년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개설,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가톨릭 인사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되는 등 일련의 쇄신이 이어졌다.
 

   1963년 5월 22일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강복을 준 교황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6월 3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5년도 채 안된 재임 기간 동안 요한 23세 교황은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톨릭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좋으신 교황’(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는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 소송이 시작되어, 2000년 9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홈에서 )

*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축일 10월22일

 


Joannes 23세(1881∼1963). 교황(재위 : 1958. 10. 28∼1963. 6. 3).

원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1881년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의 소토 일 모테(Sotto il Monte)에서 출생하여 1904년 사제서품되고, 라디니 테데스키(Giacomo Radini Tedeschi) 백작이 베르가모의 주교로 임명된 동안(1905~1914) 그의 비서 겸 신학교수로 근무하였다.

  뒷날 비오 11세가 된 아킬레라티와 친분을 맺었고, 1차 세계대전 후 교황청에서 행정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1925년 아레오폴리스(Areopolis)의 명목상의 대주교 및 1935년 불가리아의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불가리아 · 그리스의 교황 사절, 파리주재 교황청 대사(1944∼1953년)를 거쳐 1953년에는 사제추기경으로 임명, 1958년 비오 12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최초의 업적은 23명의 새 추기경을 탄생시킨 일(1958. 12)인데, 1962년까지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추기경들에게 세 가지 과제를 제출, 로마를 위한 교구 시노드와 일치공의회를 개최하고 교회법전의 개정 등을 제안하였고, 1960년의 시노드는 로마의 지방문제를 토의하였다.

 

 1962년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의 재위기간 중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펼쳤다.

 

  이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테 총대주교 막시모스(Maximos) 4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경본과 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전례법규를 인가(1960년), 미사법전에 성 요셉(St. Joseph)의 이름을 삽입하였으며, 교회법 개정을 위한 교황위원회를 구성(1963년)한 일 등을 들 수 있겠다. 또한 1960년 교회일치 진흥을 위한 사무국의 개설,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가톨릭 인사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되는 등 일련의 쇄신이 이어졌다. 한편, 15세기에 요한 23세라는 대립 교황(재위 : 1410∼1415)이 있었는데, 1947년 교황표에서 공식 말소된 바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바티칸공의회公議會  

Concilium Vaticanum. Councils of Vatican

 

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20차 공의회)

교황 비오(Pius) 9세에 의해 바티칸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

 

㉮ 트리엔트 공의회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개최된 이후 거의 300년 동안 교회회의가 소집되지 않았었다.

그 동안 일반사회 내에서는 합리주의, 자유주의, 유물주의 등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어 하느님 계시의 가능성에 대한 교리의 거부, 하느님의 실재 거부, 영혼성의 실재 거부 등 반교회적 요소들에 대한 대처와 이에 따른 교회법의 개혁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1864넌 12월 예부성성(禮部聖省) 추기경회의에서 공의회 개최에 대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의회에서 취급되어야 할 안건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뒤 1867년 6월 공의회 개최에 대한 공식발표를 함과 아울러 준비위원회로는 중앙위원회 산하 교의. 교회규율. 수도회. 포교 등 그 부속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868년 6월 비오 9세의 칙서 의 발표로 바티칸 공의회가 1869년 12월 8일 개최되는 것이 공식화되었다. 

 

㉯ 1870년 로마가 함락되어 무기한 휴회될 때까지 모두 4차 회기로 진행된 공의회에서는 많은 의제들이 논의되었지만,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부터, 또 공의회 회기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에 대한 것이었다.

14번의 총회와 64번의 연설에 걸친 토론 끝에,결국 1870년 7월 18일 공개회의 투표에서 통과되어 교황은 정의를 발표하고 교령들의 비준을 선포하였다. 이 때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내용은 한 교령 중의 하나의 장(章)으로 채택되어 통과되었다.

 

이로써 공의회 우위설과 교황권 제한주의에 대해서는 종지부를 찍은 셈이나 교황 무류성에 대한 문제와 세계 공의회가 교리적 정의를 마련하기 위한 근거에서 볼 때 한낱 교황의 자문기관이냐 하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 제4차 회기가 끝난 뒤 교황에 대한 주교들의 관계 등 다른 의제들에 대한 결정이 유보된 채 이탈리아 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해 교황은 단 한 평의 교황령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유명무실해진 공의회를 해산시킬 적당한 이유를 마련해 줌에 따라 1870년 10월 비오 9세는 바티칸 공의회의 정회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신앙과 계시의 속성(屬性)에 대한 헌장과 이성과 신앙 및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에 대한 헌장들을 반포했을 뿐 그 밖의 문제들은 유보되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부정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독립된 종교단체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로써 구가톨릭 교회가 탄생될 수 있었다. 

