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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2일 몬테그라노로의 성 세라피노 수도자♬시편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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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10-11 ㅣ No.1417

 

축일;10월12일

몬테그라노로의 성 세라피노 수도자 O.F.M.cap.

SAINT SERAPHIN OF MONTEGRANO.CAPUCHIN

St.Seraphinus of Ascoli-Piceno  

San Serafino da Montegranaro Religioso

Montegranaro, Ascoli Piceno, 1540 - Ascoli Piceno, 12 ottobre 1604

Fu canonizzato da Clemente XIII il 16 luglio 1767.

Serafino = velenoso come il serpente

 

 

세라피노성인은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수사님으로써 문맹수사였지만, 기적적으로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

그 당시 가난한 지역이었던 몬테그라나로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성인은 몬테그라나로 주민들의 주보성인이다. 

몬떼그라나조에서 어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성 세라피노는 어릴 때부터 양치기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양친을 잃은 후 그는 맏형 밑에서 일을 했는데, 형은 구두쇠에다 냉혹한 주인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16세 때에 집을 나와서 카프친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좋은 성품과 열심을 지녔던 세라피노는 급속도로 영웅적인 덕을 닦았다.

밤마다 그는 성체 앞에서 3시간 동안 기도했고, 아침 미사 후에야 방으로 갔다. 

그는 원장의 허가를 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비신자들 가운데에서 노동자들처럼 일을 하였다. 한번은 그가 로레또로 순례를 가던 중, 홍수로 불어난 뽀덴짜강을 건너지 못할 때 그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맨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또 한번은 수도원에 있는 배추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받을 사람이 너무나 많아 걱정하면서 돌아와보니 배추들이 그대로 있어서 계속하여 배추들을 날마다 준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십자성호로써 병자들을 치유했고, 영을 식별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은혜로써 교회 안팎에서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다가, 아스꼴리 피체노에서 선종하였다. 

 

 

 

 

[역 사]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  "작은 형제회" 세개의 가지 - OFM(작은형제회), 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11.000여명의 카푸친 형제들이 그 전통에 따라 성 프란치코의 복음적 이상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 성]

카푸친 작은 형제들은 천상 성부의 한 아들들로서 형제 생활을 함께 하며,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운 생활을 합니다. (가난-더욱작음,형제애)

 

형제들은 성령의 영감에 응답하여 기도와 관상의 정신을 기르도록 노력한다.형제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당신 마음에 새기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항상 복음 말씀을 묵상하고,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관상)

 

카푸친 작은 형제들은 형제들의 내적인 삶을 세상의 모든 이와 나누기 위해 말과 행동으로 만민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합니다. 복음화에 있어 카푸친들은 온 세상 사람들,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삼아 평화와 정의를 북돋우며,자연을 보호하며 사랑하다. (복음화,정의 평화,자연보호)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삶이요,우리의 기도요,우리의 활동이다"(카푸친 회헌3장) 기도 중에 형제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마굿간에 누우신 그분의 가난을 기억하며, 성체성찬 안에서 그분의 겸손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어두움과 직면합니다.

 

형제들의 기도는 현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나환자 안에서 주님을 찾았던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가난하고 고생하시는 그리스도를 이웃의 얼굴 안에서 보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그분을 섬기며 사랑하도록 노력합니다.

 

형제들의 사도직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지역교회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도직(선교,피정의 집,청소년교육,행려자를 위한 식당,특수사목-교도소,군인,병원,양로사목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1369번   

 

 

 

 

 

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o.f.m.cap. 전 총봉사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 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 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 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카푸친작은형제회에서-
 

 

