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성당 게시판

슬프도록 아름다운...

인쇄

이영만 [Blueyes] 쪽지 캡슐

1999-07-20 ㅣ No.800

199X년12월8일눈쏟아짐.

그가 고민을 털어놓았다.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사람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제기랄,그따윈 집어치우고,나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느때처럼 난 "시간을두고서 잘생각해 결정하세요,형"

하며 있는대로 점잖고 사려깊은 척,위선의 가면을 쓰고 웃었다.

늘 그런식이었다.

그를 알아 온 지난 2년 동안 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난,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사사건건 따지려 들었고,

그의 말꼬리를잡고 배배꼬았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게될때도 난 절대 먼저 아는척 안했다.

하나도 반갑지 않은 것처럼 표정관리에 힘썼고,

그보다는 그의 주변사람들에게 말을 걸고,조금도 관심없는

그들의 얘기에 너무 재미있다는듯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가 들으라고, 더 크게 깔,깔,깔,난 형한테 관심없어,깔깔깔깔,

보라구,이렇게 형외의 다른사람얘기에 더 행복해서 웃고 잖아!

깔,깔,깔,깔,깔,깔

그러나 그 오만스런 웃음소리에도,제발 질투 좀하라는 그 음소리에도,

그는빙긋이 웃으며 말할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나도 한번들어보자"

그소리에 난 저혼자 부풀어 오르던 풍선이 바람빠지는 것처럼 그저 `피식`웃고말았다.

`으이구,이러니 내가 이사람을 어떻게 미워할수있겠어!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처음 만난그날부터 그는,학교 후배라며 날 무작정 아껴주었다.

그 한없는 친절함에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하지만이후,계속되는 나의 수작에도전혀질투하지않는 그친절함을 보면서,

난 한없는 그 친절함이 바로 나에 대한 한없는 무감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나의사랑은 절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날, 그는 어학 연수를 간다고 했다.

기간은 1년이었다. 그 기간동안 그 누군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해 보고싶다고했다.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는 다면 ,정식으로 프로포즈도 할거라고.

그말은 곧 나에게 사형 선고였다.

완벽히 고래 싸움에 새우등짝 터진꼴이었다.

그 잘난 누군가 때문에, 나는 원치도 않던 생이별을 하게 된셈이었다.

그의 마음은 어떻게 해 볼수없다쳐도,이제 그의모습마저 수없다니,흑흑,해삼,멍게,말미잘,불가사리....

아,개같은 내사랑.

그가 떠나던날,난 그의 친한 무리들속에 뻘쭉하게 서서 그를 배웅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별의 선물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야,너 겨울이 생일이지?그땐 내가 여기 없으니까 특별히 넌 생일 선물로 준비한거야,생일날 꼭 풀어봐!크기는 작아도 이게 젤 비싼거다."

사기꾼처럼,그가 빙긋이 웃었다.

거짓말!제일로 비싼거라고?흥!크기가작으면 작아서 미안하다고 해,

내가 크기갖고 뭐 섭섭해 할것같애?

속으론 그랬지만,내심 섭섭했다.다른사람들 것에 비하면,

내건 진짜 좁쌀만했으니까, 그게 아닌줄알면서도,선물의 크기가 마치

우리들 각자에 대한 그의 애정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만 같아`섭섭했다`.아주많이.

그가 떠나고,다른 사람들이 커피나 하고 가자는걸 집에 급한일이 있다고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시내로 나올때까지도 그냥

그렇던 가슴이 파아란하늘을 가로지르며,

유영해가는 비행기를보자,그만 울음을 토해냈다.

엉엉엉,지랄같고,빙신같고,바보 같은...내사랑.

몇달뒤,그때 배웅했던 무리들 중의 한사람

으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저...XX이가 죽었대."

암벽등반을 하다 당한 실족사라고했다.

그 어이없음이라니,`어학연수`와`암벽등반` 이라는 절대 양립할수없을것같은 두단어의 함수관계에 아연실색하며,

하마텨면 전화기 저편상대에 대고 `하하하하`폭소라도 터뜨릴뻔했다.

제기랄,이후,난 그를 잊기로작정했지만 그게 또 잘되지않는거였다.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말들은 내맘속에 또아리를 틀며,

그도도하던 자존심에상처를 긋기시작했다.

내 생일날이 돌아왔다.아침부터 창가엔 눈이`펑펑`쏟아지고있었다.

첫눈이었다.

길조라며 친구들은축하한다고,부어라마셔라 좋아들했지만 내마음은 온통 내방 책상맨밑 서랍속에 놓여있는 그의 생일 선물에 가 있었다.

결국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나는 서둘러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만일,그가살아 있었더라면 아마 난 오늘이 오기전에선물을

풀어봤을지 모른다.

하지만,그가 죽고나니 그건 그와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연결고리가 되어버렸다.그마지막 고리를난,서둘러 풀어 버리고싶지않았다.

지하철에서부터 조급했던 마음은 역에 내리자마자 날 다그쳐 뛰게

만들었다.

헉헉,집으로 달려와서,방문을열고 책상으로달려가,맨밑의 서랍을 열고 선물을

꺼내들었다.

헉헉,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A.S.T.R.A라는 상표가 곱게 찍힌,만년필이 었다.

그렇게 아껴두고,기다리고,고대했던

선물이 고작 만년필이라는게 조금실망했고,

이제 이것으로 그와나를 연결하는 모든것이

끝나버렸구나생각하니 눈물이`핑`돌았다.

기적이라도 바랐던것일까??

휴우..만년필을 만지작거리자니,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처럼,죽은애인에게 편지를 쓰고싶어졌다.

살아 생전 애인이라고,사랑한다고 단 한번도 불러보지못했던`그`이지만.....

편지지와 잉크를 가져왔다.

만년필뚜껑을 열었다.순간`툭`하고 뭔가가 떨어졌다.

뚜껑안쪽에 동그랗게 접혀있던 메모지였다.

심장이 `쿵쿵`뛰기시작했다.

아니,미친년 널뛰듯했다.

심호흡을 하고,눈을 질끈감고,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펼쳤다.

감은눈을 뜨자,너무나도 낯익은 그이 글씨체가날아와 박혔다.........

"귀.국.하.면.우.리.함.께.살.자."

창밖엔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3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