 

②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0.-1965.12)(21차공의회)

요한(Joannes) 23세에 의하여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

 

㉮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등에 관한 헌장을 반포하고 이탈리아왕 빅토르 엠마누엘 2세의 로마 점령에 의하여 무기한 휴회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의 100년 동안 세계공의회는 열리지 않고, 다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가 대처하기 위하여 레오(Leo) 13세, 성 비오(St. Pius) 10세, 비오 11, 12세들의 회칙들만이 반포되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 요한 23세는 1958년 말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과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공의회 개최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1959년부터 준비토록 하여 1962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니, 결국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별적으로 변화된 교회의 모습을 통합시켜 새롭고 진보적인 가톨릭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 그 기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 1960년 6월 5일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를 위한 중앙예비위원회 및 부속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하여 자신이 중앙예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2년 7월에는 교황회칙 <회개하기 위하여>(Paenitentiam agere)를 반포하여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회개하여 쇄신될 것을 촉구하였고, 이 ’회개와 쇄신’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기본정신이 되었다.  

  전체 4차 회의로 진행된 공의회는 회의 전 13개 예비위원회에서 67개의 논의사항을 준비토록 하였으나 실제 회기 동안에는 10개의 위원회와 한 개의 사무국이 활동하였다. 최종적인 헌장 초안을 마련하는 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24명으로서 15명은 선출되고 나머지 9명은 교황이 임명토록 하여 전체적인 회의가 진행되도록 하였다. 

  그 밖에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하여 초대된 각 교파의 성직자들이 입회인으로 참석하였고, 이들은 또한 요한 23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일치사무국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졌다.

  

㉰ 제 1차 회기가 시작되면서 토의되기 시작한 주제들은 전례, 계시, 그리스도교의 일치, 교회의 본질,매스 미디어로서 이들 중 전례와 매스 미디어에 관해서는 2차 회기 때 헌장과 교령이 각각 반포되었다.

 그러나 1차 회기가 끝나갈 때, 즉 1963년 6월 3일 교황 요한 23세는 사망하고, 밀라노의 지오반니 몬티니 추기경이 바오로(Paulus)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새로운 교황 바오로 6세는 중단되었던 공의회가 계속될 것임을 발표하고, 9월 29일 속개토록 하였다. 제3차 회기 때 논의된 주제로는 교회, 신성한 계시, 주교들의 사목적 임무, 평신도 사도직,

그리스도교 일치, 종교적 자유,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주제들은 제4차 회기 때까지 계속되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공식회기가 끝날 때에는 모두 16개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즉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계시헌장>(Dei Verbum), <현대세계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등 4개 헌장과,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동방교회에 관한 교령>(Orientalium Ecclesiarum),<주교들의 교회사목직에 관한 교령>(Christus Dominus),<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Perfectae caritatis),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평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Presbyterorum Ordinis) 등 9개 교령과,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등 3개 선언이 그것이다. 

 

결국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한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였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대사전에서-

 

   복자 요한23세교황의 유해-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 참고

그는 14세 때 3회원이 되었다(14세는 당시 3회원 입회를 위한 최소한의 연령이었다).

1959년4월4일 프란치스꼬회 창설 750주년을 맞아 프란치스칸 가족 4명의 총장들이

라테란 바실리카(Lateran Basilica)에 왔을 때 교황은 스스로 자신을 "요셉 형제"라 불렀다.

-김용철,재속프란치스꼬회회칙 비교연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석사논문1996,109쪽.
 

  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까지 100여년 동안 7명의 역대 교황 모두가 계속해서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었다는데 놀라움이 있다.
1) 복자 비오 9세(1846-1878)축일2월7일, 2)레오 13세(1878-1903), 3)성 비오 10세(1903-1914)축일8월21일, 4) 베네딕또 15세(1914-1922), 5) 비오 11세(1922-1939),  6)가경자 비오 12세(1939-1958)10월9일, 7) 복자 요한 23세(1958-1963) 축일10월11일(6월3일), 8)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1963-1978)축일 8월6일
- 김용철OFM.,재속프란치스꼬회 회칙 비교 연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96,108-109쪽 주석 205번에서

 

 
▲ 요한 23세 교황(왼쪽)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두 교황이 동시에 성인 반열에
요한 23세- 가톨릭 변화 이끈 거룩한 인물, 요한 바오로 2세- 27년 재임 전세계 사랑 받아

【외신종합】 복자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교황은 선종 후 6년 만에 교황 전구를 통한 치유기적이 확인되면서 2011년 시복됐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7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번째 치유기적을 승인하면서 시성을 확정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나 1946년 사제품을 받았다. 1958년 폴란드 최연소 주교가 됐으며 1963년 크라쿠프 대주교에 임명됐고 1967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1978년 426년 만에 처음으로 비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에 선출된 그는 27년간 교황으로 재임하면서 평화의 사도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복자 요한 23세(1881~1963) 교황 역시 교황 전구로 병이 치유됐다는 한 이탈리아 수녀의 치유기적을 인정 받아 2000년 시복됐다. 복자가 성인이 되려면 시복 이후에도 기적이 있어야 하는데, 요한 23세 교황은 두 번째 기적 없이 이례적으로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됐다. 교황청 시성성은 요한 23세 교황이 기적심사 없이도 시성될 수 있는 거룩한 인물임을 주장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성을 요청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번째 기적을 승인하면서 같은 날 요한 23세 교황의 시성도 확정, 역대 두 교황을 동시에 성인 반열에 올리는 역사를 세웠다.

