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그녀의 지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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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1-15 ㅣ No.5539

 

언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습니다.

입구부터 걸어서 10분쯤 걸리는 언니네 집.

그 주면에 지하철이 뚫리면서 역 가까운 곳 주민들에게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출근시간이면 이웃 아파트 주민들이 입구까지 차를 몰고 와서 아무데나 세워 놓고 가 버리기 때문에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 언성을 높이고 다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해요. 조처를 취하자구요."

주차공간을 배앗긴 주민들은 참다 못해 동별로 주차금지 경고장을 만들고 단속반을 정해 순회단속까지 나섰지만, 무단주차를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런 걸 붙이고 그래?"

"이 사람이 어디다 삿대질이야!"

고작 몇 분 걷기가 귀찮아 차를 남의 아파트에 주차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같은 단지 사람끼리 너무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언니네 집에 놀러 갔다가 주차공간을 찾던 나는 몇 바퀴를 헤맨 끝에 현관 바로 앞 로열박스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와.. 제일 좋은 자리네."

웬 횡재냐 싶어 얼른 차를 세우려고 하는데, 베란다에서 보고 있던 언니가 허둥지둥 뛰어내려왔습니다.

"얘.. 얘, 여기는 안돼! 여기는 주인이 있다고."

"뭐? 주인이라니 이 자리만 누가 샀어?"

"암만 말고 일단 차 빼."

자리에 이름이 써 있는 것도 아닌데 언니는 다짜고짜 차부터 빼라고 야단이었습니다.

겨우 빈틈을 찾아 차를 세운 뒤 툴툴대며 돌아서던 나는 그 빈자리로 차 한대가 유유히 들어서는걸 보게 됐습니다.

"어? 저 차는 뭐야?"

잔뜩 못마땅해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차에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자, 내려야지."

사연인즉 매일같이 뇌성마비 아들을 등하교시키는 3층 아줌마를 위해 이웃들이 언제부턴가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그녀의 지정석으로 비워두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아이의 엄마가 언니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언니도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여긴 저 아줌마 지정석이야."

"아! 난 또... 진작 말하지."

주차공간 한 뼘 때문에 싸우고 헐뜯고...

전쟁을 벌이는 도시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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