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시로페니키아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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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annasee] 쪽지 캡슐

2001-11-14 ㅣ No.3085

 정부 각 기관의 장들이 임명되면 언론에 반드시 그가 어디 출신인가를 밝히는 기사를 요즘 우리들도 익숙하게 보고 살듯이 그런 경향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하시며 시로페니키아 여인 강론을 시작해 주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출신) 여인이란 말속에 이미 그녀가 이방인임을 나타내주고 있씀을 알 수 있지요.  

 

시로페니키아는 로마시대에는 시리아 지방으로 불렸고, 그 전엔 가나안 지방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라했고, 신약성서시대엔 시로페니키아라고한 지방으로, 지금은 레바논이 있는 곳이라합니다. 그래서 마태오 20,22에서는 가나안 여인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같은 여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파나움에서 사람들에 시달려  잠시 쉬러 가신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수를 가만 쉬게 놔두질 않는 거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이 여인은 이방인인데다가 처음 보는 남자 앞이니  어쩌면 예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여인인데도  자존심이나 자격지심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악령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있는없는 자존심 다 버리고 그 어떤 모욕이나 어려움도 다 감수할 각오가 되 있는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도 강아지라 부르며 이렇듯 여성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는데요.  마귀 들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간청을 처음엔 아무런 응답도 않하심으로 거절하십니다(마태15,22-23).  두 번째 간청을 하니 자녀들에게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시며 또 거절 하십니다(마태15,25-26). 그러자 그 여인은 세 번째로 간청을 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먹지 않느냐고(마태15,27). 얼마나 간절합니까!

 

지금이야 개밥을 따로 팔고사고하지만 예전에 우리도 그랬듯이 그 나라에서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이나 먹고 그랬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다 합니다. (2열왕 8,13). 여기 그래도 예수께서는 완곡어법으로 ’강아지’라 부르고 계십니다.  마음이 부드러우심을 보여주시는 거라고 하셨는데요 신부님도 예수님 닮아서 마음이 약하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개라고 불리우든 강아지라 불리우든 이미 상관치 않는 경지입니다.  그저 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게 해달라는 거지요.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설 때 죄를 짓거나 했으면 스스로 평가를 해서 기도할 수 없는 자로 규정하고 포기한다고 하셨습니다. 도저히 예수님과 대면 할 수 없을 때 우리 영혼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술로 도피하였는지  혹은  더 큰 죄를 저질렀는지 아니면 이 여인처럼 예수를 찾았는지 .  참으로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는 ’강한 어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믿고 찾아간 분에게 자신이 개취급을 당하고  거절 당하며 자존심이 구겨져 한 없이 비참해 졌지만 어머니로서 위대한 사랑을 피워내고 있는 거라 하셨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우리 가슴속에 솟아있는 백두산만큼 솟아있는 그 무엇, 즉 자존심이라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한 번 무너지면 절대로 다시 문을 열지 않는다구요. 그러나 이 여인은 3번씩이나  다 부숴 드립니다. 내 안에 내가 부숴 뜨려야할 산은 무엇인가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행여 살살 피하며(그게 싫어서) 평지 길만 가고 있다면 엉뚱한 실로 가게 된다는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아울러 지난 달에 특강을 해 주셨던 이성우 박사님의 해석을 인용해 주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에서 딸이 치유를 받지만 정작 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치유되었기에 딸이 나은 것은 아닌지.  자식의 문제는 어머니가 먼저 치유가 되어야.. 아마도 이 어머니는 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식이 행여 잘 못될까) 두려움이 생겼을 것.  누군가를 사랑하면 두려움은 생기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그림자에 불과한 두려움을 └i쫒아가면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 많은 제약을 가하게 되고 그것을 어기면 의심을 품게되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벌을 가하게 되며 결국에는 싸움,파면,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로써 깊은 공감을 하였는데요. 이러한 악순환이 부부에게 적용되면 의부증&의처증이 생긴다 하셨어요. 사랑의 실체를 쫓아가야된다 하셨는데요, 그 사랑의 실체란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안에서/내 자식에게서/ 나의 신앙 속에서 어느 쪽을 ┐?쫒아가고 있

는지 생각해 보라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게을렀지요. 죄송합니다.

기운을 내서

성서속의 여인들 목요미사 강론을 계속 올리겠습니다.

맑은 가을날 용산 가족 여러분들을 생각하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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