 요한 23세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4년 사제품을 받았고 1921년부터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53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그는 1958년 77세 나이로 교황에 선출됐다. 나이가 많아 과도기 교황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가톨릭교회 변혁을 이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소집을 발표했고, 1962년 10월 공의회 개막을 주재했다. 그러나 공의회 개막 이듬해 선종했다.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교황으로, '착한 교황'으로 불린다. 
                                                                             평화신문 2013. 10. 06발행 [1234호]


 
 
복자 요한 23세ㆍ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내년 4월 27일 시성    

【외신종합】 복자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14년 4월 27일 성인 반열에 오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30일 두 복자 교황의 시성 관련 추기경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두 교황의 시성 날짜를 발표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두 교황의 약력을 소개하며 "두 교황은 격동의 시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팎으로 큰 영향을 미치면서 복음에 투신하고 교회와 세상에 희망과 빛의 모범이 됐다"고 설명했다.

 원래 프란치스코 교황이 염두에 둔 시성식 날짜는 올해 12월 8일이다. 교황은 지난 7월 브라질 세계청년대회를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기자단에게 "두 교황 시성은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며, 12월 중에 시성식을 할 계획"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시성식 날짜는 내년 봄으로 결정됐다. 겨울에 시성식을 거행할 경우 날씨가 추운 데다, 혹여 눈이라도 내리면 두 교황 시성식에 참례하러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또 2014년 4월 27일은 부활 제2주일인 하느님 자비 주일이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 자비의 사도 파우스티나 성녀 시성식을 집전하면서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선포한 바 있다. 평소 하느님 자비를 강조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날 시성되는 것은 더 의미가 깊다.  
                                                                             평화신문 2013. 10. 06발행 [1234호]

 

  

 ◆ 시성 ◆         
한자  諡聖  라틴어  canonizatio  영어  canonization
 [관련단어] 성인  시복   

출처 : [가톨릭대사전]  

 
   로마 가톨릭 교회 교황이 이미 시복(諡福)된 복자를 성인의 명우에 올리고 전세계 교회로 하여금 그를 공경할 수 있도록 하는 선언을 말한다.

   교회역사 초기에 신자들의 공경을 받았던 인물은 주로 순교자로서 이들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영생(永生)을 얻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되었으며 그리스도와 지상의 교회를 중계한다고 생각하였다. 313년 종교자유칙령으로 박해가 종결되면서 신자들의 이러한 신앙은 신앙의 증거자(confessores fidei), 교리의 탁월한 수호자(교회 박사), 사도적 열성과 자선 및 복음정신이 뛰어난 자, 참회와 엄격성으로 신자로서 모범적 삶을 영위한 자 등으로 확대되었다. 6~10세기에 성인으로 숭배되는 자가 크게 늘어나자 처음에는 지방주교가, 후에는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이를 인가하는 관습이 생겼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로 교황이 인가한 성인은 성 우달리코(St. Udalicus)였으며(973년), 차츰 시성에 관한 절차법이 갖추어졌다. 그레고리오(Gregorius) 9세는 1234년에 합법적 조사방식을 책정하였으며 식스토(Sixtus) 5세는 1588년 역사와 교의상의 발전을 에서 공식화 하여 시성을 위한 교황청 업무를 유기적으로 분할하였고, 특히 이를 전담할 예부성성(禮部聖省)을 설립하였다. 우르바노(Urbanus) 8세는 1642년 을 발행하여 재위기간 중에 발표된, 시성에 관한 모든 법령과 해석을 실었으며 18세기 베네딕토(Benedictus) 14세는 를 발표하여 예부성성의 경험들을 집대성하였다. 현재는 시성시복 성성에서 이를 담당하고 있다.

   시성은 이미 시복되어진 복자(福者)에 한해서 행해진다. 시복에 이어 그 복자의 전구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보고되면 심사는 재개되고 시복과정이 시성을 위해 반복된다. 시성이 결정되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엄숙한 시성식이 열리고 교황은 시성선언을 통해 그 대상자가 영원한 광명 속에 있으며 세계 교회는 그에게 성인에게 합당한 공적 공경을 바칠 것을 명하게 된다.

   성인은 복자와는 달리 전세계 교회에 의해 공경되며, 그에게 바치는 공적 공경이란 미사 경본과 사제의 성무일도에 기도문이 삽입되고 전례력에 축일이 도입되며 성체행렬에서 그 유해를 공경하는 일 등을 말한다. 성인은 하느님께 지상의 신자들을 위해 전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완전성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시성된다. 또한 시성은 교황만이 할 수 있는 무류성을 가진 행위다. 한국 교회에서는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념하여 사목 방문차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복자 103위가 시성되었는데 이 시성수속에서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고 아비뇽 교황 시대를 제외하면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 밖에서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 성인, 시복 

 

update 2014.4.30.

