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성당 게시판

나의 산타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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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아 [castle] 쪽지 캡슐

1999-12-21 ㅣ No.962

<<나의 산타클로스 >>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마이던 때, 매년 성탄이 가까워지면 성당

안제대를 둘러싸고 작은 숲이 만들어졌다. 대림주일이 되기 전에 성당의 청년부

형과 누나들이 산에서 날라온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다. 솜도 달고 별도

달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작은 꼬마전구를 줄줄이 매단 전선을 성탄목에 보기

좋게 휘감는 일이다. 꼬마전구가 많이 켜질수록 성탄이 가까워졌다는 뜻이

된다.

 

새벽에 별을 보며 집을 나서서 눈길에 꽁꽁 언 발을 하고 첫미사에 참례할 때

그 전 주일보다 더 많이, 더 황홀하게 반짝이는 성탄목을 보면 절로 목이 메곤

했다. 목멜 것까지야 있겠느냐고 할지도 모르나 시골 하고도 시골인 우리

동네에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조금 전에야 전깃불이 들어왔던 것이다.                      

성탄 전야 자정미사 때에는 성탄목에 달린 모든 불이 한꺼번에 켜진다. 어둡고

추운 길을 걸어온 시골 아이들은 성당 안에 들어서면서 복숭아나무처럼,

살구나무처럼 환히 꽃핀 성탄목을 보고는 일제히 목이 멘다. 막 태어난 아기

예수가 마리아에게 안겨 있는 구유에도 어김없이 작은 불이 반짝거린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다시 목이 멘다. 글로오오오오오리아 하고 노래하는

성가대의 아름다운 합창에 다시 목이 멘다. 도시의 아이들은 뜨뜻한 방안에서

침대맡에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넣어주고 갈 양말을 매다는지, 굴뚝을

청소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시골 아이들은 목이 메느라 정신이 없다. 목멤,

그게 시골아이들에게 주는 산타클로스의 주된 선물인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시골 아이 인데도 진짜로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가 있었다.

그분은 나의 대부(代父)였다. 내가 사는 동네보다 더 시골인. 저수지를 하나

지나가야 하는 동네에 사는 그분의 성은 잊었다. 이름은 원래 몰랐다. 본명은

나자로였다. 성경 속의 나자로처럼, 그는 새로 살아난 사람처럼 보였다 .

그는 무슨 큰병을 앓다가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몸이 불편했다. 자전거를

탈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누구보다 먼 길을 걸어

성당에 다녔다. 그는 성당에 다니는 신자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불구자였는데도 나의 대부였다. 나는 그게 부끄러웠다. 나는 어쩌면

그의 유일한 대자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자정 미사가 끝나면 풍성한 잔치가 벌어진다. 축복과 선물이 오가고 평소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맛있는 음식이 나오고 노래자랑대회가 열린다. 이윽고

잔치는 끝난다. 별이 성탄목의 꼬마전구처럼 반짝이는 하늘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잠에 빠져든다. 그러나 나는

잠들지 못한다. 성탄 전야에 산타클로스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대부, 나자로다.

 

나자로는 몸지 불편한 까닭에 다른사람보다 걸음이 늦다. 그는 개가 컹컹

짖는 소리를 들으며 쭈뼛쭈뼛 대문을 들어서서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는

으레 오실 줄 알았다는 듯이 방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인다. 나는 자는 체하고

있다. 아버지가나를 부른다. 대부님이 오셨으니 인사를 하라고.

그러나 나는 곤히 잠들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체한다 그러면 나의 대부는

떠등떠음 괜찮다,깨울 것 없다고 아버지를 만류한다. 아버지는 더 큰 소리로

나를 깨운다. 나는 억지로 일어나 눈을 비비며 앉는다. 나자로는 말없이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손에 쥐고 온 선물을 내민다. 나는 건성으로

고맙습니다. 한다음 포장을 뜯어보지도 않고 다시 이불을 파고든다. 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나자로가 언제 가나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자로는 어머니가

내온 차를 마시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다. 침묵 속에서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나자로는 일어선다. 밤늦게 폐가 많습니다. 아니오. 이렇게 우리

아이를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지요. 밤길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늘 다니는 길인데요. 나는 밤이면 물귀신이 나온다는 저수지 옆을 비척비척

걸어갈 그늘 상상하고는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졸립다. 스르르

잠이 든다.

 

다음날 아침 . 산타클로스가 주고 간 선물을 뜯어본다.

문둥이 연필이라고 부르는 질나쁜 연필 한 다스. 그 연필로는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다.공책이 자꾸 찢어진다.

내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 마을에서 산타클로스로부터 선물을 받은 유일한

아이지만 아무도 나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것도 화가 난다.

기왕 선물을 하려거든 왕자 그림이 든 공책 열 권에

낙타가 그려진 고급 연필 스무 다스를 하면 좋잖아. 나는 그 선물이 나의

산타클로스가 마련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임을, 아니 그 이상임을 왜 그때에는

몰랐을까.

 

나의 산타클로스, 나자로, 나의 대부는 내가 스무 살무렵 돌아가셨다. 어른이

되면 누구나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꾸며진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산타클로스가 진짜 있다고, 최소한 나의 산타클로스는 있었다고 말한다.

성탄이 다가오면 나는 이따금 그의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어린 시절, 환히

전깃불이 들어온 성탄목을 볼 때처럼 목이 메어오곤 한다. 그 목멤을 나는

그의 선물이라고 여긴다.

 

성석제 지음  "쏘가리(이야기,산문,덤)"  도서출판 가서원  중에서.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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