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10월1일 성 레미지오 주교,빛의 신비♬Ave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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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10-01 ㅣ No.1399

 

Madonna del Rosario-CARAVAGGIO

1607.Oil on canvas, 364,5 x 249,5 cm.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이 성화는 카라바지오가 1605년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시의 대공(大公)의 의뢰를 받고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고한다.

작품의 구도는 피라밋형을 이루고 있는 정형적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풍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화면 상부에 배경의 일부로 되고 있는 커튼(빨간색)은 카라바지오 작품 구성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요소이다.

화면 좌측에 서 있는 수도자 좌.우의 손에는 묵주가 들려져 있고 눈동자가 성모님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묵주기도를 하라고 권고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옆에 무릎을 꿇고 수도자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귀풍의 인물은 이 작품의 기증자로 알려져 있다 .

 

성모님을 높은 곳에 자리잡아 중심을 두고 있는 이 장면의 인물들은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원을 형성하는 동세로 되어있다.

여기에 여러 인물들의 표정이 어우러져 극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빛의 신비(the mysteries of light)

교황님께서는 교서에서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의 해”(The Year of the Rosary)로 선포하셨으며,

“빛의 신비”(the mysteries of light)라 불리는 다섯 가지 신비,

곧 예수님의 요르단 강 세례, 가나 혼인 잔치 때 나타나심, 하느님 나라의 선포, 거룩한 변모 그리고 성체성사의 제정을 묵주기도에 추가하시고,

이 “빛의 신비”를 목요일에 묵상하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월요일과 토요일에, 고통의 신비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그리고 영광의 신비는 수요일과 주일에 묵상하도록 제안하신 것입니다.

*주간 묵상의 요일 배분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환희-빛-고통-영광의 신비 순서로 하실수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빛의 신비”라고 이름을 붙이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당신을 ‘빛의 신비’로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1단.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합시다.

2단.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때(첫번 표징)당신을 드러내심을 묵상합시다

3단.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4단.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묵상합시다

5단.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을 묵상합시다.

 

*묵주기도 "빛 의신비" 게시판72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축일 : 10월 1일

성 레미지오 주교

St. Remigius of Reims

San Remigio di Reims Vescovo

Apostle of the Franks

Laon (Francia), ca. 440 - Reims (Francia), ca. 533

c.438 - 13 January 533

Remigio = che sta al remo, rematore, dal latino

라옹의 에밀리우스 백작과 성녀 셀리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설교로 명성을 떨치던 459년에 라임스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2세였다. 그때부터 그는 7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프랑크족의 개종을 시도하였다.

496년, 북부 프랑스(골)의  클로비스왕이 그에 의하여 개종하므로써 북부 전역에 그리스도교회가 뿌리내리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레미지오는 열렬한 정통교회 수호자인 뿐만 아니라, 아리아파를 적극 몰아냈으며, 어느 아리아파 주교를 회개시킨 사례도 있다.

그는 프랑스(골) 역사상 가장 힘찬 주교였고, 프랑스인의 사도로 공경받고 있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최익철신부)

 

 

 

프랑스는 많은 성인들을 냈으나, 그 중에도 특별한 존경을 받고 있는 성인은 성 레미지오 주교일 것이다.

그는 최초로 프랑스의 국왕 클로비스를 영세시켜 가톨릭국이 되게 했다.

레미지오는 북 프랑스의 리옹 시의 근교에 사는 에밀리오와 그 부인 셀리나와의 아들이요, 3남 1녀 중의 막내다.

자녀들은 모두 부모의 열심을 본받아 훌륭하게 자라났는데,

그 중에도 레미지오는 이미 부모도 노년에 이르러 얻은 아들이므로 특별히 총애가 깊었고 고등교육까지 받았으며,

재주가 뛰어난 그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였으며, 또 신앙이 두텁고 열심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448년 렘 교구의 주교가 서거하자, 동 교구의 신자, 성직자들은 레미지오를 그 후임 주교로 추대했다.

당시 불과 20세였던 그는 여러 가지 구실로, 특히 연소함을 핑계로 백방으로 사양했으나 결국 부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주교 축성식 때에 그 머리 위로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고 한다.

이렇게 주교가 된 레미지오는 자신에 대하여는 매우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애정이 두터웠으며, 그 탁월한 지혜로써 담당 교구를 잘 다스렸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여러 번 기적을 행하게 하셨는데, 그의 기도로써 맹인의 눈이 뜨이고 대 화제가 즉시 멈추었던 일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클로비스 왕을 개종시킨 것이다.