 

♬시편15(16)편

 

 

 

 

 

 

 

 

 

 

 

 

 

 

 

 

 

 

 

 

 

 

 

 

 

 

 

 

 

 

 

 

San Giovanni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

3 giugno (11 ottobre) 
 

 Sotto il Monte, Bergamo, 25 novembre 1881 - Roma, 3 giugno 1963

 

(Papa dal 04/11/1958 al 03/06/1963).
 Angelo Roncalli nacque a Sotto il Monte, piccolo borgo del bergamasco, il 25 novembre 1881, figlio di poveri mezzadri. Divenuto prete, rimase per quindici anni a Bergamo, come segretario del vescovo e insegnante al seminario. A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fu chiamato alle armi come cappellano militare. Inviato in Bulgaria e in Turchia come visitatore apostolico, nel 1944 è Nunzio a Parigi, per divenire poi nel 1953 Patriarca di Venezia. Il 28 ottobre 1958 salì al soglio pontificio, come successore di Pio XII, assumendo il nome di Papa Giovanni XXIII. Avviò il Concilio Vaticano II, un evento epocale nella storia della Chiesa. Morì il 3 giugno 1963. Un breve ma intenso pontificato, durato poco meno di cinque anni, in cui egli riuscì a farsi amare dal mondo intero. È stato beatificato il 3 settembre del 2000.

Martirologio Romano: A Roma, beato Giovanni XXIII, papa: uomo dotato di straordinaria umanità, con la sua vita, le sue opere e il suo sommo zelo pastorale cercò di effondere su tutti l’abbondanza della carità cristiana e di promuovere la fraterna unione tra i popoli; particolarmente attento all’efficacia della missione della Chiesa di Cristo in tutto il mondo, convocò il Concilio Ecumenico Vaticano II.

 

Ascolta da RadioRai:
      
 

 

