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신부님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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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bok1] 쪽지 캡슐

2001-06-21 ㅣ No.2531

청소를 하다 언제 읽었는지 모르는(혹 결혼초인지) 누런책 한권이 나의 마음을 이끌어 읽고 또 읽고 너무나 감명 깊었기에 올려 봅니다.

 

카톨릭 문학인 수상집 신앙의 길목에서 수필가 고종옥 신부님

<샘터에서>

 

1968년 7월 말 내가 보좌신부로 일하던 "쌍 루이 드 프랑스" 본당 대학생회 회원중 25명의 남녀 대학생을 데리고, 호수 맑고 풍경 좋기로 이름난 "로 오렌숀" 지방에 가 신심수양을 겸한 캠핑 피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그 지방에서 제일 높은 몽불렁 산정을 등반하기로 했다.  무던히도 더운 날이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얼굴들이 붉게 그을렸고, 땀을 흠뻑짜낸 몸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산에 가면물이 잇으려니 생각하고 물 준비를 소홀히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산허리를 끼고 한참 돌다가, 물은 없어도 습기가 있은 도랑을 하나 발견했다.  이 도랑을 마라 오르니 바위 뿌리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수줍게 새어나와 나뭇잎이 떨어져 썩어 있는 풀숲 사이로 흐르는 조그만 샘터가 있었다.  우리들의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를 합쳐 26명이 줄지어 한명씩 차례로 타오르던 갈증을 풀기 시작했다. 물은 마시기 위해선 습기찬 땅에 엎디어 가만히 조심성 있게 마셔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흙탕물과 썩어가는 나뭇잎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타 오르던 갈증을 달랜 것만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으나, 물맛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었다.  흙가루와 나뭇잎 조각을 들어마신 성미 급한 학생도 몇 명 있었다.  "물맛이 왜 이꼴이람 흙탕 물 맛이야 아니 나뭇잎이 썩은 거름 맛이야. 샘터가 될 바엔 좀 크고 분수처럼 맑은 물을 내뽑는 것이 못되고 요모양 요꼴이람" 등등의 비판과 불만이 몇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때나는 본질적으로 긴급한 갈증을 우리에게 해소시켜 주었으되 비판과 물만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초라한 샘터와 내 사제생활을 비교홰 보았다.  의식적으로 비교한 것이 아니라 무심중에 우연이나 마치 필연히 결과 처럼 내 사제 생활을 이 샘터에서 비교해 보고 일종의 두려움 같은 것을 느겼다.

 

신자들은 나를 신부라 부르며, 하느님의 대변자 혹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 등등의 대명사로 거의 신격화 시켜 대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들 신부들은 볼 수 없는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의 존재를 사제적 삶을 통해 증명해야 하며 또 그분이 계시한 인류구원을 위한 진리와 사랑의 말씀을 설교하는 대변자가 되어야 한다.

 

"무릇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를 끈어 버리고 각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우리들 신부들도 인류 복음화에 기수로서 <골고다>의 언덕을 하루하루 걸어 올라 가야만 한다.  영원을 찾아나선 이 나그네길 이 인생로상에서 신부들은 거리 교차로에서 위험과 안전을 알려고 교통질서를 유지하는 신호등처럼 남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이 올바고 안전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충실한 신호등이 되어야 한다.  폭풍우가 휘몰아 치는 암초 지대를 항해하는 뱃사람들에게 한 줄기 삶의 희망을 던져 주는 등대처럼, 신부들은 경우에 따라 있을수 있는 절망이란 유혹속에 허덕이는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적 성총의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성경말씀대로 신부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성부 완전하심과 같이 여러분도 완전하십시오"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신부들은 만사에 완전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사제생활을 반성할 때 나도 남들처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많은 결점과 불완전성을 지닌 어쩔수 없는 모순 덩어리의 인간임을 나 자신도 부정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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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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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로서 성무일과를 마치고 사제적 사명에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았을 때 어떻든 하루를 무사히 지냇다는 안도감에 앞서, 이것이 나였나 하는 섭섬함이 가져다주는 사제직에 대한 두려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동적 숙명인 불완전과 제한성을 면치못한 인간인데 남들은 내가 신부익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흔히 받아주지 않고 또 용서해 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인간인 내 힘에 겨운 것을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  때로는 천사같은 순수함을 꿀같은 달가움을 물같은 무색과 겸손을 불길 같은 사랑과 정열을 어버이 사랑 같은 너그러움과 희생을 하늘간츤 넓은 마음과 아량을 봄바람 같은 부드러움을 산같은 위엄과 무게 등등을 우리들 신부들에게 번번히 기대하고 있다.  

