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성당 게시판

내가 살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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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아 [castle] 쪽지 캡슐

1999-12-17 ㅣ No.956

아침에 출근을 하려면 남대문시장 앞에서 328번 버스에서 내려 지하도를 2개쯤 건너 5분 정도 걸어야 한다. 운동이 부족한지라 이 5분 정도의 아침 산책을  즐기는 편인데, 겨울이 점점 다가 오면서 그것도 좀 힘들어졌다.  5분 정도라도 추워서 걷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난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종종 걸음으로 지하도로 뛰어들어..회사까지 한걸음에 뛰어가는 편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 발걸음을 붙잡는 곳이 생겼다.

 

첨에 그 모습을 보았을땐...버려진 담요인 줄 알았다... 누군가가 지하도에 낡은 담요를 버려놓은 줄 알았던 것이다...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담요 밑에 사람이 있었다.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그 차가운 바닥에는 신문지를 깔고 누군가가 숨을 들이쉬고,내쉬며 잠이 들어 있었다...... 노숙자 인가 보다 생각을 했다.

 

내가 출근을 하는 시간이 8시 20분쯤인데, 지하철의 노숙자들은 이미 그 시간에 거기에 없다. 출근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미 다 내쫓긴 시간인데, 그 지하도의 노숙자는 그 시간까지 자고 있었던 것이다. 노숙자 사이에도 더 편한 자리가 있다 보다. "하긴 일찍 일어나 봐야 무슨 좋은 일이 기다리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조금 마음이 울적해진 채로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다시 내 갈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 날이후 나는 아침마다 그 자리에서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기에...그냥 사람이라고 밖에 짐작할 수 없는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첨에 느꼈던 맘 아픔도 서서히 잊혀져 갔고 마치 늘 있는 지하도의 기둥처럼 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

 

 

며칠 전이었다..날이 좀 덜 추워져서....머리 끝까지 담요를 뒤집어 써서 누군지 알 수 없었던 그 사람이 담요 밖으로 손과 머리를 쑥 내밀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분은 할머니였다. 아주 마른 할머니였다. 손목과 볼은 형편없이 여위었지만, 손이 아주 거칠고 마디마디에 못이 박혀 있어 그 여윈 손목에 달려있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런 할머니였다.........아마도 평생을 고된 노동으로 살아온 분인듯 했다.....그런데, 왜 여기에 이렇게 주무시고 계실까?

 

갑자기 별로 고된 노동을 해 본일 없는 내가 따뜻한 방에서 발 뻗고 자고 나와 따끈한 국과 밥을 먹고 있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성이다 결국은 그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하고 그냥 그 곳을 나왔다. 그리고 어리석고 속좁은 나는 하느님을 조금 원망했다......왜 저토록 고된 노동에 평생을 시달린 저 분이 저기서 저렇게 주무셔야 하나요? 불공평해요.....그리고 저는 왜 저 분의 손을 잡아줄 만큼 강하지 못한가요........

 

 

 

그 날 아침의 그 기억은 며칠동안 나를 아주 많이 괴롭혔다. 그래서 며칠동안 다른 버스를 타고 내려서 일부러 그 지하도를 지나치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괴로워만 하는 내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늦잠을 자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빨리 오는 버스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헉헉거리며 지하도 안에 뛰어들었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담요가 놓여있었다. 습관처럼 주춤거리다 보니......한 가지 달라진 점이 눈에 띄었다....담요위에 파란색 파카 하나가 더 덮여 있는 것이다...그 뿐만이 아니었다.....쑥 나온 그 머리도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여윈 그 할머니와 어떤 아주머니 한 분..... 그 파카의 낡은 정도로 보나, 그 아주머니의 행색으로 보나 노숙자 생활을 많이 한 분은 아닌 듯 했다. 집을 나오셨다 하더라도 일주일이 채 넘지 않은 분 같았다.

 

갑자기 어젯 저녁 이 지하도 안에서 일어났을 사건이 머리에 그려졌다... 낡은 담요를 펴들고 잠을 청하려던 할머니가 파카를 덮고(그 파카는 짧은 것이라..몸을 웅크린다 하더라도 다리를 다 덮기에는 작은 것이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초보 노숙자 아주머니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자신의 낡고 초라한 담요 안으로 초대했겠지.......그리고 저렇게 딸이라도 된 듯 꼬옥 껴안고 주무시는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그 지하도의 풍경이 왜 그렇게 따뜻해보였는지.....회사로 오는 길이 왜 그렇게 화사해보였는지.......... 모르겠다....이건 신성모독일지 모르겠지만, 난 그 순간 성모님을 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낡고 초라한 담요 하나와 자기 체온으로 그 추위에 떠는 딸을 꼭 껴안고 주무시고 계신 거친 손의 성모님을......

 

 

 

언젠가 그 두 분을 모시고 꼭 따뜻한 밥 한끼를 대접해드려야 겠다... 내가 출근을 할때면 주무시고 계시고, 퇴근할 무렵엔 거기 안 계셔서 어떻게 만나뵈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 분이 아니더라도........언젠가는 꼭 내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눌 날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인간에 대한 희망이 끓어올라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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