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5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2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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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9-07 ㅣ No.5147

연중 제25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22/09/18

 

 

  

 

  

 

 

오늘은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1위 순교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저는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함께 이름을 같이 올리는 평신도 대표이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정하상 성인은 본관이 나주이며, 1795년에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며 어머니는 유 세실리아입니다. 가족으로는 형 정철상 가를로와 누이 정혜가 있습니다. 아버지 정약종과 형 철상이 1801년 신유박해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자, 7세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작은아버지 정약용 요한의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0세에 상경하여 조증이 바르나바 집에 머물면서 한국 교회를 위해 자신을 봉헌합니다.

 

그분은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교리와 학문을 수학하고,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와 아버지 등 한국 천주교 주요 인사들이 순교한 후 흩어진 교회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분은 첫째로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의 주교님께 성직자를 보내 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그분은 이 어려운 사업을 현석문 가롤로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 희생적이며 유능한 동지와 힘을 모아 추진했습니다.

 

정하상 성인님은 1816년 이후 전후 아홉 차례나 구금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 5천 리의 길을 엄동설한에 신분을 숨기고 노예로 들어가 부경사대사신과 함께 북경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성사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1823년부터 정하상은 국내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의 일을 맡아보면서 역관으로 북경과의 연락이 용이한 유진길과 부경사행의 노복인 조신철 가롤로를 밀사로 북경교회와 꾸준히 교섭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1825년에는 세계 가톨릭의 교회의 책임자인 교황님께 한국 신자들의 영신 사정을 돌보아 줄 사제를 파견해 주시기를 청원하게 됩니다. 이 청원문은 북경 주교의 동정 어린 배려로 마카오 교황청 포교성성 동양 경리부로 접수되었고, 포교성성 장관 움피에레스(Umpoerres) 신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1827년 로마 교황청에 접수되었고, 교황 복자 그레고리오 10세는 마침내 193199일 자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 브뤼기에르(Brugiere) 사제를 주교로 임명하며 파견하게 됩니다.

 

정하상 성인의 업적을 살펴보면,

첫째로 그분은 조선교구 설정의 직접적 계기를 이룬 진보적이고 세계적 안목을 가졌던 박해 시대 한국 교회 평신도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정하상 성인은 조선교구 설정 이후 조선교구로 부임해 오는 성직자를 계속 영입해 들였고, 그 성직자들의 충실한 협조자로의 평신도 회장 직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한국 교회 발전에 지극히 큰 공헌을 쌓았습니다. 1834년 말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비밀리에 영입했고 1835년 모방(Maubant) 신부, 1836년에 샤스탕(Chastan) 신부, 그리고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Imbert) 주교를 영입했습니다. 이리하여 조선 교회가 교구장 주교와 선교 사제 그리고 교구 신자로 이루어진 교회체제를 갖추게 했으며, 이들 성직자를 협조하여 한국 교회 발전을 위해 몸 바쳐 일했습니다.

 

셋째로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 성인의 순교적 열성과 교리에 대한 지적 이해, 그리고 놀라운 신덕에 탄복하여 그를 박해 하의 조선 교회에 필요한 방인 성직자로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학식과 수덕과 신망의 정하상 성인은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와 함께 정하상 성인도 순교하게 되어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넷째로 정하상 성인은 한국인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를 써서, 박해자인 재상에게 천주교 입장을 밝히고 박해를 그치도록 주장했습니다. 재상에게 바치는 글인 '상재상서'는 불과 2,000여 자의 단문의 글 안에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잘 간추려 쓴 귀중한 소책자입니다.

 

다섯째로 정하상 성인은 순교로서 천주의 신앙을 증거하고 영생의 영광을 얻었으며 한국인의 신앙을 굳게 증거했습니다. 그분은 기해박해 때인 1839922일 주님을 뵈올 기쁜 마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형장으로 끌려가, 서소문 밖에서 45세를 일기로 순교했습니다. 그보다 두 달 늦게 79세의 노모 유 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했고, 다음 달에는 누이동생인 정혜마저 순교했습니다. 이 세 분 순교자는 1925년에 복자로 시복되었고 19845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시성되셨습니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정하상 성인께서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모습을 봅니다. 그럼 성인께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 모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가지고 서로를 위해 봉사하며, 지금 여기 우리 등촌3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식구들을 비롯하여 온 인류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 마침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이 그토록 신앙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01위 순교성인 대축일을 맞으면서, 우리 모두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 공경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실제로 또 이루어지도록 우리 몸으로 채워나가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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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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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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