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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진 [sillysilly] 쪽지 캡슐

2000-09-03 ㅣ No.1424

       

 

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고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주위에 사람은 있지만 내 맘이 옹졸함을 벗지 못해 대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 분은 너무 멀리 있다. 그 분은 늘 마음 속에 있고 그 분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분의 손을 내 손으로 잡을 수 없어서 허전할 때가 많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피붙이 중의 하나 그런 사람 말고 다른 누가 있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다시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다. 목숨을 서로 먼저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오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산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감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물음에도 아직은 그렇다 라고 확실하고 명료하게 대답을 못하겠다. 큰소리치며 살았지만 그래서 제대로 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살면서 더 헌신하고 베풀고 나누고 살아야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두번째 질문에서처럼 그런 사람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흔들리는 내 자신이다. 그 한 얼굴 때문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곤 하는데 그 사람을 떠난 건 아니면서도 때론 유혹의 잔물결에 발을 담갔다 꺼내곤 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나는 어렵게 만난 그 한 얼굴의 벗이 될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 나이 되도록 함석헌 선생의 이런 시 한 편을 읽으며 자신 있는 대답 하나를 못 하니 어찌 제대로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벗을 보면 그를 알 수 있다 하는데 그런 사람 하나 아직도 없으니 헛산 게 아니고 무엇이랴.

 

-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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