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성당 게시판

[청년] 퍼온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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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greendw] 쪽지 캡슐

2000-03-17 ㅣ No.3132

†찬미예수님

 

나이든 거 티내는지.. 이런 시가 마음에 와닿는군요.

통신에서 본 시입니다만..

공감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좋겠네요. ^^;

...있을까요...?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 지 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이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힌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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