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짝사랑이야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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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성 [greenbee] 쪽지 캡슐

2000-06-15 ㅣ No.891

부제. 18년간의 짝사랑이야기.

 

 

체력장이 끝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토요일이었다. 학교는 완전히 입시 체제

로 들어갔다. 토요일만 빼고는 일요일까지 학생들에게 야간 자율학습을 시켰다.

토요일에는 다섯시에 퇴교를 했다. 그날 철민이는 동엽이와 따로 조금 늦게 교

실을 빠져 나왔다. 그 날은 학력고사 일이 백일 남은 날이었다. 동엽이는 다른

친구들과 백일주를 마시러 갔다. 철민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는지 그냥 집에

갈 요량이었다.

멀리 교문 앞에 한 여학생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제법 예뻤는지 지나는 학생

들의 고개가 그 소녀에게로 돌아 가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교문에 가까이 다가

가자 그 여학생이 자기와 친한 지윤이라는 것을 알았다.

"철민아 안녕."

"어,그래. 니가 여긴 왠일이냐. 혹시 나 기다린거냐?"

"응."

"왜?"

"오늘이 입시일 백일 남은 날이라고 하네."

"그래. 근데?"

"우리 백일주 같이 마시자."

"엉?"

"시험 합격해야 할 것 아냐."

"야, 그건 미신이야 임마."

"그래도, 같이 마시자."

"너 술 먹어 봤냐?"

"아니. 너는?"

"나도 안 마셔 봤어. 미성년자가 무슨 술이냐."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특별한 날 찾고 있네."

"철민아아. 백일주 마시자."

"얘가 진짜. 우리가 술집에 들어 갈 수 있냐."

"술 사서 우리 아파트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에 가 마시자. 거긴 인적이 드문

곳이야."

"밤이면 위험한 곳 아니냐? 나 깡패들 만나면 너 못 지켜죠."

"가로등도 있고 괜찮아."

"정말 마실려구?"

"응."

"에이, 그래 마시러 가자."

 

철민과 지윤은 수퍼에서 700미리리터 맥주 한병과 소주 한 병을 사서 지윤이가

사는 아파트 내 작은 공원으로 갔다. 주위가 어두워 졌지만 나트륨등 불빛이 좋

은 나무아래 벤취로 가 앉았다. 둘은 처음부터 술을 마시진 않았다. 그냥 웃으

며 이런 저런 얘기 부터 나누었다. 성적 얘기랑, 친구들 얘기랑 한참 동안을 그

냥 얘기만 나누었다.

"음, 이제 우리 거국적으로 술이란 것을 마셔보자."

철민이가 지윤에게 종이컵 하나를 주며 맥주병을 들었다. 지윤이가 다소곳이 철

민이가 따르는 맥주를 받았다. 그리고 또 철민에게 한 잔 따라 주었다.

"그래. 철민아 꼭 합격해."

"그러지. 우리 꼭 합격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얼씨구!"

"건배할 때 얼씨구라고도 해?"

"내 맘이여."

철민은 쉽게 술잔을 비웠으나 지윤은 그렇지 못했다. 술이 체질에 맞지 않는지

얼굴이 빨개 지며 헛구역 질을 했다.

"너 술을 잘 못 마시는구나. 그러면서 백일주 마시자라는 배짱은 어디서 나온거

야."

"처음 마시잖아."

지윤이가 속이 안 좋은지 가슴을 토닥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처음 마시는 거야. 야 이거 마실 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해."

"나 그만 마실래."

"어허, 약한 모습. 한 잔 받아 빨리."

철민은 다소 안색이 불편해 보이는 지윤에게 맥주 한잔을 더 마시게 했다.

"나 이제 진짜 못 마시겠어."

"그래, 넌 그만 마셔라. 거기 소주도 한 번 꺼내 봐라."

철민은 남은 맥주를 혼자서 다 마시더니 소주를 찾았다. 지윤은 약간 놀라면서

열심히 철민에게 소주를 따라 주었다.

"너 취하겠다. 그만 마셔."

철민이의 얼굴이 달아 오르자 지윤은 걱정스러운 듯 그만 마시라는 뜻을 비추었

으나 철민이는 그러지 않았다.