♬시편136(137)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성인이 선종하셨습니다! 성인이 선종하셨습니다!"
그는 확실히 깔끔한 성인은 아니었다! 그의 고향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그에 대해 묘사했다. “그의 수염과 머리털은 늘 부스스했고 입 냄새는 지독했습니다. 헝겊 조각을 덧댄 그의 수도복은 늘 왼쪽으로 약간 처져 있었고, 그 탓에 수도복 속의 헤어-셔츠(고행을 위해 거친 털로 만들어진 옷)가 늘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습니다.. 그의 목은 발진이나 습진 때문에 늘 열꽃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어깨에 손대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꽃과 어린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의 아이들, 그 나이든 카푸친이 늘 친절하게 사랑해주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 제일 먼저 그의 사망소식을 전한 이들이 되었다. 실제로 1604년, 그가 선종하고 사망소식이 퍼지자, 동료 카푸친들은 큰 인파가 장례식에 몰려들 것을 짐작하여 ‘몬테그라나로(Montegranaro)의 세라피노’ 형제의 시신을 조용히 매장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사망 소식을 들은 어린이들은 도처를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성인이 선종하셨습니다! 성인이 선종하셨습니다!"

세라피노 형제의 살아생전, 사람들은 그에게 갖가지 높은 칭호를 붙여대며 그를 ‘성인’ 혹은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라고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기적들은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나기만 했다. 46년 전, 그가 에시(Jesi) 카푸친 수련원으로 들어왔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은 예언적 말로 자기 자신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십자고상과 묵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들을 통해서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투른 젊은이
그가 만 18살 되는 그때, 그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 누구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사실 기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제대로 못 해냈다. 1540년 쯤, 그는 안코나(Ancona)의 마르케(Marche)로 알려진 이탈리아 중부, ‘몬테그라나로’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예로니모 데 니콜라(de Nicola)’와 어머니 ‘테오도라’에게서 태어난 4명의 자녀 중 둘째였다. 아버지 예로니모는 건축업자였지만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탓에  ‘펠릭스’라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은 이 둘째 아이는 가족의 생계자금을 보충하기 위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웃농장에서 머슴으로 살아야 했다. 양들을 벗 삼아 시골에서 홀로 살아왔기에 그는 침묵과 고독, 기도와 묵상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모가 돌아가시자 가업을 물려받은 형 ‘실렌시오(Silenzio)’는 펠릭스를 집으로 불러들여 건축 일을 돕게 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참으로 서투른 젊은이였고 형이 가르쳐 준 건축술을 조금도 재대로 배우지 못했다. 자재 통을 나르는 간단한 일마저도 타고난 서투름을 극복하지 못한 그였기에, 성질이 괴팍한 형에게서 계속하여 꾸지람을 들으며 얻어맞아야 했다.  

그는 사막의 교부들처럼 외딴 곳으로 들어가 기도하고 고행하는 생활로서 하느님께만 헌신하고픈 바람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하루는 펠릭스가 ‘로로 피체노(Loro Piceno)’라는 이웃동네에서 온 ‘루도비카 반누치(Vanucci’)라는 처녀에게 그 마음을 드러냈다. 때마침 루도비카는 최근 설립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 그러한 생활양식을 살 수 있을 거라며, 멀지않은 ‘톨렌티노(Tolentino)’에 카푸친 작은 형제들의 지역형제회가 있다고 덧붙여 주었다.    
 



카푸친에서의 초기 시절
만16살 되던 해, 펠릭스는 그 지역카푸친 형제회로 가서 입회시켜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2년 후 1558년에 다시 입회를 시도했고, 이번에는 수도회에 받아 들여졌다. 오늘날 ‘몬테그라노로의 세라피노’라는 수도명으로 알려지게 될 그는, 예시(Jesi) 수련원에서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친 뒤 종신서약을 했다.

신서약자 세라피노 형제는 포부가 컸고 기도에도 열심이었지만, 그의 수도생활의 초기는 그리 순조롭지가 못했다. 그의 선천적 어설픔과 무재무능(無才無能)은 형제회에서 부여된 모든 직무를 여전히 엉망으로 처리했다. 때문에 수호자들과 동료 형제들의 꾸짖음과 수없는 굴욕과 고행을 견뎌야 했고, 집주소도 자주 바꾸어야 했다. 사실 세라피노 형제가 자주 이동해야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들을 재대로 수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로로 피체노(Loro Piceno)와 코리날도(Corinaldo)와 오스트라(Ostra), 안코나와 산텔리디오(Sant' Elipidio)와 몬톨모(Montolmo)와 같은 여러 지역 형제회에서 짧게 짧게 머물렀는데, 그가 보낸 기간들의 연대순을 정확히 밝히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결국 1589년 쯤, 세라피노 형제는 ‘아스콜리 피체노’로 이동되었고, 그곳에서 15년간의 여생을 보내게 됐다.




