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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 앙주(톨로사)의 성 루도비코 주교 ♬시편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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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8-18 ㅣ No.1321

 

Altar of St Louis of Toulouse - SIMONE MARTINI
c.1317.Tempera on wood,200x138cm(without predella).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Naples

  

축일: 8월 19일

앙주(톨로사)의 성 루도비코 주교
San Ludovico d'Angiò (di Tolosa) Vescovo
Brignoles (Provenza), febbraio 1274 - 19 agosto 1297

Saint Louis of Toulouse 
Also known as : Ludwig of Toulouse

Born ;  February 1274 at Nocera, Italy
Died : 19 August 1297 of natural causes
Canonized  :  7 April 1317 by Pope John XXII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시칠리아(Sicilia) 섬의 왕 카롤루스 2세(Carolus II)의 아들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이 아라곤(Aragun) 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을 때,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 성 루도비쿠스도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영향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이윽고 그는 작은 형제회 회원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5년 그는 석방되었으나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를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는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그가 툴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로부터 관면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 후 착좌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로마(Rome)로 가서 작은 형제회 회원으로서 서원하였다. 그는 가난한 수도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였으나, 툴루즈 사람들은 그를 왕 못지않게 공경하였다. 그의 신심과 자태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주교관의 모든 화려한 물건은 배격하고, 작은 형제회의 회원답게 오로지 작은 형제회 회원에 알맞은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1317년 요한 22세(Joannes XXII)로부터 시성될 때 그의 모친도 생존해 있었다.
 

 참고자료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상) - '성 루도비코 주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89-191쪽.  (가톨릭홈에서)
 

 

그는 찰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 찰스가 아라곤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자,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루이도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면서 여러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프란치스꼬회원들의 영향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이윽고 그는 프란치스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5년, 그가 석방되었으나,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는,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후 그가 뚤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보니파시오 8세로부터 관면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사제서품 후 착좌하였다.

그후 그는 로마로 가서 프란치스칸으로서 서원하였다.

 

그는 가난한 수도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였으나,

뚤루즈 사람들은 그를 왕과 못지않게 공경하였다.그의 신심과 자태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주교관의 모든 화려한 물건을 배격하고 프란치스칸 답게,

오로지 프란치스칸에 알맞는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요한 22세로부터 아비뇽에서 시성될 때(1317), 그의 모친은 그때 생존해 있었다.

 

 

The Oath of St Louis of Toulouse-LORENZETTI, Ambrogio.

1324-27.Fresco.San Francesco, Siena

 

성 루도비코는 1274년 네아펠 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애스빠냐에 볼모로 잡혀가서 작은형제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자유를 되찾은 후에 왕위를 포기하고 작은형제가 되었고,

22세때 툴루즈의 주교가 되어서도 작은형제회 수도복을 선호하고

사목자로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열성적으로 돌보았다.

 

교회의 많은 봉사를 했고  톨로사의 주교가 되었다.

이곳에서 감옥에 갇친이 병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아직 젊은 나이인 1297년 폐병으로 로마에서 선종했고 톨로사 교구의 주보 성인이 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St Thomas in Glory between St Mark and St Louis of Toulouse-CARPACCIO, Vittore

1507.Tempera on canvas, 264 x 171 cm.Staatsgalerie, Stuttgart

 

북 이탈리아 가톨릭 신학계의 두 혜성,

프란치스코 회의 성 보나벤투라와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존재가 사라진 1274년

남 이탈리아 상공에 또 하나의 혜성이 나타났다.

이는 프랑스 툴루스 주교로 성덕의 빛이 더욱 찬란했던 루도비코 성인이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축일:1월28일.게시판917번,159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그는 시칠리아 섬의 왕 가롤로 2세의 아들이며 헝가리의 왕 스테파노 5세의 딸 마리아를 모친으로,

또 프랑스 왕 루도비코는 아버지의 친족이고,

투린기아(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어머니의 친척이 되는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의 졍결한 마음, 그의 독실한 신앙은 일찌기 타인들의 감탄을 사게 되었으나,

이처럼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왕후의 집안에도 하느님의 시련은 내려졌다.

즉 가롤로 왕에게 불만을 품은 시칠리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생포하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유폐한 일이다.

 

* 성왕 루도비코 9세(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인)축일:8월25일.게시판989번,1331번.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재속프란치스코회 주보성녀)축일:11월17일.게시판756번,1474번.