"으 좋다. 사온 것은 다 마셔야지. 별로 안 남았네 따라 봐."

철민은 소주도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철민이는 취기가 돌았는지 행동이 약

간 어색했다.

"괜찮니?"

지윤이는 철민이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인간 김철민 이 정도는 끄덕없지. 히히."

철민이는 술에 취한 것 같다. 히죽 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 취한 것 같애."

"히히. 취했으면 어떻냐."

철민이는 히죽거리면서 혼잣 말을 많이 했다. 고 삼 시절은 힘든 시기다. 생각

에 고민이 많을 때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 때문에 철민이가 막 말을 했다. 그 모

습도 지윤은 좋은가 보다. 아까 먹은 술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미소를 잃지 않

았다. 철민은 말을 멈추었다. 히죽 히죽 웃기만 하면서 지윤의 얼굴을 빤히 쳐

다 보았다.

"왜 그런식으로 날 쳐다 보냐."

"히히. 좋으니까."

"그러지마. 이상해."

"히히. 너도 상당히 이쁘다."

"이상해 그러지마."

"지윤아."

"왜?"

"그거 아냐?"

"뭘?"

"그 뽀뽀하면 대학에 떡 합격한다는 미신."

"그런게 어딨냐."

"우리 뽀뽀 한 번 하자."

"너 왜그래."

"어허, 거부하는 모습, 싫은 모습."

"이러지 마."

철민이가 갑자기 지윤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철민이를 지윤이는 뿌리쳤다.

"아이 씨. 지가 먼저 술 먹자고 그러고선 빼네."

"왜 그러는 거야."

지윤이는 벤취에서 일어 서 철민이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말했다.

"에이, 하기 싫다면 할 수 없지. 나 삐졌어 씨. 나 집에 갈거야."

철민이도 벤취에 일어 서 몇 걸음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땅바닥

에 덜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고서는 또 히죽거렸다. 지윤이는 그런 철민이가

걱정이 되었는지 다가 갔다.

"너 괜찮은거야."

"아이, 인간 김철민이가 소주 한병에 어디 탈이라도 나겠냐. 히히."

"너 맥주도 마셨잖아."

"나 삐져서 집에 갈거야."

철민이는 일어서려 했지만 잘 되지가 않는 모양이다. 걱정이 된 지윤이가 철민

이를 부축했다. 지윤이가 철민이를 부축하고 그가 불안하게 메고 있는 가방을 바

로 잡아 주려 할 찰나 였다. 갑자기 철민이가 지윤이의 머리를 두손으로 잡았

다. 그리고 지윤이의 입술을 훔쳐 버렸다. 어슬픈 입맞춤이 아니라, 입속까지 파

고 들어간 찐한 키스였다. 지윤은 철민을 밀쳐 내려 했으나 철민이의 힘을 당하

지 못했다. 지윤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철민은 약 일분간 지윤의 입술을 훔

치고선 힘을 풀었다. 지윤은 입술을 때자 마자 다짜고짜 화를 내려고 했었다. 그

러나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히죽거리고 있는 철민

의 얼굴 때문이었다.

"헤헤, 우리는 이제 합격하는거야. 히히."

지윤은 멍한 표정으로 철민이를 바라 볼 뿐이다. 철민이가 팔에 걸렸던 가방을

바로 메고는 다시 걸음을 걸었다. 그러나 영 불안했다. 지윤은 방금 입술을 뺏

긴 것도 잊고 그를 부축해 주었다.

"너 안 괜찮은 것 같아."

"인간 김철민. 아무렇지도 않다."

"저기 좀 앉았다가 가."

"그러지 뭐."

지윤은 저기 아파트 내에 있는 벤취를 가리킨 것이었으나 철민은 그냥 서 있던

그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철민은 주저 앉아 계속 히죽거렸다. 작원 공원과 아

파트 단지와의 경계되는 보도블럭이었다. 지윤이는 주저 앉아 있는 철민이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흐르고 난 뒤, 철민은 히죽거리며 지윤

의 얼굴을 또 빤히 쳐다 보았다.

"너도 자세히 보니까 참 예쁘다."

"자꾸 그러지 마."