성덕의 비결
하지만 그가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은 그의 분명한 성덕과 기적을 행하는 그 명성에 이끌려 그를 쫒아 무리를 지어 달려가곤 했다. 치비타노바(Civitanova) 형제회의 수호자가 그 성덕과 기적을 행하는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세라피노 형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음 수도원에 왔을 때에 저는 솜씨도 소질도 없는 가난하고 미숙한 일꾼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너무나 많은 굴욕과 책망을 받는 이유가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악마도 제 마음속에서 수도회를 떠나 사막으로 물러나도록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주님께 내맡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룻날 밤, 성체를 모신 감실로부터 ‘하느님을 섬기려면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며 어떠한 역경이든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은 들려왔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 역경들을 받아들였고, 저에게 역경을 일으켰던 그 사람들을 위하여 묵주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에게 굴욕감을 주는 이들을 위한 기도들이 무척 내 마음에 들었다. 이에 대해서 나는 너에게 모든 은혜를 기꺼이 베풀리라.’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익숙한 음성에 저는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이
아아! 이에 따른 은혜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그것은 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은혜이기 보다는 남에게 이익이 되는 은혜였다. 2000여장에 달하는 세라피노 형제의 시성운동 자료는 그가 행했던 수많은 기적들에 대한 증언이다. 어떤 수호자는 그에게 기적을 그만 행하라고 명령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 목록은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망토에 입을 맞추거나, 몸에 그의 손을 얹게 하거나,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곧바로 고질적인 병들이 나아 어려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손이 닿은 모든 것들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수단이 되었다. 빵과 오렌지, 풀과 밀, 상추는 물론이고 회향줄기와 호박조각으로 만든 그의 묵주도 모두 기적을 일으키는 힘에 깃들어 있는 듯했다. 실제로 일반사람들도 대도시의 의사들의 처방약보다는 세라피노 형제의 묵주에 훨씬 더 의탁하곤 했다.
 



세라피노 형제가 일으켰던 몇몇의 기적적인 치유들
어느 한 어머니는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는 딸을 데리고 가서 그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아, 작은 성녀여, 성당에 있는 성체 제단으로 데리고 가시오.”라고 대답했다. 조금 뒤, 두 모녀가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본 그는 그 딸에게 장미 세 송이를 주고는 어머니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시면, 바랐던 것 이상으로 말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곧 바로 알아차리실 겁니다.” 그날 저녁식사 때에 소녀가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너무 많이 떠들어서 부모는 어떻게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아스콜리 피체노 주교좌성당의 의전사제는 손에 한 가득 고름딱지를 돋게 하는 전염성 피부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피부병은 공적인 미사를 더 이상 거행하지 못 할 정도로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했다. 하루는 그가 카푸친 형제회의 뒷마당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세라피노 형제를 만났는데, 나이 지긋한 세라피노 형제는 의전사제의 손을 잡으며 “이 손은 누구의 손입니까? 사제의 손입니까? 아니면 의전사제의 손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전사제는 “세라피노 형제님, 저에게 처방전 좀 내려주시겠습니까?”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부탁했다. 이에 세라피노 형제는 가까운 풀밭에서 풀을 한 움큼 뽑아 사제의 손이 온통 초록색으로 파래질 때가지 문지르면서 “이 손이 아름다워질 정도로 나으시기를 빕니다.”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비록 금방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손의 감촉이 부드러워지면서 한결 좋아졌다. 보름 정도가 지나자 그의 손은 완전히 나았고 다시 공적인 미사를 거행할 수 있었다.