 

 

 

왕은 4년후에 겨우 석방되었으나 그 대신 공작(公爵)50명과 왕자 3명을 인질로 남기게 된 것이다.

루도비코도 그 중 한사람으로 바르셀로나에 감금되어 갖가지 냉대와 모욕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처지에서도 조금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고

잘 인내하며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감금 중에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지도를 받아

세속적 영화의 허무함과 사람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알고

더욱 더 세속을 싫어하며 하느님만을 사랑하려는 굳은 결심과,

부호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끊고 오직 가난한 생활만을 택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사모하여

때가 이르면 그를 본받아 모든 것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신성한 복음적 생활을 하려는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한 때 중병으로 위독하게 된 루도비코는 만일 하느님께서 도움을 베풀어 낫게 해 주신다면

꼭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일생을 그분께 봉헌 할 것을 맹세했던 바,

즉각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그 후 자유의 몸이 되어 나폴리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수도회 총장을 방문하여 자기의 수도원 지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총장은 부왕의 의사를 두려워하여 우선 승낙을 받아 올 것을 명했다.

 

루도비코는 아버지에게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소망을 알렸으나

본래 그런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펄쩍 뛰며

"세상을 버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

너는 아라고니아 왕의 여동생을 왕비로 맞아들여 내 상속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과 맺은 서원은 교황께 알리면 되지 않는가?"하며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루도비코의 결심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후세에 상속받을 천국의 보물에 비하면 현세의 왕위나 궁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며

시종일관 뜻을 변치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도 차남인 로베르토에게 그 상속권을 넘기기로 하고 루도비코의 수도원 입회를 승낙했다.

 

루도비코는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여 사제가 된 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집전 아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가 하느님과 맺은 서원대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의 일이고,

장엄한 종신 서원을 발한 것은 1296년 예수 성탄 축일 전날이었다.

 

*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Francis and St Louis of Toulouse-SIMONE MARTINI.

1318,Fresco, 120 x 152 cm.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그는 한때 시칠리아의 왕자였고, 교황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주교였지만,

교구에 부임할때는 몸에는 검소한 수도복을 걸치고 맨발로써 부임했다.

그에게는 아버지이며 스승인 아시시 성자의 겸손과 청빈을 방불케하는 점이 있었다.

그는 신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방에 거주하며 엄한 고행의 생활을 보내고,

그 수입의 태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며 매일 극빈자에게 어진 어머니와 같이 대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심으로 노력했다.

그러자 그의 성덕은 온 천하에 알려져 그 주교를 탐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빨리 불러 가셨다.

1297년 7월 뜻하지 않은 열병에 걸려  루도비코는 병석에 누운 지 1개월만에 병자 성사를 받고

8월 19일, 열렬한 기도 중에 그의 순결 무구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던 것이다.

그의 나이 24세요, 그 생애는 세상사람이 생각하는 평균 생명의 반도 못되는 짧은 세월을 이 세상에서

보냈으나, 남들이 백년에도 이룰 수 없는 공적을 남겨 놓았다.

1317년 시성되었다.



 

 

 



 

 

 

♬시편97(98).하느님,거룩하신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San Ludovico d'Angiò (di Tolosa) Vescovo
19 agosto 
Brignoles (Provenza), febbraio 1274 - 19 agosto 1297
 

Figlio di Carlo d’Angiò, re di Napoli. Da ragazzo fu condotto prigioniero con i fratelli presso il re di Aragona, ed ebbe occasione di conoscere i Francescani. Riacquistata la libertà, rinunciò al trono e ad ogni altra prospettiva di grandezze terrene. Ludovico venne ordinato sacerdote nel febbraio 1296, a ventidue anni, e vescovo nel dicembre successivo. Fu inviato a reggere la diocesi di Tolosa.
Nel ricco episcopato Ludovico, improntò la propria vita alle rigide regole della povertà francescana. Predilesse i poveri, i malati, i giudei vittime di persecuzione ed emarginazione e i carcerati ai quali si recava spesso a far visita.
Ludovico venne elevato agli onori degli altari nel 1318 da Giovanni XXII, presenti sua madre e il fratello Roberto.

Martirologio Romano: Presso Brignoles nella Provenza in Francia, transito di san Ludovico, vescovo, che, nipote del re san Luigi, desiderò la povertà evangelica ben più che le lodi e gli onori del mondo e, ancor giovane di età ma maturo nella virtù, fu elevato alla sede di Tolosa, ma, consumato dalla sua malferma salute, si addormentò presto nella pace del Signore.

