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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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옥 [yimariaogi] 쪽지 캡슐

2007-10-08 ㅣ No.7714

 
 

묵주 기도 성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글 :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이 사람과 단 하루만 살아도 좋다. 내가 어릴 때부터 꿈꾸어 왔던 사제의 꿈은 접었지만 나는 이 여자를 택함으로써 내 삶의 제2의 사제직으로 삼고 싶다!" 이 말은 사제 서품을 막 눈앞에 둔 저에게 저의 오랜 친구가 혼인 주례를 부탁하며 던진 말입니다. 그 친구는 더 이상 수도 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한 암이 발생하여 투병 중에 있던 여인을 만나, 그녀를 돌봐주고 함께 하겠다며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결혼을 선언했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어린 시절 미사복사를 하며 사제가 되자고 약속을 했던 사이입니다. 사춘기가 되어 둘 다 똑같이 방황을 하며 어린 시절의 꿈을 접었다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훨씬 나이가 든 뒤에야 저만 사제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의 사제 서품을 기다렸다가 마치 제2의 사제 서품을 받듯 미래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혼인을 하는 두 남녀를 향해 사춘기 때 읽었던 헤르만 헷세의 소설 "지와 사랑"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설은 고고하고 이성적이며 사색가인 나르치스와 예민한 감각과 감수성을 지닌 골드문트라는 상반된 두 주인공의 세계를 통해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갈등과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이들 주인공들이 수도원에서 만나 같은 길을 가는 듯하지만, 이내 골드문트는 아름다운 집시여인을 만나면서 수도원을 떠나게 됩니다. 부단하게 수도생활을 해 가는 나르치스와는 달리 골드문트는 속세에 살면서 숱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관능적 사랑 뒤에 맛보아야 하는 인생의 무상함, 배신과 고독, 굶주림과 추위, 죽음의 위험과 공포........ 온갖 인생의 쾌락과 절망을 맛보며 골드문트는 삶의 본모습을 깨달아 갑니다. 그는 어느 성당에 있는 아름다운 성모상을 보면서 만물을 품고 있는 인류의 어머니 이브에 대한 상(像) 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조각가가 되어 자신의 어머니의 형상을 그린 사랑의 어머니 성모상을 조각합니다. 나르치스가, 세속에서 온통 삶과 씨름하다가 마침내 예술가로 승화한 골드문트를 통해서 위대한 한 인간상을 보았다면, 골드문트는,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나르치스와의 영적 교감을 통해서 삶의 참된 가치에 대한 갈망과 영적 위로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이 소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세속적 욕망과 유혹을 견뎌내며 냉철한 수도자로 살아온 나르치스도, 인생의 희노애락을 철저하게 맛보며 살아온 골드문트도 결국 인생의 참모습을 추구하기 위한 여정임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우리 삶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그날 강론을 하면서 우리들은 이렇게 서로의 길은 달라도 분명 하나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얼마 전 참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똘망똘망한 두 아들과 건강을 되찾은 아내와 서울 근교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길을 가면서 마치 중간 점검이라도 하듯 만나서 서로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매일 같은 일을 하고 지내는 사이처럼 우리들의 대화에는 아무런 허물도 거리낌도 없었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그가 어릴 적 꿈꾸었던 사제직을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통하여 살도록 이끌어 주고 계셨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혼자서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 그 친구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해 본다면 누가 더 행복한 것일까?" 사제가 되어 많은 가정들의 속사정들을 들으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홀로 사제의 삶을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가정이란 굴레에 갇혀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단란하게 보이는 가정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안고 살아야 할 숱한 아픔과 상처들이 배어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자녀문제 가족문제 부모문제 등 가정 안에 실타레처럼 얽혀있는 관계 안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가정은 거대한 세상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아서 파도 속에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단란해 보이는 친구의 가정도 예외 없이 이런 파도 속을 헤치며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어려움과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 고통보다 이를 능가하는 더 큰 은총의 선물들이 함께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자녀들이 있고 내가 온전히 사랑해 줄 배우자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눈에 보이는 그 누군가를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허공에 손을 내지르며 사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메아리도 없는 허허로운 벌판에서 소리를 질러대며 사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고 진정으로 사랑할 대상도, 붙잡고 있을 삶의 알맹이도 없어 보입니다. 그냥 바람처럼 살아가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미소 한번 보내주며 살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이 자유가 사제들의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사제에게는 오로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씨름만이 삶의 가장 큰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사제가 되고 싶어 갈등을 하던 한 청년의 혼배주례를 했습니다. 그 미사에는 어릴 때부터 절친하던 신랑의 친구가 막 사제가 되어 저와 함께 혼배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또 한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이야기를 보는 듯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제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세파를 헤치며 노를 저어야 하고, 또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씨름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살아야 합니다. 한편에서는 운명처럼 주어진 가족을 부등켜안고 살아야 한다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허허로운 벌판에 부는 바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이 어느 것 하나 쉬워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어떤 삶이 더 행복한가 묻는다면 '무엇을 하며 사느냐?' 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있느냐?' 에 대한 대답입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질문을 한다면 '네가 선택한 삶이 옳았느냐?' 가 아니라 '네가 선택한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 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제가 선택한 삶을 통하여 주님 당신을 깊이 만났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복잡한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 말씀지기에 실린 편집자 레터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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