또, 세라피노 형제는 병세가 위독하여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한 주교의 병을 고친 적이 있었다. 그 주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나긴 여행을 했다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덕분에 천국의 그분들은 내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리고 나를  아래층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으로 돌아와 여기에 있군요!”

세라피노 형제처럼 카푸친 성인이 된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 형제도 기적으로 죽은 자들을 소생시킬 수도 있었던 세라피노 형제의 명성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마르케의 관구 순방 중 일찍이 그를 만났지만, 외방선교지에 나설 마음을 드러냈던 그 노인 형제가 바로 세라피노였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그것은 세라피노 형제 스스로도 그대로 이루지기를 바랐던 길이었을 것이다.

세라피노 형제의 추종자 무리들은 그를 둘러싼 성덕의 후광에 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늘 대중의 박수를 피해 숨은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감사를 표하는 추종자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자! 작은 성인들이여! 진정하시오! 진정하시오! 그대를 치유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와 그대 자신의 신앙심 때문입니다!”



형제들을 기꺼이 섬겼던 카푸친의 본보기
몬테그라나로의 세라피노 형제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전형적인 카푸친이었고, 수도회의 주된 은사들의 전형 그 자체였다. 참으로 기도가 된 사람이요, 민중의 형제였으며, 가난과 엄격을 산 더욱 작은 형제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평화주의자로서 그는 정의와 올바름에 목말라했고, 또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참으로 기뻐했다.

세라피노 형제는 무수한 결점을 지닌 자신을 형제회 안으로 받아들여준 카푸친 형제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꺼운 순종을 통해서 그는 감사하는 마음과 형제애를 표현했다. 형제들에게 이득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는 기꺼이 다른 형제회로 이동하였고, 요리사와 원예사, 동냥자와 문지기, 설교자들의 동료로서 형제들에게 봉사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무능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고 공공연히 모욕했던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러한 그의 형제사랑은 최고조에 달했다.    

또한 그에게는 비난에 응수하는 또 하나의 비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건전한 유머감각이었다. 어느 수호자가 그에게 “이 위선자야! 세상을 속이는 자야! 이 목이 뻣뻣한 놈아!” 라고 외치자, 세라피노 형제는 “비록 나는 위선자이지만, 게으른 위선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을 속이면서 세상에 두루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라며 즉시 재담을 떨었다. 

형제회의 어떤 사제 형제는 세심함 때문에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이에 세라피노 형제는 그에게 “따라오세요. 내가 알려줄 만한 몇몇 유보 사례가 있어요.” 하고 작은 부엌으로 초대했다. 찬장 문을 열어 그 사제에게 치즈 덩어리들을 보여주면서 “자! 이들이 나의 유보 사례들이에요.”라며 재미있게 말장난을 했다. (사실 이탈리아말로 'casi riservati'라는 단어는 ‘유보 사례들’이란 뜻도 있고, 동시에 ‘보존된 치즈들’이란 뜻도 있다.) 그러자 그 동료 형제는 웃음을 터트렸고, 우울증을 초래한 자신의 세심함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기도가 된 사람
그를 앞서 간 성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세라피노 형제 또한 기도하는 사람이기라기보다 ‘온 생애가 기도가 된 사람’이었다. 증인들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라도 그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하여 습관적으로 드높여져 있었고, 평생 하느님과 일치를 누렸다고 한다. 하느님과의 지속적 일치 상태는 신비적 은사들 중에서도 아주 드문 은사이다. 형제회 안에서 묵을 때나 동냥하다가 은인의 집에서 묵을 때에도 그의 기도는 한밤의 적막 안으로 깊게 울려 퍼졌다. 다른 형제들이 잠자리에 든 이후에도 그는 조용히 성당으로 가서 축성된 성체 속에 계신 예수님께 수 시간 기도를 하곤 했다. 밤이 되면 실제로 그는 자신의 독방보다는 성당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행여 성당에서 기도하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소리로 코를 골며 잠을 자는척하곤 했다. 어떤 형제가 이러한 그의 불손함을 꾸짖었을 때에 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의 작은 성인이여, 나는 식당에서보다는 성당에서 더 많이 잠을 잡니다.”하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동료 형제에게는 성당에서 밤을 보내는 솔직한 이유를 고백했다. 그것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독방에서 있노라면 정결을 거스르는 유혹을 몹시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세레피노 형제는 주님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대화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긴밀한 체험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러한 체험 덕택에 반문맹자였던 이 카푸친 평형제는 우리 신앙의 가장 심원한 신비들을 통찰할 수 있었고, 관상기도의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이렇게 초자연적으로 얻어진 지혜로 인해 그는 교회의 가장 박식한 성직자들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기도 중에 자주 황홀경에 빠졌다. 이에 관해서는 1596년에 로레토(Loreto)를 함께 순례한 적이 있는 ‘페르모(Fermo)의 시몬’ 형제가 바로 그 증인이다. 그는 로레토 대성전 안 ‘거룩한 집’에서 한시도 꼼짝하지 않은 채 14시간 동안이나 기도한 그 성스러운 노인 형제를 깨우기 위해 흔들어야만 했었다.
 