Un condensato di grandezza in una vita durata appena 23 anni; il titolo di d’Angiò proviene dalla dinastia angioina, fondata alla fine del secolo IX da Folco il Rosso, signore della antica contea di Angiò; nel 1234 Angiò fu annessa alla Francia dal re s. Luigi IX (1214-1270) e da lui assegnata al fratello Carlo nel 1246.
Carlo I (1226-1285) allargò la grande dinastia oltre i confini francesi, raggiungendo vasti domini in Italia, specie da quando il francese papa Clemente IV, l’aveva chiamato a contrapporsi alla Casata degli Svevi e così dopo averne sconfitto l’ultimo discendente Corradino di Svevia (1252-1268), divenne il signore assoluto di tutto il Meridione d’Italia.
Suo figlio primogenito Carlo II (1248-1309), si unì in matrimonio con Maria, figlia ed erede del re Stefano IV d’Ungheria; da questa unione nasceva secondogenito Ludovico nel febbraio 1274, a Brignoles in Provenza, ma secondo altri studiosi egli sarebbe nato nel castello di Nocera (SA); cosa possibile perché il padre Carlo II detto “lo Zoppo”, era in quel tempo, sia principe di Salerno, sia governatore della Provenza.
Ludovico insieme ai numerosi fratelli e sorelle, cresce educato cristianamente dalla madre, mentre il padre si preoccupa di scegliere per loro validi educatori nelle arti liberali e nelle scienze teologiche e filosofiche; la fanciullezza trascorre in grande serenità tra preghiera, studio, svaghi con i fratelli, passeggiate nei verdi parchi dei Castelli della sua famiglia, in Provenza e in Italia.
Con la sensibilità del suo giovane cuore, si adopera per aiutare i bisognosi, ricorrendo a tutti gli espedienti, anche non confacenti ad un principe, come quello di sottrarre dalle cucine del cibo per i poveri affamati.
Il 5 luglio 1284, durante una battaglia navale nelle acque di Napoli, il padre Carlo II d’Angiò, principe di Salerno ed erede al trono di Sicilia, viene fatto prigioniero da Alfonso III d’Aragona (1265-91) nell’ambito della Guerra dei Vespri Siciliani, in corso fra Angioini ed Aragonesi per il governo della Sicilia.
Verrà poi liberato quattro anni dopo, per succedere sul trono al padre Carlo I morto nel 1285; con il trattato di Camporeale del 1288 Alfonso III d’Aragona gli concede la libertà, ma solo se lascia come ostaggi agli Aragonesi, tre suoi figli, Ludovico, Roberto e Raimondo, insieme a cinquanta gentiluomini del regno; costretto ad accettare, Carlo II però chiese per loro, una educazione confacente al rango di principi.
E il 18 novembre 1288 i tre giovani principi strappati dalla loro casa e dagli affetti familiari, si imbarcarono per la Spagna, facendo una prima tappa nel grande castello di Moncada in Catalogna, dove restarono per un anno, poi dal 1289 al 1293 furono nel castello di Ciurana, nel 1293 per alcuni mesi a Castile e fino alla metà del 1294 a Barcellona.
In quell’anno vennero ricondotti al castello di Ciurana dove rimasero fino al 31 ottobre 1295, quando vennero restituiti, dopo sette anni, alla famiglia. Durante tutto questo itinerante e tormentato periodo catalano, i tre giovani ostaggi, per volere del loro genitore, vivevano insieme a due francescani, Francesco Brun (futuro vescovo di Gaeta) e Pietro Scarrier (futuro vescovo di Rampolla, confessore della regina Sancia) i quali erano valenti educatori; inoltre furono sempre in contatto epistolare con il dotto francescano Pietro di Giovanni Olivi, ricevendone conforto con il suo profondo pensiero.
Tali contatti francescani, avranno un’influenza decisiva sulla vita di Ludovico, nel quale proprio nel periodo catalano, sbocciò la vocazione al sacerdozio, del resto la sua vita fu più intensamente vissuta nella preghiera dei suoi fratelli, con episodi premonitori come la lotta con un grande gatto nero che l’aveva assalito mentre era in preghiera e che Ludovico mise in fuga con un segno di croce.
Nel gennaio 1290 si ammala in modo così grave da sembrare ormai prossima la morte, curato dai due fratelli esiliati e dai gentiluomini costernati del seguito, con i ritrovati più nuovi dei medici si cerca di vincere la terribile malattia, la tisi polmonare; Ludovico si affida allora alla fede in Dio e alla Sua volontà e prodigiosamente guarisce istantaneamente, lasciando sbalorditi gli stessi medici; ed egli confida ai due francescani, la promessa fatta sull’orlo della sua fine, di indossare il saio dell’Ordine di s. Francesco.
