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2/10/01 성모신심미사 10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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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9-12 ㅣ No.5160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2/10/01

성모신심미사 10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말씀 성전에서 찾으심(루카 2,40-52)

2 40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41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내 어머니

중학생 때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청소년 적십자단(JRC/RCY)의 전국 단위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하루 전 날 부속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주일에 열릴 체육대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우리가 거기서 연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저를 찾아 학교에 전화를 하셨고, 전화로 해결이 되지 않자 급기야는 교무실로 쳐들어(?) 가셔서는 발칵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제게는 '어련히 알아서 들어오겠지!'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체육대회는 참가하지 못했고, 그날 이후 선생님과 선배 동료들의 배려(?)속에 '학교--학교'만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노동청년들의 아픔을 듣게 됩니다. '부모 손을 잡고 공원에 가서 놀다가', '부모님인줄 알고 잘못 따라가다가', '부모님과 떨어져 철도에서 잘 못 내려서' 등등의 이유로 부모와 헤어져 자라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뼈아픈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아이나 그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님에게는 애간장이 타는 순간들이 있었겠지요.

 

여러분들도 부모님을 잠시나마 잃어버리신 적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시절이 있으신지요?

 

 

우리 어머니

잃어버림과 찾으심

마리아는 오늘 그야말로 애지중지 키우던 아들 예수를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루카 2,43-45)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 엉뚱한 곳에 신경을 썼기에 아이를 잃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없어집니다. 주일학교나 어린이집에서 교사들에게 그렇게 주의하라고 해도, 가끔 아이를 잃어버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잃었다가 찾은 이야기를 들으면 웃으며 회상하고 떠들지만, 그렇게 잃어버린 아이는 그 부모에게나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나 평생 가슴에 맺힐 듯싶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것도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니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우리와 문화가 다르긴 하겠지만 일가친척이랑, 또래의 아이들끼리 돌아다니는 것도 한도가 있을 텐데 밤에 아이를 데리고 자지도 않았는지, 그것도 객지에서. 성경 기자가 말한 하루가 한 나절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모는 사흘이 지난 다음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냅니다. 그나마 다행이겠지요. 아예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니.

 

지혜의 원천이신 소년 예수

그렇게 마음을 졸여가며 예수를 찾았건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보인 아들 예수의 모습은 의외였습니다. 부모를 잃고 먹을 것도 없어 몰골이 누추하고 처참했으리라는 기대와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부모 잃은 여느 아이처럼 조급하고 불안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상하리만큼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6)

 

예수의 부모는 다시 찾아낸 아들의 상태에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들 예수는 미아 보호차원이 아닌 대접받는 분위기였으니 의아해 했으리라.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47)

 

하긴 장님 코끼리 만지는 듯한 인간의 하느님 이야기와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의 대화가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아버지의 집인 성전

예수의 부모는 그의 역할과 분위기보다는 우선 그의 안위가 걱정이 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

 

조급한 그 어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 예수의 반응은 적반하장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49-50)

 

예수의 부모에게는 잃었던 아들 예수를 찾은 안도감 이외에,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나갔을 때였습니다. 아파트에서 임시 성당까지 출퇴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파트는 독신자, 특별히 사제가 살 곳은 아닌 듯싶었습니다. 방음도 안 되고, 매일 방역에 반상회 안내에 각종 방송과 잡상인들의 출입으로 불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앙난방식이었는데 주로 8시경에 불을 넣는지, 제가 성당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10시 이후에는 썰렁하고 온기가 다 빠져나가서 그런지 추웠습니다.

 

그러다가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성전 옆에 그나마 조립식으로 지은 사제관에 들어가서 첫 날을 누웠는데 아주 푹 잤습니다.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주님 성전 옆에서, 성체를 모신 성전 곁에서, 성당 구내에서 사는 것이 사제인 제게는 그렇게도 행복했습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듯싶었고, 주님의 집에서 산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만큼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지 않았지만, 비가 오면 비 떨어지는 소리가 지붕에서부터 메아리 쳤지만 평안했습니다. 피정이나 연수로 밖에 나갔더라도 밤이 되면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예수님도 자신의 온 생각과 신경이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평안한 아버지의 집

여행을 가서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와 아침에 침대에 누워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것을 맞이하는 기쁨도 좋지만, 어딘지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반뇌의 성모 피정의 집처럼 고급은 아니어도 정갈하고 소담한 그리고 무엇보다 경당에서 기도할 수 있고 성체 앞에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제겐 더 좋고 편안합니다. 집 같고,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을 모신 곳, 그곳이 우리 집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는 곳이 정말 편하고 좋으십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에게 진정 낙원입니까?

여러분 마음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성당이 그렇게 편하고 좋으신지요? 에덴동산은 아니더라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계신 뜰 안에 있다는 느낌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과도 같은 푸근한 곳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느낌 때문에? 마치 저 아래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을 위층 제 방에서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처럼, 주님께서 어디선가 나를 흐뭇한 미소로 내려다보고 계시다는 느낌 때문에?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으면, 그 어느 곳에서보다 평안하기 때문에? 주님의 자녀인 내가 아버지 주 하느님의 집에 있기 때문에 그리도 평안하신지요?

 

리지외의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는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저의 하느님,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때를 채우며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셨기에 그것도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자녀로 태어나셨기에 부모님을 존중하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그분은 인간으로 살아가야할 세상의 처세술을 부모님에게서 배우셨습니다. 마치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일 때까지, 그분은 인간 세계에서 때가 찰 때까지 인간의 아들로 나셔서 겸손하게 인간사를 차곡차곡 채우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때를 기다리시며, 하나하나 준비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무르익어 가셨습니다. 때가 올 때까지, 때를 채우고 만들어 가면서. 어머니는 그런 아들 곁에서 마치 앨범에 사진을 붙이듯, 아들의 성장을 하나씩 마음속에 담아두십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2)

 

 

기도

'늘 아버지의 집을 그리며 인간 구원을 위해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던 주 예수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우리에게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허락하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과 사회를 존중하고 익히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아이를 잃으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 예수를 찾아 나서신 성모 마리아님, 세상에서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부모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아들 예수의 남다름을 마음속에 간직하신 성모 마리아님, 각자 다르게 만들어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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