그의 기도가 때때로 황홀한 것이긴 했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성당에서 기도하는 세라피노 형제의 모습을 몰래 감시하던 한 형제는 한탄스럽게 “주님, 평화를! ...를 위하여 평화를 청하옵니다.”라며 계속 반복되는 그의 기도를 엿들을 수 있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 그 이름을 더 뚜렷하게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다가 그만 어둠 속 좌석에 쾅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이에 놀라서 세라피노 형제는 벌떡 일어났고, 그에게 그만 가서 잠자리에 들라고 말했다. 다음날 점심식사 때가 되자, 형제들은 오랫동안 서로 다투었던 유서 깊은 아스콜리의 몇몇 가문들이 그날 아침에 화해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세라피노 형제는 참된 프란치스칸으로서 예수님의 수난 신비와 성체 신비, 복 되신 동정 마리아님의 태중 육화 신비에 깊은 신심을 품었다. 카푸친회의 유명한 연대기 작가 ‘보베리오(Boverius)’는 세라피노 형제가 수난의 신비를 묵상할 때에 “그는 자신 안에서 그토록 애정 어린 마음과 하느님께 대한 불같은 사랑을 느끼며 넘쳐흐르는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세라피노 형제는 언제나 작은 나무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고, 노후에는 놋쇠 십자고상을 늘 가지고 다녔다. 그 십자고상을 가리키면서 사제 형제들에게 “보십시오!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설교해야 하는 책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고는 십자고상을 향해 그 기나긴 응시로서 기도하며 관상에 빠져들었다.

그가 가졌던 또 하나의 주된 신심은 성체에 관한 신심이었다. 그 신심은 무엇보다도 미사성제에 대한 진지한 참여로 표출되었다. 그는 날마다 되도록 많은 미사의 복사로 참여하기 위해 로마나 ‘로레토의 형제회’에 배치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빈번히 이야기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수도회 봉사자들의 특별한 허가 하에, 그 시절의 관행은 아니었지만 매일의 영성체를 영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로레토 대성전에 보존 되어 있는 ‘나자렛의 성가정’, 그 거룩한 집에서 기도하기 위해 빈번히 그곳으로 순례를 했다는 사실은 그가 지닌 육화신심과 성모신심을 잘 드러내준다. 어린 시절, 그는 로레토 성모성지에 가기 위해 강둑에서 물길이 약해지길 기다리는 친지들을 두고, 신발이 젖지 않은 채로 물이 가득 불은 강을 건너간 적이 있었다. 묵주를 손에 든 채로 자주 그려진 그는 묵주기도를 자주 바쳤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모님의 생애의 신비를 즐거이 묵상하곤 했다.




