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교회음악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6) 교회의 악기, 오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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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27 ㅣ No.1967

[가톨릭 문화산책] <27> 성음악 (6) 교회의 악기, 오르간

'거룩한 선교' 오르간, 교회 전통 전례악기로 자리잡아


네덜란드 북홀랜드주 하를렘 성 바보케르크성당의 오르간(Haarlem Bavokerk Orgel). 유럽 성당들의 오르간은 이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오르간(Organ)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Organon)에서 유래한다. '공구'나 '기계'를 뜻한다. 음악에서는 '소리를 내는 장치'나 '악기'를 의미한다. 초기 오르간은 '물 피리 오르간(Organa hydraulica)'이라고 불렸다. 약식으로 오르간(Organa)만 떼어 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물 피리(hydraulis)' 혹은 '물(hydra)'이 이 악기의 옛 명칭이었다. 4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라틴어인 오르가나(Organa)가 이 악기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오르간,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

오르간이 탄생한 것은 기원전 3세기다. 음악가가 아니라 기술자이자 기계제작자였던 알렉산드리아 사람 크테시비오스는 기원전 246년에 오르간을 만든다. 그는 자기가 만든 새 악기를 '물 아울로스(hydraulos)'라고 불렀다. 다음 세대에 오르간을 묘사한 그림이 나타나는데, 기원전 1세기에 살았던 건축가 비트루프의 그림과 서기 1세기에 살았던 기술자 헤론이 그린 그림이 있다.

이 놀라운 발명품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널리 사랑을 받았다. 기원전 1세기에는 오르간 연주가 널리 알려져 그리스에서는 오르간 연주 경연이 있었고, 이 경연에서 우승하면 큰 시상도 이뤄졌다.

로마시대 오르간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치체로(기원전 106~43)의 「투스쿨룸과의 대화」 제3권에 나타난다. 치체로도 오르간을 소장했다.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64)도 오르간을 알고 있었고,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도 오르간을 소장했을 뿐 아니라 직접 연주까지 했다. 228년에 제작, 1931년 헝가리 아퀸쿰에서 발굴된 오르간 잔해를 재조립한 결과, 초기 오르간의 비교적 상세한 모습이 드러났다.


몰락과 부활

이후로는 오르간에 대한 기록이 점점 드물다. 퇴폐적 사교계는 오르간 음악을 마치 '식도락'처럼 여겼다. 반면 고상한 정신을 가진 이들은 이 악기를 평가절하했다. 이어진 5, 6세기 민족대이동은 유럽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서로마제국의 로마 문화는 야만족의 대이동과 함께 붕괴됐고 오르간도 함께 사라진다.

밑에 세 쌍의 풀무가 달린 변형 파이프 오르간 '노래하는 나무'.


하지만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에선 오르간이 15세기 멸망 이전까지 살아남았다. 황제들은 대부분 음악을 아주 사랑했기에 오르간에 대해 자주 공개적으로 언급한다. 유스티누스 2세(520~578) 황제는 오르간에 미쳐 가끔 밤낮으로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한다. 테오필루스(829~842) 황제도 금으로 된 오르간을 두 개나 제작하도록 했고, 노래하는 새들이 앉아 있는 황금나무와 동양의 예술적 장식이 돋보이는 연주기계도 제작케 했다. 이 밖에도 콘스탄티누스 6세(771~797), 콘스탄티누스 7세(905~959), 알렉시우스 3세(1153~1203),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1405~1453) 등도 오르간과 관련된 기록이 전해진다.

450년께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이사악이라는 사람이 쓴 시에 오르간 소리가 시끄러워 동네 사람들이 밤잠을 설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오르간은 비잔틴제국 황궁에서 쓰던 오르간과 같은 것이었고, 아마도 귀족들이 제한적으로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징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1216~94) 칸, 곧 몽골에서 대도(베이징)로 수도를 옮겨 중국 땅에 황조를 연 원 세조도 1260년 아라비아의 한 왕국에서 오르간을 하나 얻었는데, 아마도 바그다드에서 선물로 받았을 것이다.