왕비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끊임없이 그에게 개종을 권했으나 그는 아직까지 개종하지 않았고, 또 그 나라 사람 대부분이 아직 가톨릭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게르만족(族)과 전쟁이 일어나 거의 패망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왕은 충심으로 이렇게 기도를 했다.

"나의 아내 크로티르디스의 신이여! 나를 구해주소서. 그러면 당신을 믿겠나이다." 그러자 즉시 기도한 보람이 있어 마침내 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3천 명의 신하와 함께 교리를 배워 496년 성탄 축일때에 다 같이 세례를 받았다.

그날 온 시가는 극히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한층 화려하게 꾸며진 대성당에서 왕의 세례에 앞서 레미지오 주교는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했다.

"머리를 숙여서 당신이 태워 버리신 분을 공경하고, 당신이 공경한 분을 태울지어다."

 

그 후 클로비스 왕은 신앙에 있어 매우 열심했으며, 레미지오 주교도 가끔 왕궁에 나가 왕의 신앙을 견고케 했다.

왕의 세례 이후에 교세(敎稅)는 현저한 발전을 보였으며, 그는 교회의 수도원을 다수 건립하고 새로운 교구도 증설했다.

 

그 후 레미지오가 북 유럽 제국의 교황 사절이 되면서부터

그의 활동은 한층 왕성해지고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기적을 행하여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는 96세의 고령에 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전교에 노력하며 또한 교회의 권리를 옹호했다.

그는 항상 애정이 두터우며 심지어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난을 받은 일조차 있었는데,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것은 분노를 위함이 아니오, 오직 구원을 위해서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시련을 면할 수 없었다. 즉 너무 연로하여 눈병을 앓고 앞을 못보게 된 것이다.

그는 이 부자유함을 잘 인내하고 그 병을 하느님의 선물로 달갑게 받아들였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잠시동안 그의 건강은 회복되고 다시 앞을 볼수 있게 되었으나 하느님의 계시로

죽는 날을 알게 된 그는 그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선종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열심한 마음으로 미사 성제를 거행하고 주교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체를 영하여 주고 난 후

그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하느님의 품안에 맡겼다.

때는 533년 10월 1일이며, 나이는 96세, 주교 봉직 74년이었다.

 

 

프랑스 북서부 피카르디(Picardy) 지방 랑(Laon)의 에밀리우스(Aemilius) 백작과
성녀 칠리니아(Cilinia, 10월 21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레미기우스(또는 레미지오)는
수아송(Soissons)의 주교 성 프린치피우스(Principius, 9월 25일)의 형이다.
랭스에서 교육받은 성 레미기우스는 학식이 뛰어나고 성덕이 높았기 때문에
불과 22세인 459년에 랭스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70여 년 동안 재직하면서 프랑크족의 개종을 시도하였다.
496년 이교도인 북부 프랑스 지방의 왕 클로비스(Clovis)가 그에 의하여 개종함으로써,
북부 전역에 그리스도 교회가 뿌리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 레미기우스는 열렬한 정통교회 수호자일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파(Arianism)를
적극 몰아냈으며, 어느 아리우스파 주교를 회개시킨 사례도 있다.
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힘찬 주교였고, 프랑크족들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레오 9세는 1049년 성인의 유품들을 생 르미(Saint-Remi) 대수도원으로 옮겼다.
그는 레미(Lemi)로도 불린다.

(가톨릭홈에서)

 

 

*성녀 셀리나(실리니아) 축일:10월21일

Saint Celina(St.Cilinia of Laon)

Santa Celina Madre di S. Remigio

458년,귀부인

 

 

 

♬Ave Maria-Gregorian Chant

 

 

 

 

 

 

 

 

 

 

 

 

 

 

 

 

 

San Remigio di Reims Vescovo
1 ottobre 
Laon (Francia), ca. 440 - Reims (Francia), ca. 533
Etimologia: Remigio = che sta al remo, rematore, dal latino
Emblema: Bastone pastorale, Fiala d'olio
 