가난하고 엄격하게 산 더욱 작은 형제
작은 출입문만 있을 뿐 조그만 창문 하나 없는 그의 텅 빈 독방은 가난 부인에 대한 그의 사랑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옷과 일상 용품들, 묵주와 같은 성물마저도 가장 천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다. 수도회 봉사자에 대한 순종으로 평생에 딱 한번 새 수도복을 입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믿기 어려운 정도로 스스로에게 가했던 단식과 단음(斷飮,음료를 절제함), 그러한 그의 보속행위들에서 그의 엄격성이 드러났다. 그는 일반적으로 야채수프 한 입과 샐러드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철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형제들의 생계 필수품을 동냥할 때, 먼지가 자욱한 그 시골길을 걸어 돌아다닐 때에도 물을 마시는 일을 삼갔다.  그렇지만 앓고 있는 형제에게 무언가 먹게 하기 위해서는 망설임 없이 자진하여 음식을 먹음으로서 자신의 단식을 끝내곤 했다. 늘 헤어-셔츠(고행을 위해 거친 털로 만들어진 옷)를 맨 몸 위에 입고서 자신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고, 여러 가닥의 쇠사슬이 달린 고행용 채찍으로 제 몸을 자주 채찍질했다.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으려는 마음으로 이 모든 고행을 했다.

세라피노 형제에게는 골칫거리 업무가 자신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강요된 필수 조건이었다. 그는 집안 모든 일에 도무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회의 봉사자들은 집에서 가장 천한 업무만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통하여 위로 올라가는 길에 나섭니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는 프란치스칸의 ‘더욱 작음’의 참뜻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1604년, 세라피노 형제는 글레멘스 8세 교황이 ‘모노폴리(Monopoli)의 안셀모’ 형제를 사상 최초의 카푸친 추기경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아! 최고의 깊은 겸손의 기초 위에 세워진 불쌍한 카푸친 수도회여!”하고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복음을 선포하는 “민중의 형제”
기도는 세라피노 형제의 복음 선포의 활력소였다. 기도하다가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이 전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말로서 뿐만 아니라 모범적 생활과 선행의 증거로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기꺼이 나누었다.

세라피노 형제의 권고의 말들은 종종 박식한 이들을 아주 놀라게 했다. 하루는 그가 신학수업중인 교실에 우연히 들어갔는데, 그곳에 모인 신학생들에게 몇 마디의 말을 순종으로 해야만 했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거룩한 능숙함으로 강의를 했고, 이에 학생들은 혹시 세라핌적 교회학자인 ‘성 보나벤투라’가 되살아나서 소박한 저 평형제로 위장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놀랐다. 순종의 의무로 그는 가끔 형제들의 식당에서 강론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편 제 91편이나 “Stabat Mater”라는 성모애가에 대한 강론은 참으로 열정이 가득 찬 것이어서 그것을 듣는 형제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는 부자의 대저택이든 가난한 사람의 판잣집이든 그들을 방문하고 위로하였으며, 자주 작은 십자고상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시립감옥의 정문도 세라피노 형제에게는 늘 열려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재소자들을 위로하며 하느님 품으로 되돌아오도록 초청하곤 했다.  귀족들과 고위성직자, 추기경들마저도 영적 걱정거리는 물론이고 물적 걱정거리들도 그에게 털어 놓고 조언과 기도를 부탁하곤 했다. 그의 초자연적인 지혜와 삶으로 현 사회에 참여했던 그의 자세와 기적을 많이 행함으로 인한 그의 명성은 그를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민중의 형제”가 되게 했다.



정의에 목말라 하며 피조물을 사랑하고 평화를 이루는 이
세라피노 형제는 그 시절 실체적 사회 현실에 비범하게 참여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화해를 도모하는 일과 부정에 맞서 싸우는 일, 그리고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지금 우리 시절의 자각들을 미리 경험한 사람인 것 같았다.