파이프 오르간의 변형인 '노래하는 새들이 있는 나무'는 잘 알려져 있다. 917년 아랍제국의 두 번째 바그다드 칼리프왕조인 압바스왕조가 바그다드 왕궁에서 비잔틴 사절을 맞는 행사를 묘사한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50만 디람(1400㎏ 정도) 나가는 은제 나무가 연못 가운데에 세워졌다. 그 나무는 갖가지 색깔의 나뭇잎을 가진 18개의 가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 가지들 위엔 금과 은으로 된 새들이 지저귄다. 기계가 가동하면 새들이 지저귀고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이처럼 아랍인은 비잔틴 오르간을 발전시켜 자동 음악기계나 자동 음악시계를 만든다.


오르간과 초기 교부들

초기 교부들의 전례성가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다만 영혼을 고양시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생각에는 일치했다. 반면 오르간 음악을 포함하는 기악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이 있었다. 성 유스티노(103~168)는 모든 악기를 교회에서 몰아냈다. 음악가들은 자신의 직업을 바꾸지 않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했을 정도다. 성 예로니모(347~420)는 모든 악기들을 부패한 것으로 단정지었다. 314년 남프랑스 아를르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모든 배우들과 연극인들을 단죄했다.

그러함에도 교회 안에서 단 한 번도 오르간을 사용하는 게 적절한가 하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상징으로는 오르간이 인용되곤 했다. 오리게네스(185~253) 교부는 자신이 쓴 「시편 150장 주석」에서 하느님의 교회를 오르간에 비유했는데, 이는 오르간이 여러 음열(Register)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604)도 오르간을 '거룩한 설교(Sancta praedicatio)'의 표상으로 간주했다.

발로 풀무를 밟아 오르간에 바람을 공급하는 모습.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카를 대제(724~814)의 아버지인 피핀(714~768) 왕은 757년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718~775)에게 오르간을 선물로 받는다. 이로써 400여 년간 공백 끝에 서방에 오르간이 다시 알려지게 된다. 카를 대제의 셋째 아들 루드비히(778~840)는 826년에 베네치아의 게오르그 신부에게 오르간을 제작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오르간은 세속적 사치품으로 왕궁에서 사용됐을 뿐 한 번도 교회 전례에서 교회악기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얼마 후 갑자기 황궁과 오르간과의 관계는 끊기고 오직 교회악기로만 불린다. 향후 3세기 동안 세속악기로도 사용됐다는 증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르간이 교회악기로 사용되기까지 과정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문헌상으로는 아직까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르간, 교회악기가 되다 

오르간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교회 권위는 처음에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첫 기록은 교황 요한 8세(?~882)가 875년 바이에른 지방 프라이징(Freising) 교구 한노 대주교에게 좋은 오르간 한 대와 오르가니스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인데, 그 목적은 로마의 음악교육을 위해서였다. 오르간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교회악기로서가 아니라 교육 목적이었다.

900년께 처음으로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오르간 제작 설명서다.그렇지만 전례 중에 오르간을 쓰는 데 대한 문서 상 증거는 10세기 초에 비로소 나타난다. 첫 번째로는 수도원 성당을 위해, 그것도 오르간을 제작하는 수도자들이 일하는 수도원에서 나타난다. 992년 연대기 「성 오스왈드의 생애」에는 "하느님과 베네딕토 성인을 기리며 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동 30파운드를 모아 파이프 오르간을 제작케 했는데…"라는 기록이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영국 캔터베리교구 성 던스탄(924~988) 대주교는 말메스버리 수도원에 오르간을 선물했다. 950년께는 윈체스터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40개 음에 음전(Stop, 파이프 오르간 등에서 갖가지 관의 입구를 개폐하는 장치)이 10개나 되는, 그러니까 400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이 나타났다.

이처럼 영국은 로마와의 거리가 멀었기에 공개적이지는 않지만, 슬금슬금 교회 안으로 오르간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오르간은 그리스도교 전례악기로서 발달한다. 영국 사례를 프랑스와 독일이 뒤따르면서 오르간은 급속히 교회 전통악기로서의 지위를 굳혔고, 이후 교회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평화신문, 2013년 7월 28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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