Pur se lontano, il padre Carlo II lo segue con trepidazione e alla fine acconsente alla sua scelta di vita religiosa, con qualche perplessità per il tipo di Ordine che è mendicante, poco consono ad un principe.
Nel 1294 a 20 anni papa Celestino V gli permette di ricevere la tonsura ed i primi quattro Ordini minori; già nel 1290 nella piccola cappella della fortezza di Ciurana, aveva indossato l’abito ecclesiastico. Nel 1295 muore il primogenito Carlo Martello suo fratello, re d’Ungheria dal 1292 ed erede del trono di Napoli; in linea di successione Ludovico diventa erede del Regno.
Intanto egli aveva tentato di entrare fra i francescani di Montpellier, durante il suo viaggio di ritorno dalla lunga prigionia in Catalogna, ma non viene accettato perché è un principe reale designato al trono; prosegue il viaggio, dopo aver incontrato i suoi genitori giubilanti e arriva a Roma dove nel Natale del 1295 papa Bonifacio VIII gli conferisce il suddiaconato.
Ripartito da Roma, giunge con i fratelli finalmente a Napoli, sede della Casa Angioina, fra il tripudio del popolo e qui fra il gennaio e febbraio del 1296 egli compie il gesto ufficiale di rinuncia sui diritti del Regno di Napoli e sulle contee di Angiò e di Provenza a favore del fratello Roberto d’Angiò (1275-1343) che governò lasciando una grande impronta della sua grande personalità nel regno, cultore delle lettere è soprannominato “il Saggio”.
Ludovico libero dagli impegni ereditari, si ritira per un breve periodo con alcuni religiosi, nel Castel dell’Ovo sul litorale napoletano, dove trascorre in preghiera e meditazione, la preparazione al sacerdozio. Verrà ordinato sacerdote il 19 maggio 1296 dall’arcivescovo di Napoli, nella basilica francescana di San Lorenzo Maggiore, il giorno seguente celebra la prima Messa nella Cappella del Palazzo Reale.
Ludovico resta a Napoli proseguendo la sua opera di carità verso i bisognosi, fra il rispetto di tutti per il suo stato sacerdotale; interviene presso il padre Carlo II per risparmiare la vita di un centinaio di uomini sovversivi, di una ‘galera’ catturata e il padre accondiscese. Poi da Roma giunge la notizia inaspettata che il papa Bonifacio VIII lo vuole nominare vescovo di Tolosa in Francia, egli corre a Roma per cercare di rifiutare la carica, a causa della sua giovane età, ha appena 22 anni, ma a quei tempi erano altri i criteri nell’assegnazione di cariche così importanti.
Dopo l’insistenza del papa egli accetta solo con la condizione di potersi fare prima francescano e così il 24 dicembre 1296 pronunziò i voti nel convento dell’Ara Coeli di Roma, dove aveva trascorso un periodo di preparazione all’evento, facendo vita in comune con i frati, portando però il saio sotto la veste ecclesiastica, per consiglio del papa, per non turbare la suscettibilità del re suo padre.
Il 30 dicembre sempre del 1296 nella basilica di S. Pietro viene consacrato vescovo dal papa, con una solenne celebrazione, così contrastante con lo spirito francescano di cui si sente pervaso. Poi affronta di nuovo il viaggio fino a Napoli, con varie tappe per non compromettere le sue delicate condizioni fisiche.
A Napoli la regina sua madre, con la corte e una folla festante, gli va incontro per ricevere la sua benedizione episcopale e gli dona l’anello pastorale fatto cesellare apposta per lui. Ludovico ritorna per un po’ nella pace del Castel dell’Ovo per ritemprarsi nello spirito e nel corpo dopo tante emozioni.
Agli inizi del 1297 intraprende il lungo viaggio per la sua nuova diocesi in Francia, facendo varie tappe di cui una al convento dell’Ara Coeli, dove si dice depose solennemente gli abiti ecclesiastici e indossando il saio francescano, suscitando lo scontento del padre.
