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성당 자유게시판

[비타] 기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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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novita] 쪽지 캡슐

1999-02-18 ㅣ No.292

                      ㄱ ㅣ ㄷ 이 ㄱ ㅣ.1

                            ㅗ ㄹ

 

                        -새해를 맞으며-

 

 

                               1

 

아침에 까치를 보면 더욱 반갑다. 새들은 우리집이 좋은지 사계절 내내

 

날아와서 우리의 기도 소리를 엿듣기도 하고, 우리가 일하는 옆에 앉아

 

놀기도 하고, 종종걸음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배가 볼록하

 

게 나오고 꼬리 긴 까치들은 언제 보아도 즐겁고, 검은 옷에 흰 수건을

 

쓴 수련 수녀들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2

 

이번 성탄에 그라우(Grau)의 미사곡을 부르기 위해 연습을 꽤 많이 했

 

다. 남성의 목소리가 빠진 여성들만의 3부 합창은 그 나름대로 청아하

 

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다. 합창 연습을 할 때처럼 또 한해를 살자.

 

음(音)이 틀리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로 , 다른 파트의 소리를 들

 

으면서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의 음을 내는 분별과 확신으로, 혼자만의

 

목소리가 너무 튀어나오지 않게 유의하면서도 기죽지 말고 떳떳하게 화

 

음을 이루도록 애쓰는 자세로 매일을 살자.

 

 

                               3

 

요즘은 꿈속에서도 길을 떠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부쩍 많이 보게된다.

 

그러나 길의 방향도, 동행자도, 꼭 지녀야 할 물건들도 잃어버려 당황

 

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어 놀라곤 한다. 올 한해도 나를 찾는 여행을, 사랑때문에 지치지 않

 

는 내면의 여행을 계속해야겠다.

 

 

                               4

 

새로운 시간이여, 어서 오세요. 누군가에게 정성껏 선물을 포장해서 리

 

본을 달 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나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을 건네줄 때처럼 환히 열려진 설레임으로 그대를 맞이합니

 

다. 그대가 연주하는 플룻 곡을 들으며 상항 새롭게 태어나는 이 기쁨

 

을 나는 행복이라 부릅니다.

 

 

                               5

 

새해엔 연하장 대신 장미를 보내신다구요? 복을 빈다는 말도, 사람한다

 

는 말도 너무 자주 하면 향기가 사라질 것 같아 꽃봉오리 속에 숨겨온

 

그 마음을 읽습니다. 가시를 지닌 장미처럼 삶의 모든 아픔 속에서도

 

고운 꽃을 피워내라는 한 송이의 기도와 격려로 그대의 꽃 선물을 받아

 

들입니다.

 

 

                               6

 

살아 있기에 늘 문이 열려 있는 내마음의 집엔 늘 손님이 많아 행복하

 

다. 슬픔, 기쁨, 절망, 희망, 고뇌, 환희...,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이

 

들을 편애 없이 다루는 엄마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이 나를 가르치

 

는 교사 같기도 하다. 한시도 비울 수 없는 내 마음의 집에 오늘도 향

 

기로운 차 한잔 달여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내 마음의 집.

 

 

                               7

 

어떤 이의 한 마디의 말이 내 기분을 언짢게 한다고 해서 즉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거나, 이로 인해 하루 종일 우울해 있거나 다른 이에게 감

 

정 표현을 너무 쇱게 하는 것 등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된다.

 

 

'내 자신에 대해 말할수록 더욱 덕성을 잃게 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비

 

록 가장 순결한 듯이 보이는 말일지라도 말 속에서 허영이 튀어나오는

 

수가 있다. 사람들과 동료들과 웃어른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말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 말을 하게 된다면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이야기만 해

 

야 한다.'

 

 

20세기의 성자라 불리는 고(故) 요한 23세 교황의 <영혼의 일기>에 나

 

오는 이 구절을 깊이 새겨듣자.

 

 

                               8

 

올해도 하얀 눈 속에 제일 먼저 매화가 피겠지. 눈 속에 피어 더욱 귀

 

해 보이는 꽃. '웃음도 눈물도 너무 헤프지 않게!' 꽃도 피우기 전에

 

매화나무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내리는 눈에게 나도

 

오랜만에 말해야지 "산천에, 내마음에 희게희게 쌓이렴. 허물도 덮어주

 

는 사랑이 되렴. 이유를 묻지 말고 그냥그냥 내리는 환한 축복이 되렴.

 

아이가 되어 눈밭에 뒹굴고 싶은 내 마음에도 하얀 레이스를 달아 주렴

 

.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이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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