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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정 [bonabona] 쪽지 캡슐

2000-09-30 ㅣ No.2083

장독대에는 항아리들이 참 많습니다.

 

제일 크고 당당해 보이는 간장 항아리, 알맞은 키에 그런대로

 

듬직한 된장 항아리, 자그마해서 예쁘장하게 생긴데다가 반짝

 

반짝윤까지 나는 고추장 항아리 ......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가지런히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항아리들은 한결들이 무엇인가를 가득가득담고 자신만만하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빈 항아리가 하나 있습니다. 모양은 비뚜름하게 생긴데다가아무것도 담지 못한채 , 커다란 아구리만 떡 불리고 서 있는 볼품없는 항아리입니다. 게다가 다른 항아리는 다 가지고 있는 뚜껑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빈 항아리는 여간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때는 옆에 있는 항아리들이 한없이 부럽디고 하고,

 

어떤때는 옆에 있는 항아리들과 영영 혜어져 먼 곳으로 떠나 버리고도싶어집니다.

 

 

 

"나도 무언가를 담아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뚜껑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

 

 

 

가끔씩 주인이 장독대를 청소할 때도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정말 참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깔끔한 주인이 행주로 정성스레닦고 맑은 물을 끼얹고 하는 동안 다른 항아리와는 달리 구정물이 속까지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인은 덜 바쁜 날은 구정물을 쏟아 주고 가지만 바쁜날은 그냥 가버립니다. 그러면 다음 손질하는 날까지 그 더러운 물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물을 닦아주고 가도 뚜껑이 없어 온갖 먼지들이 속에 까지 켜켜이 쌓이기 일쑤니까요. 그래서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이면 열어 놓은 간장,된장, 고추장 항아리들의 뚜껑이라도 얻어쓰고 싶지만, 아구리가 너무 넓어서 도무지 맞는 뚜껑이 없습니다.

 

빈 항아리는 애를 태우며 여러 가지 궁리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입니다.

 

갑자기 장마비가 주륵주륵 내리기 시작했어요.

 

다른 항아리는 모두 뚜껑을 아무려 닫고는 빗물을 탕탕 튀겨내며

 

빈 항아리가 안됐다는 듯 바라봅니다.

 

 

 

"얘 너 참 안됐구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뚜껑도 없이......"

 

빈 항아리는 너무 부끄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나서 그냥 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빗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며칠만에 장마가 그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빗물 속에서 줄곧 울기만 하던 항아리는 갑자기 자기 자신이 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바람만 머물고 가던 빈 항아리 가득 맑은 물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제 더 이상 빈 항아리가 아닙니다. 어디 그뿐이겠어요.

 

하이얀 구름이 여기저기 예쁘게 수놓인 파란 하늘이

 

항아리 가득 아름답게 담겨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항아리는 정말 정말 기뻐서 어쩔쭐 모릅니다.

 

이제는 비뚤어 진 몸도 넓은 아구리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어떤 항아리도 담을수 없는

 

하늘을 혼자서 품어 안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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