"예쁘다고 그래도 뭐라 그러네."

"나 이제 집에 가야 돼. 괜찮니 너?"

"나는 아까도 괜찮았고 지금도 괜찮아."

"그럼 이제 일어 서자."

"그래."

철민의 걸음 걸이는 여전히 불안했으나 제법 나아진 편이었다.

"너 이렇게 집에 들어 가도 야단 맞지 않니?"

지윤이는 철민이가 걱정되었다.

"그럼 인간 김철민 누구한테 야단 맞을 사람이냐."

"버스 타고 갈 수 있겠어?"

"버스? 걸어서도 가지."

지윤이가 철민이의 팔을 잡아 주며 아파트 단지를 걷고 있을 때였다. 시간은 열

시가 조금 넘었다. 지윤은 이제서야 퇴교를 하고 집에 오는 현주를 발견하였다.

현주도 지윤과 철민을 보았다. 지윤은 조금 놀랐으나 잡고 있던 철민의 팔을 놓

진 않았다. 철민이는 아직 현주를 보지 못했다.

"지윤이구나."

"응, 너 이제 집에 오는 길이니?"

"응, 술냄새 난다."

"백일주 마셨어."

"쟤랑 같이 마셨니?"

"응."

철민이는 술기운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쟤,라는 소리에 현주를 바라 보았다.

철민은 흠찟 놀랐다. 자기 팔을 잡고 있던 지윤의 손을 뿌리 치고 뒷 걸음질 쳤

다. 그리고 몸이 굳은 채 바로 섰다.

"쟤 왜 저러니?"

현주가 그런 철민이를 보더니 지윤에게 물었다. 철민은 몇걸음 떨어져서 현주를

쳐다만 볼뿐이다. 자신은 바로 서 있다고 생각했으나 철민의 몸은 이리 기울었

다, 저리 기울었다 바로 서 있지를 못했다.

"술을 좀 마셨어."

"그러니? 그거 미신인데."

"그건 아는데."

"쟤 저래 가지고 집에 갈 수 있으려나?"

"나도 좀 걱정이 돼."

"쟤 집에 가면 야단 맞겠는데."

철민은 현주와 지윤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화가 났다. 먹은 술도

한 몫을 했지만, 철민은 자신을 계속 쟤,라고만 말하는 현주에게 섭섭한 마음이

많이 든 것이다.

"야이, 성현주 이 기집애야. 내 이름이 쟤냐? 쟤냐구."

현주는 철민이의 고함 소리에 많이 놀랐다. 멀뚱한 눈으로 철민이를 쳐다 보았

다. 철민이의 몸이 아직도 이리 저리 흔들린다. 지윤이도 다소 놀라 철민이를 쳐

다 보았다. 약간의 정적이 있었다. 현주가 그냥 피식 웃는다.

"그래 철민아. 그땐 고마웠어. 안 잊을거야. 지윤아 나 먼저 들어간다."

"그래, 안녕."

철민이는 한 번 고함을 질렀으나 그 뒤론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이 씨... 야이 씨..."

고개를 숙인 철민이의 입에선 작은 소리로 야이 씨,라는 단어가 반복 되고 있었

다.

"너 왜 그래."

현주를 보내고 난 뒤, 철민에게 다가온 지윤이가 물었다.

"야이 씨..."

"현주가 너보고 왜 고맙다고 그런거야?"

"야이 씨... 조금만 더 일찍 얘기 해 주지."

"너 괜찮은 거니."

"인간 김철민... 안 괜찮다."

"너 인간인 줄 알아. 아무래도 너 택시 태워 보내야 겠다."

지윤이는 다시 철민이의 팔을 잡고 길을 걸었다. 그리고 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

냈다.

 

지윤이는 잊을 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 입술을 뺏겼을 당시에는 매우 당혹했으

나 잠들기 전 지윤은 고운 미소가 있었다. 철민이는 이제 지윤의 마음 속에서 확

실한 사랑으로 자리매겨졌다. 잠자리에 들면서 지윤은 온통 철민이 생각 뿐이었

다.