Nell’aria c’era già l’odore dell’estate, ma il giorno era triste. Quel 3 giugno 1963 una luce si spegneva nel mondo: il “Papa buono” era morto. Calde lacrime solcavano il viso delle tante persone che appresero in quei momenti la notizia della sua scomparsa. Nel suo breve ma intenso pontificato, durato poco meno di cinque anni, Papa Giovanni era riuscito a farsi amare dal mondo intero, che adesso ne piangeva la perdita.
 Ma già subito dopo la sua morte incominciava il fervore della devozione popolare, che doveva avvolgere la sua figura di una precoce quanto indiscussa aureola di santità, e prendeva avvio il processo di beatificazione: un lavoro ciclopico, durato ben 34 anni, con l’avvicendarsi di diversi Postulatori e montagne di documenti da vagliare prima di pronunciarsi sulla sua eroicità. (…)Il 12 ottobre 1958 Angelo Roncalli era partito alla volta di Roma per partecipare insieme agli altri cardinali al conclave, ma non immaginava assolutamente di essere eletto Papa. Il suo desiderio era sempre stato quello di essere un pastore di anime, modesto e semplice come un parroco di campagna.
 Era nato a Sotto il Monte, piccolo borgo del bergamasco, il 25 novembre 1881, figlio di poveri mezzadri che lo battezzarono il giorno stesso della sua nascita nella locale Chiesa di S. Maria; la stessa dove, divenuto prete, avrebbe celebrato la sua prima Messa, il 15 agosto 1905, festa dell’Assunzione.
 Angelino era molto intelligente e terminò le scuole in un lampo, tanto che in seminario era il più giovane della sua classe. A 19 anni aveva completato i corsi, ma per la legge ecclesiastica non poteva essere ordinato sacerdote prima dei 24 anni, così fu mandato a Roma per laurearsi alla Gregoriana.
 Divenuto prete, rimase per quindici anni a Bergamo, come segretario del vescovo e insegnante al seminario. A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fu chiamato alle armi come cappellano militare. Nel 1921 Roncalli è a Roma e, successivamente, viene inviato in Bulgaria e in Turchia come visitatore apostolico: iniziava così la sua carriera diplomatica. Nominato Nunzio a Parigi nel 1944, diventa Patriarca di Venezia nel 1953.
 Un’esistenza piuttosto appartata, senza fatti eclatanti, fino all’elezione al soglio di Pietro. Aveva allora 77 anni ed aveva già fatto testamento. Intendeva essere sepolto a Venezia e si era fatto costruire la tomba, nella cripta di S. Marco. Era naturale che ritenesse ormai imminente il suo commiato dal mondo. L’anno prima, 1957, aveva scritto infatti nel suo diario: “O Signore, siamo a sera. Anni settantasei in corso. Grande dono del Padre celeste la vita. Tre quarti dei miei contemporanei sono passati all’altra riva. Dunque anch’io mi debbo tener preparato al grande momento…”. Ma le vie del Signore sono sovente imprevedibili. Il 28 ottobre 1958 l’allora cardinale e patriarca di Venezia salì al soglio pontificio, come successore di Pio XII, e molti ne restarono sorpresi. Un vecchio avrebbe dovuto reggere la Chiesa? I giornali presto ci ricamarono su perché veniva da una famiglia di contadini. “Il papa contadino”, cominciarono a chiamarlo. Ma Roncalli aveva ben chiara la propria missione da compiere.
“Vocabor Johannes…”. Mi chiamerò Giovanni, esordì appena eletto. Era il primo punto fermo del suo pontificato. Un nome che era già tutto un programma. E non si smentì.
 Nel 1959, un anno soltanto dopo la sua elezione, “tremando un poco di commozione, ma insieme con umile risolutezza di proposito”, come disse ai cardinali riuniti, annunciò il Concilio Vaticano II. Un evento epocale, destinato a cambiare il volto della Chiesa, a segnare un netto spartiacque nella storia della cristianità.
 (…) Fu il leit-motiv della sua vita e del suo pontificato. Dopo la S. Messa, nulla era per lui più importante del Rosario. Ogni giorno lo recitava per intero, meditando su ogni mistero. “Sono entusiasta – egli diceva - di questa devozione, soprattutto quando è capita ed appresa bene. Il vero Rosario è il cosiddetto Rosario meditato. Questo supplisce a molte altre forme di vita spirituale. È meditazione, supplicazione, canto ed insieme incantesimo delle anime. Quanta dolcezza e quanta forza in questa preghiera!”.
Mons. Loris Capovilla, suo segretario e fedele custode di memorie, ha detto che Papa Giovanni “durante tutta la sua esistenza si comportò con Maria di Nazareth come un figlio con la madre, uno di quei figli che un tempo davano del lei o del voi alla propria genitrice, manifestando amore dilatato dalla venerazione e rispetto alimentato dall’entusiasmo”.
Una venerazione tenera e forte, delicata e incrollabile, in cui possiamo vedere racchiuso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Durante il suo pontificato fu pubblicato su “L’Osservatore Romano” un suo “Piccolo saggio di devoti pensieri distribuiti per ogni decina del Rosario, con riferimento alla triplice accentuazione: mistero, riflessione ed intenzione”: in una scrittura limpida e chiara c’è il succo delle riflessioni che egli veniva maturando nella personale preghiera del S. Rosario. “Nell’atto che ripetiamo le Avemarie, quanto è bello contemplare il campo che germina, la messe che s’innalza…”, diceva con efficace metafora presa da quel mondo contadino a lui così familiare. “Ciascuno avverte nei singoli misteri l’opportuno e buon insegnamento per sé, in ordine alla propria santificazione e alle condizioni in cui vive”.
Papa Giovanni auspicava che il Rosario venisse recitato ogni sera in casa, nelle famiglie riunite, in ogni luogo della terra. Ma quanti oggi si radunano per fare questo? Il vento gelido della secolarizzazione ha finito per spazzare via questa antica consuetudine. Le case assomigliano oggi a isole di solitudine e incomunicabilità e se ci si riunisce è per celebrare i rituali del “caminetto” televisivo che mescola con la stessa indifferenza massacri etnici e telequiz, futilità e orrori.
 (…)Il suo paese natale da oltre un trentennio è meta incessante di pellegrinaggi. Lo si era immaginato come un papa di transizione, che sarebbe passato in fretta, presto dimenticato, ma non è stato così. Per un disegno provvidenziale di Dio la giovinezza della Chiesa si è realizzata attraverso l’opera di un vecchio. Fu veramente un dono inatteso del Cielo.
 Attento ai segni dei tempi, Papa Giovanni promosse l’ecumenismo e la pace. Uomo del dialogo e della viva carità, fece sentire a tutti gli uomini, anche ai non cattolici e ai lontani, l’amicizia di Dio. La sua spiritualità, delicata e robusta al tempo stesso, aveva, come abbiamo visto, le sue radici in Maria. A Lei sempre si rivolgeva, in Lei confidava. Non si staccava mai da Lei, né mai si macerava nel dubbio: la sua fede era limpida e sorgiva, riposava in Maria, attraverso il Rosario.
 Anche il miracolo, la guarigione “clinicamente inspiegabile” di una suora malata di cancro, grazie a cui è ora elevato alla gloria degli altari, si è realizzato nel segno di Maria. Suor Caterina Capitani, delle Figlie della Carità, era affetta da un tumore allo stomaco che l’aveva ridotta in fin di vita. Papa Giovanni era morto da soli tre anni e la suorina con le consorelle l’aveva pregato a lungo, con grande insistenza e fiducia. Quel giorno, era il 25 maggio 1966, il “Papa buono” le apparve e le disse di non temere, perché sarebbe stata guarita, aggiungendo: “Me l’avete strappato dal cuore questo miracolo”.
Prima di scomparire però le fece una grande raccomandazione: di pregare sempre il rosario. Era il suo chiodo fisso durante la vita, era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nell’alba eterna che non conosce tramonto.
 Il Martirologium Romanum pone la data di culto al 3 giugno, mentre le diocesi di Bergamo e Milano celebrano la memoria del Beato Giovanni XXIII per la Chiesa locale in data 11 ottobre, anniversario dell'apertura del Concilio Vaticano II avvenuta l'11 ottobre 1962.