Nato cittadino romano, Remigio vede crollare nel 476 l’Impero di Occidente e sparire il dominio di Roma nella sua Gallia, che passa in mano alle tribù barbariche di Burgundi, Alamanni e Visigoti. Sul finire del V secolo, il popolo germanico dei Franchi occupa via via il Paese, al quale darà infine anche il proprio nome: Francia. Remigio appartiene al ceto dei gallo romani, legati da generazioni alla cultura latina, da cui ora provengono molti uomini di Chiesa. Viene acclamato vescovo di Reims prima di compiere i trent’anni, e un suo fratello di nome Principio sarà vescovo di Soissons.
All’epoca, la Gallia è un arcipelago di isole e isolette cattoliche, in un mare formato da Burgundi e Visigoti di fede ariana, mentre le campagne sono ancora pagane, come a loro modo pagani sono anche i Franchi, condotti in Gallia dal re Childerico. Meno evoluti degli altri popoli, i Franchi sono però dei grandi combattenti (non portano elmo né corazza) e hanno reso buoni servizi militari a Roma in passato.
Morto nel 482 Childerico, gli succede il figlio Clodoveo quindicenne. A lui Remigio, vescovo cattolico in territorio franco, scrive lettere rispettose e insieme autorevoli. Una di esse dice: "Vegliate a che il Signore non distolga lo sguardo da voi. Consigliatevi con i vostri vescovi. Divertitevi con i giovani, ma deliberate coi vecchi". Da un lato lo ammonisce, dall’altro riconosce la sua sovranità: un muoversi anche da politico, che è inevitabile per Remigio, "evangelizzatore a vita" tra i Franchi.
E’ un aiuto prezioso per Clodoveo, perché favorisce l’adesione degli altri vescovi e dei gruppi galloromani. Così il re giungerà a essere padrone del Paese, dopo la vittoria del 507 a Vouillé sui Visigoti, dando così l’inizio alla dinastia dei Merovingi. Ma non c’è soltanto la politica. Su di lui influisce fortemente in senso religioso la moglie Clotilde, che è già cattolica; influisce Remigio, che lo istruisce personalmente nella fede. E molti atti successivi del re Clodoveo rivelano una religiosità personale autentica. Si arriva così al suo battesimo, per opera del vescovo, a Reims, in un giorno di Natale di un anno incerto. Alcuni sostengono fosse il 497. In un’iscrizione della fine del XV secolo a Reims si legge: "L’an de grace cinq cent le roy Clovis – receut a Reims par saint Remy baptesme". Saremmo allora al 500.
Ma dopo quel Natale, quale che sia, riprende il lungo, feriale lavoro di Remigio per annunciare il Vangelo a chi non è re né principe; senza poeti e cronisti al seguito. Una fatica durata quasi settant’anni, secondo una tradizione. Un’immersione totale nei suoi doveri, oscuramente portata avanti, e di cui si parlerà soltanto dopo la sua morte, quando Remigio sarà acclamato santo direttamente dalla voce popolare.

Autore: Domenico Ag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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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1-Feb-2001
Letto da 4061 persone

 

Santa Celina Madre di S. Remigio

21 ottobre

Etimologia: Celina = abitatore del cielo, dal latino

Scarse e leggendarie sono le notizie intorno a Celina, nota soprattutto perche fu la madre di s. Remigio, vescovo di Reims.

Secondo il racconto dello pseudoFortunato, ripreso e ampliato piu tardi da Incmaro di Reims, Celina dette miracolosamente alla luce Remigio,

perche ormai in eta assai avanzata; subito dopo rese la vista all’eremita Montano, che per tre volte aveva profetizzato l’avvento del santo vescovo,

spalmando con alcune gocce di latte i suoi occhi senza luce.

L’anno 458 e il terminus post quem si deve porre la morte della santa; fu sepolta la dove era vissuta, nei pressi di Laon, probabilmente a Cerny;

ma le sue reliquie andarono distrutte durante la Rivoluzione francese.

Il suo culto a Laon e a Reims nacque, secondo le fonti, assai tardi.

Nel Martirologio Romano e iscritta al 21 ottobre, giorno in cui si celebra la sua festa a Reims.

 

 

 

 

 

REMIGIUS

Also known as

Apostle of the Franks; Remigius of Reims

Memorial

1 October

Profile

French-Roman nobility, the son of Emilius, count of Laon, and of Saint Celina. A speaker noted for his eloquence,

he was selected bishop of Reims at age 22 while still a layman, and served his diocese for 74 years.

Evanglized throughout Gaul, working with Saint Vaast. Spiritual teacher of Saint Theodoric.

Converted and baptised Clovis, king of the Franks. Blind at the time of his death.

Born

c.438

Died

13 January 533

Patronage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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