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동성당 게시판

[text39:4U]말하는잎사귀-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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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 [text1000] 쪽지 캡슐

1999-12-11 ㅣ No.964

 

 

말하는 잎사귀 - 류시화

 

 

1.

어젯밤 꿈 속에

잎사귀 하나가 내게 걸어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자기는 ’말하는 잎사귀’라고.

자신의 나무에 대해,

그 나무가 서 있는 대지에 대해.

그리고 자기를 흔드는 바람에 대해

말하는 잎사귀라고.

 

또 그 잎사귀는 내게 말했다.

나 역시 한 장의 말하는 잎사귀라고.

나 자신에 대해,

세상의 모든 이들에 대해,

나를 흔드는 꿈과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잎사귀라고.

 

어느 날 나무에서 떨어져내려

그 반짝이는 가을 물살에 떠내려갈 때까지

그 흙에 얼굴을 묻을 때까지

우리 모두는 한 장의

말하는 잎사귀라고.

 

2.

내 작업실 뒷마당에는 오래된 큰 느티나무 한 그 루가 서 있다. 나는 아침에 이 작업실로 들어서면 맨 먼저 그 나무에게로 다가가 둥치를 껴안아 보기 도 하고, 잎사귀들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한다.

큰 나무가 저의 품을 열어 지붕을 덮어주고 있는 이 작업실. 이곳이 내게는 더없이 좋은 수도원이고 명상 센터이다. 나만의 공간. 밤이면 전깃불마저 끄고, 인도와 티벳에서 구해 온 등불 몇 개를 켜 놓고 책을 읽는다. 때로는 내 안의 침묵을 바라보 며 앉아 있기도 한다. 그러면 나무 흔들리는 소리 도 들리고 대지에 몸을 기대는 마지막 풀벌레 울음 소리도 들린다. 모두가 한 장의 ’말하는 잎사귀’처 럼 무슨 말인가를 내게 들려주고 있다.

나는 귀를 열고 그 소리들을 들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귀 속의 귀’가 열려 그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물의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이 곧 명상과 기도의 순간이다.

한 사람이 교회에 가서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앉 아 있었다. 교회의 목사가 그 사람에게 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하느님께 어떤 얘기를 하셨습 니까?"

그가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하시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을 뿐입니다."

목사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하느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요?"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그분도 아무 말씀을 안 하시던데요. 우린 그냥 침묵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3.

뜰에 심어 놓은 파초의 넓은 잎사귀 위로 가을비 가 후두둑 떨어져내린다. 올해는 내 작업실 뜰에서 두 그루의 파초가 가장 먼저 빗소리를 알렸다. 한 그루는 어느 노화가의 뜰에서 옮겨다 심은 것이고, 또 한 그루는 제주도에서 ’거위 아저씨’가 보내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가을비가 그치면 아열대 식물인 파초는 잎사귀가 꺾이고, 생명을 다할 것이다. 그 뿌리를 겨울 내내 지하실의 어둡고 따뜻한 곳에 보관하리라. 이듬해 봄의 새로운 부활을 기대하면서.

마지막 가을비가 파초 잎을 너울거리게 하는 이 아침, 아일랜드 지방의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었다.

당신의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의 지갑에 언제나 한두 개 동전이 남아 있기를,

당신의 집 창틀에 언제나 해가 비치기를,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친구의 손길이 언제나 당신 가까이 있기를,

그리고 신께서 당신의 가슴을 기쁨으로 채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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