 

물론 신자들은 신부에게 이상과 같은 기대를 걸 권리가 잇고 신부들은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내 사랑과 남들을 위해 성심성의 봉사 하자는 내 마음의 자세는 서로 무한과 산통한다. 하더라도 나도 역시 한정된 지능과 노력을 제한하는 육신을 가진 한 인간의 숙명적 조건을 떠날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희노애락의 감정과 삶의 주변환경에 영향을 아니 받을수 없는 연약한 한 인간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참을 찾는 부단한 노력과 선을 향한 마음가짐과 삶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내 양심껏 떳떳히 살자는 내 사제적 인생관도 인간이란 이조건과 이현실 앞에 종종 상처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같이 잘해주고 공평해야 된다. 그럴수 없는(나) 라는 인간조건,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으며 피곤할때도 고독할때도 화날때도 슬플때도 만사가 성가실때도 있는 한 인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백사람 이면 백가지 다를수 있는 취미와 기대에 따라 나를 이리저리 <요리>하고 비판하며 자기들의 편협한 주관성에 인간신부인 나를 예속시킬 때 너그러운 인내로 그들을 용서하고 교육시켜야 한다는 사제적 사명감 보다 인간성에 대한 환멸이 앞서기도 한다.

 

위와 같은 상황이 가져오는 시기와 환경에 따라 무식해도 유식한척 해야 하고 슬퍼도 즐거워 해야 되고 실어도 좋와 해야 되며 울고 싶을 때 웃어야 되고 화가나도 참아야 하며 억울하게 무시 당해도 <화풀이> 없는 축복을 해야될,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나> 가 없는 이런 생활이 사제생활 이란 것을 모르고 지내온 것은 아니었으나, 의무에 대한 마음의 부담과 노력의 한게를 가진 이 몸 때문에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 할 때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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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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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연의 생활양식인 결혼과 가정을 떠나 홀로 사는 고독이 우리들 신부생활에 있을수 있는 제일 큰 고통일 것이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인간적 고독도 무시할수 없으나 이런 고민은 신부들에게 -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 있을수 있는 제딜 큰 고통은 아니다. 신부인 나에게 가장큰 고통은 그것은 다름아닌 신부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선을 권하고 사랑을 설교하나 내가 말하고 권하고 설교하는 진리와 선과 사랑대로 생활 못하는 나임을 시인할 때 느끼는 고민이 제일 큰 고통이다.

 

우리들 신부들이 설교하는 진리와 선과 사랑은 영생을 향한 인간의 이상이다.  그리고 이 이상을 질과 양대로 실천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이 사실앞에 나 자신을 다소 위안할수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이런 고통 때문에 신부란 이현실을 솔직히 떠나라는 유혹을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할수없고 내 인간적 힘에 겨운 것을 남들에게 설교하고 권하고 훈계하는 바로 거기에 위선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위선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이 제일큰 비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힘을 초월하는 이 진리와 이선과 이 사랑과 이 정의의 창조자가 아니다.  