Si fermò sempre in conventi francescani a Firenze, Siena, Genova, Marsiglia, Montpellier, accolto festosamente dai frati consci del suo rango, che invece lui non voleva ad ogni costo far risaltare. Nel maggio 1297 finalmente arriva a Tolosa tutta in festa per il suo nuovo vescovo e un questa città Ludovico, sebbene così giovane attua il suo ministero episcopale senza risparmiarsi, sempre presente dove c’è da aiutare, senza escludere quanti sono ammalati di mali oscuri probabilmente contagiosi.
Il suo amore della povertà, il suo disprezzo per ogni fasto e vanità mondane, il rifiuto di ogni comodità, il desiderio di seguire le orme di Cristo povero, ne fanno decisamente un francescano della posizione degli “spirituali” in opposizione ai “frates communes”, che costituivano allora i movimenti contrapposti in seno all’Ordine Francescano.
Un mese dopo l’arrivo a Tolosa si reca in Spagna in Catalogna, per riappacificare Giacomo II re d’Aragona, suo cognato perché sposo di sua sorella Bianca, e il conte di Foix. Durante il suo ritorno dalla Catalogna, egli pensa di recarsi a Roma per assistere alla canonizzazione del suo prozio s. Luigi IX re dei Francesi e in piena estate si mette in viaggio, a fine luglio 1297 arriva a Tarascona nella Francia sud-orientale, dove tiene una predicazione in onore di s. Marta e qui apprende che il re suo padre si trova a Brignoles in Provenza e che desidera vederlo ed egli benché molto affaticato per il caldo afoso e per le strade accidentate, vi si reca.
Sempre a dorso di mulo, il cavallo è da lui rifiutato per un incidente capitatogli qualche anno prima, e con alcuni frati, arriva a Brignoles il 3 agosto e s’incontra con il padre, il quale vedendo il suo viso sofferente, lo invita a fermarsi qualche giorno per riprendersi.
Il giorno dopo celebra la Messa in onore della festa di s. Domenico alla presenza del re e della corte, ma già durante il rito si notano i segni del suo pessimo stato di salute; il 5 agosto celebra ancora la S. Messa in suffragio del fratello defunto Carlo Martello; alla sera dopo un malessere, gli sale la febbre alta e da quel momento egli si dibatte tra la vita e la morte, fra lo sgomento del re, dei suoi superiori francescani e di tutta la corte; chiede il 15 agosto il S. Viatico, trascorrono ancora quattro giorni di lotta inutile dei medici contro la tisi polmonare, con Ludovico che affina la sua sofferenza offrendola a Dio, edificando con la preghiera e la sopportazione tutti i presenti.
Il 19 agosto 1297 muore serenamente a soli 23 anni, nella sua città natia, fra la costernazione generale, per suo desiderio viene tumulato nel convento dei Frati Minori di Marsiglia, la cui tomba diventa subito una meta di pellegrinaggi di tantissimi fedeli.
Le sue spoglie rimarranno a Marsiglia fino al 1423, quando per volere di Alfonso V d’Aragona vennero traslate nella cattedrale di Valencia in Spagna, dove riposano tuttora. Tre anni dopo la morte, nel 1300, si avviarono i procedimenti per la sua canonizzazione, che avvenne il 7 aprile 1317, proclamata da parte di papa Giovanni XXII, nella città pontificia di Avignone in Francia.
La sua festa è posta al 19 agosto.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3-07-28

 

Saint Louis of Toulouse 
Also known as
Ludwig of Toulouse
 

Memorial
19 August
 

Profile
Born to the nobility, the son of Charles II of Anjou, king of Naples. Great-nephew of Saint Louis IX, and of Saint Elizabeth of Hungary. Grew up in Provence (in modern France). Spent seven years as a hostage for his father at Barcelona and Tarragona in Spain. Ordained at age 23. Friar Minor. Reluctant bishop of Toulouse, France for the last six months of his life.
 

Born
February 1274 at Nocera, Italy
 

Died
19 August 1297 of natural causes
 

Canonized
7 April 1317 by Pope John XXII
 

Patronage
Valencia, Spain
Mission San Luis Obispo de Tolosa, California
 

Representation
boy bishop
young bishop with a crown by his feet
young man in pontifical garments and holding a book and a crosier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Encyclopedia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Pictorial Lives of the Saints, by John Dawson Gilmary Shea
Wikipedia
MLA Citation

“Saint Louis of Toulouse”. Saints.SQPN.com. 22 September 2010.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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