동냥자와 문지기로서 그는 끊임없이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크나큰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식탁에 음식을 채웠고,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청한 은혜로 야채증식의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그는 다투는 가족들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이었고, 사람 죽이기를 마다하는 산적들의 사도였으며, 여자들의 무분별한 사치와 남자들의 상습적인 도박을 바로 잡는 사람이었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 또한 피조물에 대한 명백한 사랑을 품었고, 창조주에 대한 찬미가를 아무 곳에서나 부를 수 있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새들에게 먹이를 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다시금 그 새들을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날려 보내곤 했다. 물속으로 잠기게 한 그의 수도복 소매 안으로 헤엄쳐 들어온 물고기들과 대화하기도 했고, 들에 핀 가양각색 꽃들이 내품는 빛깔과 향기를 매우 좋아했다. 



말기와 사후의 현양
몬테그라나로의 세라피노 형제는 15년간의 인생 후반을 ‘아스콜리 피체노 형제회’에서 보냈다. 그는 아스콜리의 시민들을 마음에 아로새겼고, 시민들도 세라피노 형제를 그들 마음에 아로새겼다. 그토록 따뜻하게 세라피노 형제를 사랑한 탓에, 아스콜리 시민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성화를 걸었고, 공공건물의 벽에도 내걸었다.

1604년 10월 12일 오후, 그는 그 도시에서 ‘죽음 자매’를 맞이했다. 어린이들이 외치는 사망소식에 시민들은 무리를 지어 카푸친 성당으로 몰려가 고(告) 세라피노 형제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세라피노 형제의 시신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겼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시신은 유리관에 안치되어 아스콜리의 카푸친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세라피노 형제는 1729년 7월 8일, 베네딕토 13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에 클레멘스 13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을 받았다.
 

자! 작은 성인이여! 진정하시오! 진정하시오! 그대를 치유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대 자신의 신앙심이었기 때문이에요!", "오, 작은 성인이여, 작은 성인이여, 그대에게 흰 빵이 주어지기를!  아아! 나에게 연옥에 갈 자격이라도 있다면! 나는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나에게는 십자고상과 묵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들을 통해서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 몬테그라나로의 성 세라피노
 (카푸친 작은형제회 홈에서)  update 2012.4.6.
 

 

 

 

 

 

 

 

 

 

 

 

 

SAINT SERAPHIN OF MONTEGRANO

CAPUCHIN

From early youth he felt the urgings of God and gave himself to the influence of the Holy Spirit. As a young boy he spent many hours in prayer, absorbed by the thought of God. He worked as a shepherd boy.

 

When he came to the order he admitted that he was unskilled in work and with a childlike simplicity able to love God alone. Through grace he had been schooled in the art of prayer like the Apostles. He learned to pray always and be in union with God day and night, to refer all things to God as a loving Father, to be truly a man of prayer who depended on God.

 

Fr Cuthbert describes Seraphin as ".... a guileless simple soul". We are told that he was clumsy and ignorant. To all this God added a spiritual dryness and thus we can see the saintly brother had a share in the sufferings both physical and spiritual that Jesus had suffered. But God restored his peace by giving him the grace to bear his trials, in order to come closer to Christ.

 

We are told that Seraphin had a never failing thoughtfulness for the needs of the people around him. Fr Cuthbert says of him "....... he would starve himself but would never let another go hungry if he could help it. He would break his accustomed fasts if he, by eating, could induce an ailing brother to eat with him. He spent his nights in prayer, but by day was at the service of those who needed him, at times, we are told, crowds came to the Friary gate".

 

It seems that everyone who had troubles must bring them to Fra Seraphin. It was for the sick and poor that he had the most compassion. It was for these, the least of Christ’s brothers that Seraphin begged and worked. To satisfy his charity the friars allowed him to cultivate part of the friary garden for their benefit and we are told that God blessed his work in abundance, even though he was unskilled in gardening.

 

Seraphin had a great love for the Eucharist and the Priesthood. Like his Father Francis, he rejoiced to kiss the hand of the priest, for this soul through his prayer and work, understood what mortal eyes could not.

 

He was canonised in 1767. His feast is celebrated on the 12th of October.