 

따라서 나 자신을 기준해서 남들에게 이 진리와 이 선과 이 사랑과 이 정의를 설교해서는 안된다.  나는 사제로서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계시하신 이 진리와 이 선과 이 사랑과 이 정의를 있는 그대로 설교 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럼 이 사제적 사명감과 나 라는 인간 조건과의 조화는 ?  그것은 노력할 뿐이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성내고, 억울한 무시나 중상을 받으면 신부란 이 입장 때문에 마지못해 참아받는 <인간적 위선자>가 되기 보다는 설혹 웃고, 울고, 성내고, 욕하고, 때려부수는 인간으로 남아 있을 망정 할수 있는 대 까지 성실히 노력할 뿐이다.  이 인간적 노력에도 한계가 있고 앞으로 내가 신부로 살아가는 동안 사제적 의무에 모순된 인간적 실수와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나로서 할수 있는데 까지 열심히 노력하자는 마음에 자세를 가질 뿐이다.

 

<그래 이 노력과 이 성실뿐이야... > 신부로서 서품된지 벌써 10여년 날이 갈수록 신품성사가 나에게 부과시킨 성모를 수행하긴에 아직도 지혜있어 우둔하고 시계있어 첨박하고, 수양에 있어 부족함이 많은 나를 발견한다. 강론 할 때나 고백성사를 줄때마다 내 연약한 두 어깨에 지워진 성직의 무게에 땀 흘리는 나다 <신부님> 하고 부름을 받을때마다 느껴지는 책임감과 만사에 있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인간됨을 냉정히 저울질 할 때 가슴속이 화끈 타오르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워 진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같고 또 <천지는 변해도 내 말은 변치 안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방패삼아 그분이 세우신 사제직의 이상을 향해 가고 또 갈 것이다.  하여튼 내가 신부라 할지라도 나는 예수님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과 같이 될 수도 없다.  나는 결국인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와같이 진실될수 없는 이 인간 조건에다 성실이란 인간적 진실성인 자아양심을 앞세우고 나는 사제로서 성심성의 봉사하며 살아 갈 것이다.  <그래 이노력과 이 성실 뿐이야..> 샘터에 앉자 내 사제 생활을 반성하고 있는 동안 우리 일행은 다 물을 마셨다.  그리고 노래 부르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 남아 있던 여학생 드니스가 손에 들고 있던 야생화 몇 포기를 그 샘터에 놓는 것을 보았다.  그 감사로운 마음씨가 퍽이나 아름 다웠다.

 

앞선 사람들을 뒤따르며 나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니스 우린 어떤 존재가 우리 생활에 꼭 있어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으나 그존재에 대한 올바른 가치 판단과 이해와 고마움을 모르고 지내는 수가 흔히 있지 드니스의 마음은 아름다워 이 샘터를 대신해 내가 감사해요"

 

"그런 점에서 특히 신부님들의 생활이 어려우실 꺼예요 신부님들도 인간인데...  어떻든 샘터가 되셔야할 신부님들의 성직생활이 힘드실 꺼예요"  그녀는 동정과 감사의 정이 조화된 미소를 입가에 조용히, 나직히 또 작게 말했다.  신부들의 성직생활에 샘터가 되야 한다는 드니스의 말은 내 마음에 사무쳤다.  물론 우리들의 사제생활은 예수님의 복음적 진리의 샘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진리의 샘터라는 신부들의 당연한 사명만은 드니스가 지적한 것은 아니다.  샘터와 같은 무사무욕한 사랑과 너그러움과 겸손을 신부들은 일상생활 안에 본 받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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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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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람에겐 자기를 비판하고 불만하는 사람들까지 누구나를 구별하지 안코 공평하게 물을 제공하는 이샘터의 사람과 너그러움, 그리고 아낌없이 주되 그어떤 보수를 바라지 않는 이런한 겸손을 신부들은 본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기대하지 말라 내힘껏 봉사하되 그 대가를 기대하지 말라 인간에게 기대를 걸면 기대한 그만큼 실망이 뒤 따르는 법이야 그리고 가난해도 남에게 금전적인 면에서 신세를지지 말라 남에게 신세지면 그 값만큼 신부로서 가져야할 자유를 그에게 뺏기는 법이야 <자선을 배풀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십이요 마태오 6장 4절> <당신들도 명령대로 모든일을 다 하고 나면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 하시오 눅가 17장 10절> <당신들 중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온 것입니다.  마태오 20장 26 - 28절>

