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성당 게시판

연중5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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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yk1004] 쪽지 캡슐

1999-02-07 ㅣ No.123

1999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강론

 

제1독서: 이사야 58, 7 - 10.

제2독서: 1 고린토 2, 1 - 5.

복음: 마태오 5, 13 - 16.

 

   교형,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마 다음 주간에는 설 연휴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 기회에 고향으로 내려가시거나 일가 식구들이 모여 오봇한 시간들을 많이 가지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명절이 여자들에게는 '공포의 명절'이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음식준비와 차례준비, 그 밖의 여러 가지 준비가 여자들에게는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하게 만들고, 힘든 노동과 함께 다른 가족들은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반면에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음식준비를 하는 여성들에게 명절은 '내가 부엌데기인가?'라는 자괴감과 함께 '화려한 소외'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명절이 '즐거움의 시간'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젊은 새댁', 젊은 여성들일수록 많이 있을 수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쓰면 다 함께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명절이 어느 특정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의 시간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설 연휴 기간에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 있기 때문에 단식과 금육이 비록 관면되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경우에 되새겨 봐야 하는 단식의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요새 젊은 여성들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잘 굶는다고 하지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떤 이유에서든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두 끼 굶는다고 해서 사람이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굶주림이 계속되다 보면 결국 생명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단식은 생명까지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커다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희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단식의 가치를 굉장히 크게 보고 중요한 시기마다 단식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돈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몇 끼 식사를 굶는 것 보다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어 쓴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가치있게 보시는 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단식도 하느님께 생명을 바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지만 남을 위한 선행과 희생도 그 못지않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오늘 제1독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천하는 단식이 단순히 굶는 것에 머문다면 그것은 몸매를 위해 한 끼 굶는 것, 때로는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단식이 다른 이를 위한 희생과 연결될 때 몇 배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고린토 신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은 어렵고 심오한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토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은 자신의 지혜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권위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무기력함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전했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시는 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하느님 아들의 지위도 권능도 다 내어 놓았던 예수님의 겸손하신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이 십자가이며 그것이 우리 인간을 위한 희생제사였음을 우리는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서 젖을 떼고 나면 똥 오줌을 가리게 됩니다. 어린 아기들은 자신의 배설물을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노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해결되지만 마음과 정신의 배설물, 버려야 할 배설물을 나이가 들어서도 가지고 노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욕심, 이기심 그런 것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지러운 이유는 바로 버려야 할 배설물을 버리지 않고 무슨 귀중한 것인양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종류의 심리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 될 때 사회는 어지러워지고 혼탁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강론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제 맛을 내지 않는 소금은 버려진다고 했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들어야 합니다. 소금의 화학기호는 NaCl, 나트륨과 염소의 결합체이며 주사위 모양인 정육면체의 결정체를 이룹니다. 소금이 물에 녹으면 없어진 듯이 보이지만 물을 증발시키거나 끓이면 다시 정육면체의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녹아 있을 때에는 짠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물이 증발하면 다시 반듯한 정육면체가 되는 소금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살지만 항상 그리스도인들의 고유한 맛을 잃지 않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있을 때에는 거룩한 모습, 반듯한 정육면체 같은 의로운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영롱한 빛을 냅니다. 그러나 사실 다이아몬드가 빛을 내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남에게 빛을 받아 빛을 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 할 때 촛불처럼 자신의 무엇인가를 태우는 빛이 아닌가 합니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이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자신을,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는 빛을 내는 것입니다. 혹시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낸다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복음의 빛을 받아 빛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보석, 예수 그리스도의 다이아몬드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 복음을 꿰뚫고 있는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사람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희생제사를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녹아들어 가면서 이 세상에 사람 사는 맛을 내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본모습을 찾을 때에는 모든 면에서 반듯한 사람, 아니 반듯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으로써 빛을 내는 사람, 빛을 비추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만큼 다른 사람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충분히 행복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신 신영세자 여러분, 여러분의 새로운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눈은 참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그런 결의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결심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의 신부 후보자에게 서품을 줄 때 하시는 말씀으로 여러분의 오늘 이 영광을 축하하는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그것을 완수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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