Autore: Maria Di Lorenzo 

 

 


Spunti bibliografici su  Giovanni XXIII - Papa Giovanni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Andrea Riccardi, L'uomo dell'incontro, San Paolo Edizioni, 2014 - 256 pagine
•Marco Pappalardo, Mirella Mariani, Giovanni XXIII, Il Pozzo di Giacobbe, 2014 - 24 pagine
•Mosconi Anacleto, , Biblioteca Francescana Edizioni, 2014 - pagine
•Tradigo Alfredo, Nel nome di Giovanni, Mimep-Docete, 2014 - pagine
•Marco Roncalli, Papa Giovanni: il santo, San Paolo Edizioni, 2014 - 216 pagine
•Ezio Bolis, Solo un papa buono?, Paoline Edizioni, 2014 - 240 pagine
•Giovanni XXIII, Il Vangelo di papa Giovanni, Ancora, 2014 - 256 pagine
•Renzo Allegri, La storia di papa Giovanni, Ancora, 2014 - 368 pagine
•Roberto Rusconi, Papi santi, Morcelliana Edizioni, 2014 - 200 pagine
•Giovanni XXIII, Date una carezza ai vostri bambini, Garzanti Libri, 2014 - 437 pagine
•Giovanni XXIII, Il giornale dell'anima, San Paolo Edizioni, 2014 - 192 pagine
•Sandro G. Franchini, Roncalli padre e pastore, Marcianum Press, 2014 - 72 pagine
•Aa. Vv., Giovanni XXIII, Santo!, Il Seminatore, 2014 - pagine
•Lazzarin Piero, Giovanni XXIII, Edizioni Messaggero, 2013 - 112 pagine
•Giovanni XXIII, Paolo VI, Lettere di fede e amicizia (1925-1963), Studium, 2013 - 250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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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ggiunto il 2001-04-28

 

 

 

 

 

 

Pope JOHN XXIII

Memorial

11 October

Profile

Italian peasant. Educated at Bergamo and the Seminario Romano, Rome. Ordained in 1904. Secretary to the bishop of Bergamo from 1904 to 1914, during which he wrote the basis for his 5-volume biography of Saint Charles Borromeo. Served in World War I in the medical corps, and as a chaplain. Worked in Rome after the war, and reorganized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 Archbishop in 1925. Vatican diplomatic representative to Bulgaria, then Turkey, and Greece. Named papal nuncio to France in 1944 where he mediated between conservative and socially radical clergy. Cardinal and patriarch of Venice in 1953. Elected pope on 28 October 1958.

 

As pope, he stressed his own pastoral duties as well as those of other bishops and clergy. Promoted social reforms for workers, poor people, orphans, and the outcast. He advanced cooperation with other religions including Protestant, Greek Orthodox, Church of England, and even Shinto. In April 1959, he forbade Catholics to vote for parties supporting Communism. His encyclical Mater et Magistra of 14 July 1961 advocated social reform, assistance to underdeveloped countries, a living wage for all workers, and support for socialist measures that promised real benefit to society.

 

He nearly doubled the number of cardinals, making the college the largest in history. On 25 January 1959, he announced his intent to call a council to consider ways to renew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 promote diversity within the unity of the Church, and consider reforms promoted by ecumenical and liturgical movements. Convening the council, known as Vatican II, on 11 October 1962, was the high point of his reign.

 

His heartiness, his overflowing love for humanity individually and collectively, and his freshness of approach to ecclesiastical affairs made John one of the best-loved popes of modern times.

Born

1881 at Sotto il Monte, Italy as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l Ascension

28 October 1958

Papal Canonizations

1959: Saint Charles of Sezze

1959: Saint Joaquina de Vedruna de Mas

1960: Saint Gregory Barbarigo

1960: Saint John de Ribera

1961: Saint Bertilla Boscardin

1962: Saint Anthony Pucci

1962: Saint Francis Mary of Camporosso

1962: Saint Martin de Porres

1962: Saint Peter Julian Eymard

1963: Saint Vincent Pallotti

 

Died

3 June 1963 at Rome, Italy

Beatified

3 September 2000 by Pope John Paul II at Saint Peter’s Square, Rome

Canonized

pending

Patronage

papal delegates

Additional Infomation

L’Osservatore Romano

L’Osservatore Romano

Images

Gallery images of Pope John XIII

Writings

Last Will and Testament, 29 June 1954

Ad Petri Cathedram: On Truth, Unity and Peace, 29 June 1959

Sacerdotii Nostri Primordia: On Saint John Vianney, 1 August 1959

Grata Recordatio: On the Rosary, 26 September 1959

Meditation for the Feast of the Guardian Angels, 2 October 1959

Princeps Pastorum: Prince of the Shepherds, 28 November 1959

True Christian Peace, 23 December 1959

Counsels for Seminarians, 28 January 1960

One, Holy, Catholic, Apostolic, 13 November 1960

The Roman Synod And The Priest, 24 November 1960

Sanguis Christi: On Promoting Devotion to the Most Precious Blood of Our Lord Jesus Christ, 30 June 1960

