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고무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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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1-12 ㅣ No.5526

 

어느 한가한 주말이었습니다.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대형할인점에 장을 보러 갈 때면 나는 으레 한 가지 물건에 시선이 머뭅니다.

그건 값비싼 가전제품도, 자동차 용품도 아닌 빨간 고무장갑입니다.

"여보, 이것 좀 봐..."

"또 고무장갑? 제발 그만 좀 해요."

아내는 고무장갑만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진열대의 산더미같은 고무장갑을 몽땅이라도 사고 싶은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 물에 살짝 살얼음이 끼는 초겨울부터 어머니의 손은 검붉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깊어갈수록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졌습니다.

그 시절 우리집은 야채가게를 했는데 겨울장사 중 제일 잘 팔리는 것이 콩나물과 두부였습니다.

콩나물과 두부를 얼지 않게 보관하려면 콩나물은 헌 옷가지를 여러겹 두르면 되지만 두부는 큰 통에 물을 가득 붓고 그 속에 넣어 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윗물은 꽁꽁 얼어도 밑은 얼지 않아서 두부를 오래 두고 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음을 깨고 맨손으로 두부를 건져내야 했습니다.

"으... 시리다... 시려."

쩍쩍 갈라진 상처 사이로 얼음물이 스며 쓰리고 아팠을 어머니.

그때 고무장갑 한 켤레만 있었더라면 어머니의 손이 아내처럼 고왔을 텐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고무장갑만 보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는 못난 아들은 오늘도 아내 몰래 빨간 고무장갑 한 켤레를 쇼핑수레에 담고 말았습니다.

"이이가, 이거이..."

이쯤되면 아내도 더는 말릴 수 없다는 듯 말합니다.

"당신 이러다 고무장갑 가게 차리겠수."

고무장갑은 제게 가난한 시절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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