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배추장수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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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1-20 ㅣ No.5557

 

주택가를 돌며 야채를 파는 이동 야채가게가 있었습니다.

"자, 싱싱한 배추 왔어요. 배추.. 싸요 싸!"

이 가게는 집 앞 골목에 배추, 무 같은 야채를 싣고 와서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추가 하도 싱싱해 보여 여섯 포기를 산 나는 배달을 부탁했습니다.

"동, 호수만 가르쳐 주세요. 갖다 드릴 테니까요. 염려마시구요."

"5동 415호요."

나는 아무 의심없이 동, 호수를 가르쳐 주고는 배추값을 지불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곧 갖다주마 하던 배추장수는 저물녘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른 하늘에서 난데없이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만 한 차례 퍼부었습니다.

비와 와서 늦으려니 하고 기다리던 나는 비가 그치고 밤이 되어도 배추장수가 오지 않자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휴, 그깟 돈 만 원에 양심을 팔다니... 어휴."

"뜨네기 장사꾼을 믿은 당신이 잘못이지. 그냥 잃어버린 셈 쳐요."

남편은 위로인지 책망인지 모를 소리로 내 심사를 건드렸고 나는 허탈해진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은 볕이 좋아 발래를 했습니다.

탈탈 털어서 베란다에 줄맞추어 널고 있던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딩동."

"누구세요?"

"저 혹시 어제 배추 사신 적 있으세요?"

나는 얼른 문을 열였습니다.

대문 앞에는 땀에 절은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어제 그 배추장사였습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보다 책망하는 마음이 앞서 따지듯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네, 맞아요. 근데 왜 인제 오셨죠?"

배추장수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쪽지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동 호수를 적은 종이가 비에 젖어서... 다 번지고 맨 끝에 5자만 남았거든요."

그는 너무 놀라서 쳐다보는 내 표정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단지 안 5호란 5호는 다 돌아다니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그만.... 아유 이거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까지 숙이며 내게 사과했습니다.

그는 숨박꼭질 같은 집찾기에 정말 지친 듯 입술까지 부르터 있었습니다.

"어머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는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는 내 손을 뿌리치고 이제라도 장사를 나가야 한다며 돌아섰고, 나는 그런 그를 위심했던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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