 

예수님이 위에 말씀을 묵상하고 내 일상적 사제생활에 본 받으라 남달리 정적인 내 인간성과 정렬적인 내 성격과 바보 스러울 만큼 낙천적인 내 단순성과 나 자신을 믿고 위험을 감행하는 모험심과 어려움 앞에 노력을 방패 삼아 덤비는 내 미련한 성미를 잘알고 있던 신학생 시절의 내 영적 지도 신부가 종종 내게 한 말이다.  그분은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태오 나는 운명론 자가 아니야 그러나 사람에겐 운명적인 것이 있다네 자네는 성격상 남을 도와 주고 사랑하지 안코는 못 견딜 사람이야 그러나 자네는 자네가 남을 도와주고 사랑한 그만큼 사랑과 도움을 못 받을 사람이네 이점은 자네가 인간으로서의 결점이 있어서나 또는 신부로서 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이 세상 인심이며 또 삶은 위한 기술과 타협을 거부하는 자네의 고집과 생활관 탓이네 앞으로 목자로서 한 교회를 운영하고 신자 상호간에 친목과 우위 조성을 위해 기술과 타협이란 정치성적 방법이 필요할 것이나 이러한 방법을 개인 생활면에 응용 해서는 안되네 그리고 자네 다운 단순한 인간성을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며 의무앞에 비겁과 타협않는 자네 다운 행동 뒤에는 남들의 오해가 뒤 따르기 쉬울 것 일세.  너무나 인간적인 자네의 마음과 자네다운 신부로서의 생활관 과의 갈등속에 도 자네에 대한 남들의 이해부족 속에 자네는 무던히 고민하며 고독하게 살 사람이야.

 

그러나 자네는 이상을 위해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고독한 법 이니까... 인류 구원이란 절대적 이상을 위해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그 처럼 사랑하던 백성으 아해 부족과 불신 속에 고독하게 살으셨고 끝내는 십자가 위에서 홀로 죽으셨으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부활이란 승리를 가져왔고, 전 인류에게 구원의 문을 열러 주셨듯이, 앞으로 자네가 겪을 사제적 고통과 고독은 이웃 형제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밑거름이 될 걸세. 마태오, 우리 신부들이 할 일은 끝까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뿐이야. 신부로서 세속에 나가 일할 때 오해와 배신속에 인간을 의심하고 끝내는 인간성의 <더러움> 에 환멸을 느껴 자네 자신까지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는 신부라는 <현실>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을 걸세.  이런 일은 신부라면 누구나 다 몇번 겪어야 할 인생과정 이니까.

 

하지만 실망하지 말고 인간을 사랑하게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이 인간 예수님게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 취하셨던 이 인간성, 그 분의 죽음의 대가로 부활하고 영생을 얻어야 할 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존귀한 것이야 마태오 인간을 미워하지 말고 끝가지 사랑해

 

여태까지 신부로서 살아온 내 인생 정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계절을 따라 피는 꽃처럼 가지각색의 사람들리 단조롭고 때로는 고닾프기만 한 내 인생 정원을 방문했고, 거듭되는 위스키 잔 속에 인생을 토론하며 핢의 휴식을 잠시 같이 지낸 벗들도 있었다.  어떤때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기도 했으며, 시집살이오ㅘ 같은 남의 성당에 사는 내 입장을 곤란케 한 염치 없던 친구도 있었다.  나를 욕한 사람들 보다는 나를 좋아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생각된다.  