철민이는 집에는 무사히 들어 갔으나 늦게 들어 왔다고 야단 치는 아버지께 대

들다 술깰 때까지 얻어 맞고 현주를 만난 것은 기억했으나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잊어 버린 채 잠이 들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배치 고사도 모두 끝나고 담임은 개별적으로 학생들을

불러 진학할 대학의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너 어디 썼어 임마."

동엽이와 나란히 앉은 철민이가 원서를 쓰고 난 다음 물었다.

"나는 네가 한량대만 아니면 아무런 상관을 않겠어."

"뭐야 씨부럴."

"왜? 너 호호혹시..."

"그래 씨. 진작 말 좀 해주지."

"너도 한량대 지원했니?"

"그래 임마."

"잠시 진정 좀 하자. 너 무슨 과 썼냐?"

"나? 전자공학과."

"휴, 다행이다. 나는 화학공학과걸랑."

"우리 대학 가서는 학교 내에서는 모른 척 하고 지내자."

"절대 그러자."

 

철민이는 원서를 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윤을 만났다.

"철민아."

지윤은 철민에게 여전히 다정했으나 얼굴 표정엔 다분히 수줍음이 끼여 있었다.

"그래, 원서는 좋은데 썼냐?"

"너는? 너 서울쪽에 썼지?"

"응."

"다행이다."

"뭐가?"

"네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녀야 자주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그것 때문이냐?"

"응. 어디 썼어?"

"내가 먼저 물었잖아."

"리화여대 영문과."

지윤이 그렇게 대답하자 철민은 입술을 쭝긋 내밀고 눈을 흘기는 듯한 표정으

로 받아 물었다.

"너 상당히 공부 잘했나 보네."

"나 예전부터 공부 잘했다고 했잖아. 내가 삼학년때 우리반 일등이었어."

"잘나서 좋겠네."

"그러는 너는 어디 썼냐?"

"나는 한량대 전자공학과."

"너도 잘했네 뭐."

"참 그 현주는 어디 썼냐?"

"현주? 걔는 세울대 썼었을 걸 아마."

철민이는 뜨끔했다. 현주가 공부 잘하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최고 명문대에 지

원했다는 사실에 마음속 가지고 있던 열등 심리가 다시금 일었다.

"걔는 여전히 공부를 잘했구나."

"나하고 별로 차이 안났어."

"그래도 너보다 잘한 건 사실이지?"

"치, 너 지금 성적 가지고 사람 평가하는 거니?"

"따지지 말고, 꼭 합격해라."

"그래, 백일주도 거하게 마셨고, 떡 붙는다는 그것도 했는데 붙어야지."

"그게 뭔대?"

"너 생각 보다 심술궃다."

’’’’뭐가 심술굿다는 거야. 떡 붙는다는 그게 뭐야? 얘도 나처럼 부적 차고 다

는 거 아녀?"

 

날씨는 추워졌고 매서운 바람처럼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갔다. 학력고사일은 예년

과 마찬가지로 추웠던 날씨와 함께 지나갔다. 철민은 시험 문제가 다소 어렸웠다

고는 하나 제 실력을 발휘했다고 믿었다.

얼마 안 있어 합격자 발표가 났다. 철민이는 합격했다. 동엽이도, 지윤이도, 현

주도 모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합격 통보를 받고 학교를 갔다. 철민이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가 못했다. 동엽이

도 마찬가지였다.

"야이, 니가 진짜 그럴 수 있어?"

동엽이가 눈가에는 웃음이 자욱했지만 화난 어투로 철민에게 따졌다.

"나도 진짜 이러고 싶지 않았어."

"너 제발 재수해라."

"진심이냐?"

"응."

"우리 아버지가 그냥 다니래. 나 그냥 다니기로 했어."

"이 새끼 배신 때리네."

"나도 진짜 너하고 같은 과 다니기 싫어."

"그럼 왜 이차 지망을 우리과에다 했어?"

"내가 하고 싶어서 했냐. 별 신경쓰지 않고 담임이 적는데로 내 버려 두었지.

이차 지망 신경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냐."

"하여튼 같이 학교 다니게 되어서 기쁘긴 한데... 진짜 조까튼 운명이다."

"팔자라고 생각해 새꺄. 니가 운명에 대해서 뭘 알어 새꺄."

 

철민이는 곧 대학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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