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성당 게시판

[내가 사랑한 시인] 도종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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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섭 [jayhan] 쪽지 캡슐

2003-06-06 ㅣ No.3988

 

 

시인 도종환님은 1954년 청주 운천동산직말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과를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과정을수료했다.

 

교직에 몸담고 있던 시절,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교직생활과 시 창작을 병행하던 시인은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이후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으며 교육운동을 해왔으며, 현재는 충북민예총 문학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편 주성 전문대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역 문화운동에 힘쓰고 있다.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등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가 있다.

 

제8회 신동옆 창작기금과 제7회 민족예술상을 받았다.  

 

 

 

가을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읍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읍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겨울 골짜기에서

 

   낮은 가지 끝에 내려도 아름답고

   험한 산에 내려도 아름다운 새벽눈처럼

   내 사랑도 당신 위에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밤을 새워 당신의 문을 두드리며 내린 뒤

   여기서 거기까지 걸어간 내 마음의 발자국 그 위에 찍어

   당신 창 앞에 놓아두겠습니다

   당신을 향해 이렇게 가득가득 쌓이는 마음을 모르시면

   당신의 추녀 끝에서 줄줄이 녹아

   고드름이 되어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바위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그래도 당신이 저녁산처럼 돌아앉아 있으면

   바람을 등에 지고 벌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했었노라는 몇 줄기 눈발 같은 소리가 되어

   하늘과 벌판 사이로 떠돌며 돌아가겠습니다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여 절망이라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쪽을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가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만 말하지 말자.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사연

 

   한평생을 살아도 말 못하는 게 있습니다

   모란이 그 짙은 입술로 다 말하지 않듯

   바다가 해일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일 때도

   해초 그 깊은 곳은 하나도 쏟아 놓지 않듯

   사랑의 새벽과 그믐밤에 대해 말 안하는 게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았어도 저 혼자 노을 속으로 가지고 가는

   아리고 아픈 이야기들 하나씩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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