Mater et Magistra: On Health and Apostolic Benediction, 15 May 1961

The Way of Peace, 10 September 1961

Aeterna Dei Sapientia: On Saint Leo the Great, 11 November 1961

Veterum Sapientia: On the Promotion of the Study of Latin, 22 February 1962

Paenitentiam Agere: On Penance, 1 July 1962

The Art Of Spiritual Direction, 9 September 1962

Address at the Opening of Vatican Council II, 11 October 1962

Pacem in Terris: Peace on Earth, 11 April 1963

Meditation for the Feast Saint Francis of Ass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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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Everyone remembers the image of Pope John’s smiling face and two outstretched arms embracing the whole world. How many people were won over by his simplicity of heart, combined with a broad experience of people and things! The breath of newness he brought certainly did not concern doctrine, but rather the way to explain it; his style of speaking and acting was new, as was his friendly approach to ordinary people and to the powerful of the world. It was in this spirit that he called the Second Vatican Ecumenical Council, thereby turning a new page in the Church’s history Christians heard themselves called to proclaim the Gospel with renewed courage and greater attentiveness to the "signs" of the times. The Council was a truly prophetic insight of this elderly Pontiff who, even amid many difficulties, opened a season of hope for Christians and for humanity. In the last moments of his earthly life, he entrusted his testament to the Church: "What counts the most in life is blessed Jesus Christ, his holy Church, his Gospel, truth and goodness".

 

-Pope John Paul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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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o Giovanni XXIII (Angelo Giuseppe Roncalli) Papa 

11 ottobre 

Sotto il Monte, Bergamo, 25 novembre 1881 - Roma, 3 giugno 1963

 

(Papa dal 04/11/1958 al 03/06/1963).

Angelo Roncalli nacque a Sotto il Monte, piccolo borgo del bergamasco, il 25 novembre 1881, figlio di poveri mezzadri. Divenuto prete, rimase per quindici anni a Bergamo, come segretario del vescovo e insegnante al seminario. A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fu chiamato alle armi come cappellano militare. Inviato in Bulgaria e in Turchia come visitatore apostolico, nel 1944 è Nunzio a Parigi, per divenire poi nel 1953 Patriarca di Venezia. Il 28 ottobre 1958 salì al soglio pontificio, come successore di Pio XII, assumendo il nome di Papa Giovanni XXIII. Avviò il Concilio Vaticano II, un evento epocale nella storia della Chiesa. Morì il 3 giugno 1963. Un breve ma intenso pontificato, durato poco meno di cinque anni, in cui egli riuscì a farsi amare dal mondo intero. È stato beatificato il 3 settembre del 2000.

 

 

 