 

내가 없었더라면 벌서 자살해 버렸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동안 이민 교포지도 신부로서 휴가 한번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이민국으로 재판소로 심지어는 감옥으로 병원으로 직장을 구하려 처녀 총각을 위한 복덕방 문제로 불쌍한 신세가 된 처녀, 어머니를 보호하려 아가씨를 농간하는 불량배와 맞서 싸움하며, 할 일없이 지내는 살람의 지루한 말동무로, 뻔히 아는 일에 속아주며, 고독한 친구의 술동무에 이르기까지 남을 위해 살아온 것 같은 내 삶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의 고종옥 이란 인간에 이간 대 인간의 관심과 이해를 가져봤으며 도 내 인생 정원에 잊을 수 없는 우정의 씨를 뿌리고 갓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거진반의 사람은 삶의 향기도 우정의 씨도 제대로 남기지 않고 또 나에 대한 관심도 이해도 별로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내 청춘을 불사르며 내가 받들고 있는 이 사제직을 자기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필연의 가치로서 생각하기 보다는 편의와 이용의 대상으로 대해 왔지나 않았는지.. 이 사제직은 나에게 남들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 가치가 되고 있으나 남들에게는 이 샘터와 같은 이용의 대상이었다.

 

남들이 기억해 주기도차 바랄수 없는 이 샘터와 같은 망각적 존재로서 남들의 이용가치로 남아 있어야 할 신부라는 내 이 삶! 이 망각적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는 나라는 인간됨이 부족한 탓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이 이용가치가 오히려 우리 신부들의 일상적인 사제생활 인지도 모른다.  사실에 있어, 우리들 신부들의 일상적인 사제생활이 복잡한 거리 교차로에서 교통질서를 유지하는 신호들이나 위험한 항로지대를 알리는 등대나, 많은 사람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공원이나 혹은 샘터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 신부들은 남들에게 이용의 가치가 됨을 섭섭히 여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보다 큰 이용의 가치로 남에게 우리 자신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고, 종이 상전보다 낫지 못하다, 마태오 10장 24절> 예수님의 이말씀이 있듯이 주님께서 복음을 설교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를 자기들의 영혼 구원이란 절대적 가치보다는 이용의 대상으로 흔히 대했는데 하물며 인간이 신부들에게 있어서랴! 예수님의 영적을 보고 그를 뒤따르던 수많은 군중!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필연의 조건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과연 그들 중 몇 사람이 그 십자가 밑에 있었으며 또 그분의 죽음을 이해했던가...

 

십자가에서 까지 받은 조롱과 모욕과 불신과 배반을 초월해 끝까지 사랑한 예수님은 이용의 대상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절대적 가치로 샘터와 등대되어 이 세상끝날 때 까지 계실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 특히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렵고 고독한 것인가 보다.

 

<나> 없이 <너>를 생각할수 없고, <나>를 위한 사랑 없이는 <너>를 위한 사랑이 있을 수 없는 우리들 인간의 상대성적 존재와 사랑의 관계! 그러나 <너> 가 있어야만 <나>나 있을수 있고, <너>를 위한 사랑 안에서만 <나>의 사랑이 자기존재 이유를 가질수 있는 이런 존재양식과 사랑의 길을 우리들 신부들은 걸어 가야만 한다.  이러한 가운데 십자가라는 <고독한 패배>에서 부활이란 <영광의 승리> 로 나아가는 그리스교적 구원의 길에서, 어떻든 우리 신부들은 샘터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야만 되니까..

 

<그래 가고 또 가야지> 그러나 나도 이젠 인생 50 고개를 넘어 서려는 한 평범한 인간이 가질수 있는 <연령의 무게> 탓인지, 혹은 그동안 몇번 느껴온 이상에 대한 패배의식의 영향인지 <꿈>에 기대를 걸지 않케 되는 반면 내 생활 주변의 정착을 바라게 되는구나 그리고 나라는 인간 신부에게 다소의 관심과 이해를 가져주는 인간의 정이 그러워짐도 어쩔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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