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동(구 미아3동)성당 게시판

5,18을 맞아...:부활의 노래(문병란)

인쇄

상지종 [sjjbernardo] 쪽지 캡슐

2001-05-18 ㅣ No.6817

 

 

오늘은 5월 광주민중항쟁 21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어느덧 21년전 5월의 처절한 몸부림이 서서히 우리 가운데서 잊혀져가고, 말끔하게 차려진 기념식장에서의 의례적인 행사만이 떠난 임들의 애달픈 삶과 죽음을 더욱 서럽게 만드는 오늘입니다.

 

구조조정의 매서운 칼바람이 이 땅의 선한 민중의 삶을 짓밟고, 21세기의 제국을 꿈꾸는 오만한 망상가 미국의 날카로운 발톱이 일치와 평화를 갈구하는 이 땅의 순박한 백성을 마구 할퀴려는 오늘, 그 날 5월에 떠난 임들을 떠올립니다. 이 땅의 자유와 민주, 해방과 평화를 위해 온 몸을 사른 열사들을 떠올립니다.

 

잊고 싶지 않습니다.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찬란한 승리의 그 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사람과 세상을 완전히 품어 안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오늘 잠시나마 하느님의 손과 발이 되어 쓰러져간 이들을 떠올려보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앞으로의 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돌아보고 자그마한 각오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먼저 가신 임들께 겸손하게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를 들려드립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시는 5.18 광주민중항쟁에서 숨진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그의 생전의 동료 박기순의 영혼결혼식(1982년 2월)에서 낭송되었습니다.

 

 

 

부활의 노래

 

문병란

 

돌아오는구나

돌아오는구나

그대들의 꽃다운 혼,

못다한 사랑 못다한 꿈을 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부활의 노래로

맑은 사랑의 노래로

정녕 그대들 다시 돌아오는구나

 

이 땅에 우뚝 솟은 광주의 어머니

역사의 증언자, 무등산 골짜기 넘어

우수절 지나 상그러이 봄내음 풍기는,

기지개 켜며 일어서는 무진벌 넘어

한 많은 망월동.

이름 모를 먼 주소를 넘어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사는

광주 지산동 광천동

청소부 아저씨네 낡은 울타리를 넘어

주월동 셋방살이 젊은 기사님네

작은 창문을 넘어

정녕 그대들

머나먼 저승의 길목을 넘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끈질긴 잡초 뿌리로 우거지는구나

툭툭 망울 트는 핏빛 진달래로 타오르는구나

 

그날, 5월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너무도 뜨겁고 잔혹했던 달,

산산이 갈라진 목소리에서도

온몸 끌어안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입맞추고 싶었던 사랑,

융융한 강물로 막힌 둑을 무너뜨리었더니!

꽃 같은 핏방울로 어둠을 찬란히 불사르었더니!

 

지금은 다시 얼어붙은 땅

저 잔혹한 막힌 겨울의 어둠을 뚫고

광천동, 양동 다리 밑 넝마주이들의

해진 동상의 발가락 속으로

야학에서 늦게 돌아오는

나어린 여직공의 빈 창자 속으로

그날, 아세아 다방 앞

고아원 구두닦이들의 깨어진 구두통 속으로

목메어 흐르는 시커먼 광주천의 오열 속으로

갇힌 벗들의 사랑이 우는 교도소 철창 속으로

문득 어깨를 치며

여보게! 씽긋 웃음지어 보이던

그 시원하고 큰 눈, 그 서글서글한 눈빛 속으로

그대들은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 곁에 나란히 서는구나

 

퉁겨오르는 새날의 태양처럼

황토땅에 뿌리 뻗는

새 봄의 향그런 쑥이파리처럼

맨살로 꿋꿋이 서 있는 참나무처럼

스스로의 몸을 썩혀 싹을 틔우는

언 땅에 묻혀 겨울을 이겨낸 보리처럼

끝끝내 죽지 않는 뿌리로

빛살을 가르며 날아가는 창 끝,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로

온 천지에 가득한 눈부심으로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의 가슴을 채우는 빛이 되는구나

 

그날, 가시 우에도

맨발의 장미 툭툭 망울을 트고

피 함빡 머금은 모란꽃

송이송이 낙화로 뚝뚝 떨어지던 날

무등산을 안고도 남았던 가슴

온누리를 안고도 남았던 하늘

우리들의 사랑 금남로 가득 벅차게 넘쳤더니!

우리들의 눈물 뜨겁게 샘솟아 타올랐더니!

 

어디에도 남은 가슴이 없는

지금은 엎대여 있는 고난의 거리

비닐공장 여공들의 퀭한 눈동자 속에서

시장 귀퉁이에 쭈그려앉은

생선장수 노파의 눈꼽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부끄러움

우리들의 비겁한 양심 속에서

집없는 혼령들

짝없는 혼령들

붕붕거리는 파리떼의 날개 소리로

수챗구멍 속에 스미는 구정물의 오열로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의 슬픈 노래가 되는구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대들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가

다시 80만 개의 아픔으로 돌아오는

그대들은

갓 사랑하기 시작한

귀여운 누이들의 귓속말

깔깔대는 그들의 밝은 웃음 속에 있고

머리칼 하나 남김없이 가버린

그대들은

절뚝거리는 재봉공의 목발

삐꺽거리는 휠체어의 바퀴 속에 있고

이 땅의 가장 캄캄한 어둠 속

척박한 황토땅에 뿌리 뻗은

한 줄기 꼿꼿한 죽순 속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다시 산다는 것

그날, 캄캄한 허공을 향해 날아간

깨어진 돌맹이 속에 숨어 있고

가슴을 뚫고 날아간 아픔,

어디선가 까맣게 녹이 슬었을

그날의 어둠 속에 숨어 있고

피와 눈물 대신에 마시는

금남로의 타는 목마름

한 젊은이의 목숨을 구한

황금동 여인의 뜨거운 핏줄기 속에 숨어 있다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 하는가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 하는가

목메어 부르는 진혼가의 절규 속에 있다

 

하나는 고향집 양지쪽에 핀

수수한 장다리꽃

하나는 어여쁘디어여쁜 호랑나비

두 날개 쩍 벌려

춘향이와 이도령 상사춤 어우러지듯

꽃과 꽃의 순결한 입맞춤으로

아사달과 아사녀의 속삭임

그 순결한 배꼽과 배꼽의 만남으로

고구려 적 하늘 아래 핀

맑고 고운 진달래꽃 빛깔로

한줌 깨끗한 고향의 흙으로

그 위에 타는 찬란한 저녁노을로

풀 끝에 스미는 한 방울의 이슬로

대장균 우글거리는 광주천의 검은 오열로

돌아오는구나,

돌아와 우리들의 빛나는 사랑이 되는구나

무너진 땅에 다시 봄은 오는데

가시 위에도 맨발의 장미,

칼날을 딛고

또 피를 먹은 장미, 5월의 장미는 피어나는데

콕콕 찌르는 가시로 오는 임!

소주 속에 스미는 독한 향기로 오는 임!

얼큰한 고춧가루 매운 눈물로 오는 임!

역천하는 배반의 땅 위에 누워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혼령이여

총각귀신

처녀귀신

집도 없고 짝도 없는

오오 구천을 떠도는 무주고혼이여!

 

오늘은,

깨끗한 혼과 혼으로 만나

이 땅을 끌어안고 입맞추는

한 줄기 고요한 바람이 되거라

저 미치게 푸른 하늘 아래

꽃과 꽃의 맨살로 만나

오늘은,

잠들지 못하는 땅의

찬란히 타오르는 한 줄기 노을이 되거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 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5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