Nell’aria c’era già l’odore dell’estate, ma il giorno era triste. Quel 3 giugno 1963 una luce si spegneva nel mondo: il “Papa buono” era morto. Calde lacrime solcavano il viso delle tante persone che appresero in quei momenti la notizia della sua scomparsa. Nel suo breve ma intenso pontificato, durato poco meno di cinque anni, Papa Giovanni era riuscito a farsi amare dal mondo intero, che adesso ne piangeva la perdita. Ma già subito dopo la sua morte incominciava il fervore della devozione popolare, che doveva avvolgere la sua figura di una precoce quanto indiscussa aureola di santità, e prendeva avvio il processo di beatificazione: un lavoro ciclopico, durato ben 34 anni, con l’avvicendarsi di diversi Postulatori e montagne di documenti da vagliare prima di pronunciarsi sulla sua eroicità. (…)Il 12 ottobre 1958 Angelo Roncalli era partito alla volta di Roma per partecipare insieme agli altri cardinali al conclave, ma non immaginava assolutamente di essere eletto Papa. Il suo desiderio era sempre stato quello di essere un pastore di anime, modesto e semplice come un parroco di campagna. Era nato a Sotto il Monte, piccolo borgo del bergamasco, il 25 novembre 1881, figlio di poveri mezzadri che lo battezzarono il giorno stesso della sua nascita nella locale Chiesa di S. Maria; la stessa dove, divenuto prete, avrebbe celebrato la sua prima Messa, il 15 agosto 1915, festa dell’Assunzione. Angelino era molto intelligente e terminò le scuole in un lampo, tanto che in seminario era il più giovane della sua classe. A 19 anni aveva completato i corsi, ma per la legge ecclesiastica non poteva essere ordinato sacerdote prima dei 24 anni, così fu mandato a Roma per laurearsi alla Gregoriana. Divenuto prete, rimase per quindici anni a Bergamo, come segretario del vescovo e insegnante al seminario. A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fu chiamato alle armi come cappellano militare. Nel 1921 Roncalli è a Roma e, successivamente, viene inviato in Bulgaria e in Turchia come visitatore apostolico: iniziava così la sua carriera diplomatica. Nominato Nunzio a Parigi nel 1944, diventa Patriarca di Venezia nel 1953. Un’esistenza piuttosto appartata, senza fatti eclatanti, fino all’elezione al soglio di Pietro. Aveva allora 77 anni ed aveva già fatto testamento. Intendeva essere sepolto a Venezia e si era fatto costruire la tomba, nella cripta di S. Marco. Era naturale che ritenesse ormai imminente il suo commiato dal mondo. L’anno prima, 1957, aveva scritto infatti nel suo diario: “O Signore, siamo a sera. Anni settantasei in corso. Grande dono del Padre celeste la vita. Tre quarti dei miei contemporanei sono passati all’altra riva. Dunque anch’io mi debbo tener preparato al grande momento…”. Ma le vie del Signore sono sovente imprevedibili. Il 28 ottobre 1958 l’allora cardinale e patriarca di Venezia salì al soglio pontificio, come successore di Pio XII, e molti ne restarono sorpresi. Un vecchio avrebbe dovuto reggere la Chiesa? I giornali presto ci ricamarono su perché veniva da una famiglia di contadini. “Il papa contadino”, cominciarono a chiamarlo. Ma Roncalli aveva ben chiara la propria missione da compiere. “Vocabor Johannes…”. Mi chiamerò Giovanni, esordì appena eletto. Era il primo punto fermo del suo pontificato. Un nome che era già tutto un programma. E non si smentì. Nel 1959, un anno soltanto dopo la sua elezione, “tremando un poco di commozione, ma insieme con umile risolutezza di proposito”, come disse ai cardinali riuniti, annunciò il Concilio Vaticano II. Un evento epocale, destinato a cambiare il volto della Chiesa, a segnare un netto spartiacque nella storia della cristianità. (…) Fu il leit-motiv della sua vita e del suo pontificato. Dopo la S. Messa, nulla era per lui più importante del Rosario. Ogni giorno lo recitava per intero, meditando su ogni mistero. “Sono entusiasta ? egli diceva - di questa devozione, soprattutto quando è capita ed appresa bene. Il vero Rosario è il cosiddetto Rosario meditato. Questo supplisce a molte altre forme di vita spirituale. È meditazione, supplicazione, canto ed insieme incantesimo delle anime. Quanta dolcezza e quanta forza in questa preghiera!”. Mons. Loris Capovilla, suo segretario e fedele custode di memorie, ha detto che Papa Giovanni “durante tutta la sua esistenza si comportò con Maria di Nazareth come un figlio con la madre, uno di quei figli che un tempo davano del lei o del voi alla propria genitrice, manifestando amore dilatato dalla venerazione e rispetto alimentato dall’entusiasmo”. Una venerazione tenera e forte, delicata e incrollabile, in cui possiamo vedere racchiuso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Durante il suo pontificato fu pubblicato su “L’Osservatore Romano” un suo “Piccolo saggio di devoti pensieri distribuiti per ogni decina del Rosario, con riferimento alla triplice accentuazione: mistero, riflessione ed intenzione”: in una scrittura limpida e chiara c’è il succo delle riflessioni che egli veniva maturando nella personale preghiera del S. Rosario. “Nell’atto che ripetiamo le Avemarie, quanto è bello contemplare il campo che germina, la messe che s’innalza…”, diceva con efficace metafora presa da quel mondo contadino a lui così familiare. “Ciascuno avverte nei singoli misteri l’opportuno e buon insegnamento per sé, in ordine alla propria santificazione e alle condizioni in cui vive”. Papa Giovanni auspicava che il Rosario venisse recitato ogni sera in casa, nelle famiglie riunite, in ogni luogo della terra. Ma quanti oggi si radunano per fare questo? Il vento gelido della secolarizzazione ha finito per spazzare via questa antica consuetudine. Le case assomigliano oggi a isole di solitudine e incomunicabilità e se ci si riunisce è per celebrare i rituali del “caminetto” televisivo che mescola con la stessa indifferenza massacri etnici e telequiz, futilità e orrori. (…)Il suo paese natale da oltre un trentennio è meta incessante di pellegrinaggi. Lo si era immaginato come un papa di transizione, che sarebbe passato in fretta, presto dimenticato, ma non è stato così. Per un disegno provvidenziale di Dio la giovinezza della Chiesa si è realizzata attraverso l’opera di un vecchio. Fu veramente un dono inatteso del Cielo. Attento ai segni dei tempi, Papa Giovanni promosse l’ecumenismo e la pace. Uomo del dialogo e della viva carità, fece sentire a tutti gli uomini, anche ai non cattolici e ai lontani, l’amicizia di Dio. La sua spiritualità, delicata e robusta al tempo stesso, aveva, come abbiamo visto, le sue radici in Maria. A Lei sempre si rivolgeva, in Lei confidava. Non si staccava mai da Lei, né mai si macerava nel dubbio: la sua fede era limpida e sorgiva, riposava in Maria, attraverso il Rosario. Anche il miracolo, la guarigione “clinicamente inspiegabile” di una suora malata di cancro, grazie a cui è ora elevato alla gloria degli altari, si è realizzato nel segno di Maria. Suor Caterina Capitani, delle Figlie della Carità, era affetta da un tumore allo stomaco che l’aveva ridotta in fin di vita. Papa Giovanni era morto da soli tre anni e la suorina con le consorelle l’aveva pregato a lungo, con grande insistenza e fiducia. Quel giorno, era il 25 maggio 1966, il “Papa buono” le apparve e le disse di non temere, perché sarebbe stata guarita, aggiungendo: “Me l’avete strappato dal cuore questo miracolo…”. Prima di scomparire però le fece una grande raccomandazione: di pregare sempre il rosario. Era il suo chiodo fisso durante la vita, era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nell’alba eterna che non conosce tramo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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