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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나를 보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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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 [arahat] 쪽지 캡슐

2000-02-21 ㅣ No.426

너에게 나를 보낸다(1)

- 성체, 그 나눔의 결정체

 

 

"유난히 신과 종교를 많이 접하는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다.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여 각각의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을 상정해온 나는 최근 내 신앙의 영역이 침범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어 혼란스럽다. 믿음 속의 신과의 비밀스런 만남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의 신들이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 1993년 일기 중에서"

 

난 한때 성체를 영하지 않은 적이 있다. 내 자신이 성체를 모실 자격이 없다는 생각때문에 또, 성체를 영하는 다른 신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써 난 미사에 참석하더라도 성체를 영하는 시간에는 그저 뻘쭘하게 자리에 앉아있곤 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회의와 종교에 대한 가치 상실, 뭐 그런 것들이 이유였던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성체를 모실 수도 있었지만 내 마지막 남은 양심이 허락하질 않았던 걸 보면 그래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예수님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대학교 신입생이 겪어야 할 수많은 일들로 바빴던 나에게는 특별히 다시 신앙에 대해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나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많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그해 여름, 주일학교 어린이 캠프가 무사히 끝났다. 다음날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미사에 참석했고 다시금 영성체 시간이 다가왔다. 난 그냥 성가를 부르며 앉아 있었는데 무심코 내 앞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한 어린아이를 보는 순간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성체는 나눔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나눠 주시는 것이다. 비록 내가 죄인일지라도, 그 분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엄청난 죄인일지라도, 그 분은 내가 그 분이 주최하는 그 나눔의 자리에 함께 하는 기쁨조차 빼앗지는 않으실 것 아닌가. 그 분은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신데."

 

다시 말해 나에게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있어 그 분의 몸을 받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저의 몸을 나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였다.  죄 지은 자이기 때문에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지은 자이기 때문에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잔치에 부름받고 갈 수 있다는 진리였다. 그 분에 대한 회의로 번민하는 나같은 이방인에게 조차 자신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그 사랑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다음주 나는 동생들과 함께 혜화동 성당에 갔다. 혜화동 성당은 분위기가 엄숙하고 또 의자 아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대가 있어 그 분 앞에 가장 겸손한 자세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그 분이 주시는 몸의 일부를 받아 먹고 혀에서 녹아 흐르는 성체가 완전히 내 몸과 하나가 되기까지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조금 흘렸다. 동생들 보기가 부끄러워 닦아낼 수는 없었지만 굳이 닦지 않아도 참 좋은 느낌이었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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