 

 

 

 

 

 

 San Serafino da Montegranaro Religioso

12 ottobre
 
Montegranaro, Ascoli Piceno, 1540 - Ascoli Piceno, 12 ottobre 1604

Serafino nacque nel 1540 a Montegranaro nelle Marche. Era povero: per un periodo fece il custode di gregge. A 18 anni entrò in convento a Tolentino. Fu accolto come religioso fratello n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fece noviziato a Jesi. Peregrinò per tutti i conventi delle Marche, perché, nonostante la buona volontà e la massima diligenza che poneva nel fare le cose, non riusciva ad accontentare né superiori, né confratelli, che non gli risparmiarono rimproveri. Ma egli dimostrò sempre tanta bontà, povertà, umiltà, purezza e mortificazione. Nel 1590 Serafino si stabiliva definitivamente ad Ascoli Piceno. Due i «libri» fondamentali per lui: il crocefisso e la corona del rosario con cui si faceva messaggero di pace e di bene. Aveva 64 anni e la fama della sua santità si diffondeva per Ascoli, quando egli stesso chiese con insistenza il viatico. La morte lo colse il 12 ottobre 1604. Dopo essere spirato, semplice anche nella morte, la voce del popolo che lo diceva santo giunse anche alle orecchie del Papa Paolo V, il quale autorizzò l'accensione di una lampada sulla sua tomba. Fu canonizzato da Clemente XIII il 16 luglio 1767. (Avvenire)

Etimologia: Serafino = colui che infonde calore,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Ad Ascoli, san Serafino da Montegranaro (Felice) de Nicola,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vero povero, rifulse per umiltà e pietà.


Ascolta da RadioVat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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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Serafino nacque nel 1540 a Montegranaro nelle Marche, da Girolamo Rapagnano e da Teodora Giovannuzzi, di umili condizioni, ma cristiani ferventi. A causa della povertà familiare, lavorò per un certo tempo in qualità di garzone presso un contadino alla custodia del gregge.
A 18 anni bussò alla porta del convento di Tolentino. Dopo alcune difficoltà, fu accolto come religioso fratello n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fece noviziato a Jesi. Peregrinò, si può dire per tutti i conventi delle Marche, perché, nonostante la buona volontà e la massima diligenza che poneva nell'espletamento dei compiti che gli venivano affidati, non riusciva ad accontentare né superiori, né confratelli, che non gli risparmiarono rimproveri, ma egli dimostrò sempre tanta bontà, povertà, umiltà, purezza e mortificazione. Negli uffici che esercitò di portinaio e di questuante, a contatto con i più svariati ceti, sapeva trovare parole opportune, squisita delicatezza di sentimenti per condurre le anime a Dio.
Nel 1590 San Serafino si stabiliva definitivamente ad Ascoli Piceno.
La città si affezionò talmente a lui che nel 1602, essendosi diffusa la notizia di un suo trasferimento, le autorità scrissero ai superiori per evitarlo. Vero messaggero di pace e di bene, esercitava infatti un influsso grandissimo presso tutti i ceti, e la sua parola riusciva a comporre situazioni allarmanti, ad estinguere odi inveterati e ad infervorare alla virtù.
Preghiera, umiltà, penitenza, lavoro e pazienza, tanta pazienza, perché i rimproveri per lui erano sempre abbondanti. E Dio si incaricò di aiutarlo supplendo alle sue capacità, in cucina, alla porta, nell'orto, alla questua, con i miracoli, l'introspezione dei cuori, il dono di saper confortare tutti in maniera inimitabile. Da parte sua rimase sempre contento di amare Dio conoscendo e studiando due soli libri: il crocifisso e la corona del rosario.
Aveva 64 anni e già la fama della sua santità si diffondeva per Ascoli, quando egli stesso chiese con insistenza il viatico, mentre nessuno credeva alla sua prossima fine. La morte lo colse il 12 ottobre 1604. Dopo spirato, semplice anche nella morte, la voce del popolo che lo diceva santo, giunse anche alle orecchie del Papa Paolo V, il quale autorizzo l'accensione di una lampada sulla sua tomba. Fu canonizzato da Clemente XIII il 16 luglio 1767.


Autore: Elisabetta Nar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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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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