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사순 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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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웅 [mathias] 쪽지 캡슐

2004-03-23 ㅣ No.2944

사순 4주일

루가 1-3.11-32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찬미 예수님

 

우리는 오늘 복음인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여러 등장인물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돌아온 작은 아들. 둘째로 동생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큰아들. 셋째로 그냥 방관자처럼 보이는 종들의 모습.  넷째로 돌아온 작은 아들을 보고 너무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이 네 인물 중에 누구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등장하는 네 부류의 인물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주인공은 돌아온 작은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숫한 고생 끝에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아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아들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을 제공한 그 무엇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돌아갈 곳. 만약 작은 아들에게 있어 자신이 돌아갈 곳인 아버지의 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돌아가야 할 집에 자신을 미워하는 형만이 있었다면 작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현대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됩니까?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이 상황. 심지어 희망이라고는 고사하고 자신이 돼지보다도 짐승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무엇을 선택합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단지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힘듦을 없애기 위해서. 그 길이 쉬운 길이라 선택하여 바로 다름 아닌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상을 그들은 왜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형제, 자매 여러분 그 때 가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런 작은아들이 그 힘든 결단의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작은 아들의 그 결정은 호의호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존에 누렸던 자신의 원 자리를 다시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종의 모습이라도 아버지 곁에 있고 싶다는 간절한 심정이었습니다. 단지 아버지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어찌 보면 작은 아들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이 결단은 죽기보다도 더 힘든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 특히 자신을 벌레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형님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들이 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의지력이기보다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자신도 몰랐었지만 아들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존재합니다.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우리가 느끼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랑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끝없는 아버지의 사랑. 한 번도 자신의 의향을 꺾지 않으시고 심지어 당신의 전 재산을 달라고 해도 거부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든 말든 자신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아버지의 사랑보다도 세상의 쾌락일 뿐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모습과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못난 아들이 떠난 후에도 그 아들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아들이 떠난 이후 한 시도 편히 쉬지 못하시고 매일같이 동구 밖에서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들은 세상의 쾌락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까마득히 잊었을지라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당신의 가슴속에 당신의 심장 속에 당신의 뼈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잊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완전히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그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오직 아버지만이 그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눈은 인간 육체의 눈이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의 눈, 아버지의 마음의 눈이었습니다. 아들의 발소리만 들어도, 아들의 숨소리만 들어도 당신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우리 부모님의 사랑의 눈이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 아버지 하느님께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 드렸습니까? 그런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해 드린 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품으로. 이제 더 이상 그런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을 괴롭혀 드리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저는 한 번도 냉담한 적이 없었는데요. 저는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는데요.” 이는 오늘 복음상의 어떤 아들의 모습과 똑같습니까? 어찌 보면 오늘 날 우리들은 회개하며 돌아온 작은 아들이기보다는 이렇듯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투정만 하고 있는 회개하지 않는 큰 아들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는 나에게는 그런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시고 천벌 받아야 할 저들에게만 은총을 베풀고 계시는가? 왜 벌레만도 못한 내 동생만을 사랑하시는가? 내가 하느님께 잘못해 드린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렇듯이 우리들은 응당 하느님께 더욱 많은 것을 받아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분께 해 드린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몸이 분명 아버지 하느님 곁에 교회 안에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더욱 중요한 우리의 알맹인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중요한 마음은 이 세상에 다 바치고 혹시 빈껍데기인 몸만이 아버지 하느님께 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런 작은 아들도 그런 큰 아들도 다 당신의 품에 품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 모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작은 아들인가? 큰 아들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다시 그분의 품으로 돌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 돌아감은 단순히 우리의 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돌아감은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품으로. 무엇이 모라자 하느님께서 우리를 계속 기다리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단지 우리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없이 한없이 눈이 멀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냥 영원히 기다리고 계실 거라 생각지는 마십시오. 기다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끊임없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죄인임을 고백하며. 품꾼으로라도 쓰셔도 좋으니 아버지 품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청하며. 우리의 행복은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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