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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주님 세례 축일 [나해] [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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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오후 11:38 [218.236.113.*]

2009-01-13 ㅣ No.828


주님 세례 축일〔나해〕


♣참고:이 글 중에 밑줄이 그어진 성경 구절이 나오면, 학습자들이 그 구절을 찾아 읽을 것을 권장한다.

 

          주님 세례 축일(Feast of the Baptism of Our Lord)을 시작으로 하여 전례력에 있어 연중 시기(Ordinary Time)라고 불리는 기간이 시작된다. 연중 시기의 기간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의 공적 사목의 시작에서부터 당신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resurrection)을 위한 당신의 예루살렘 입성에 이르기까지 연대적순의 방식(chronological manner)으로 복음 말씀 듣기를 통하여 인도되어지는데, 여기서 부활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부활 시기(Easter season) 동안에 이 사건을 경축하기 위하여, 우리는 연중 시기라는 주기(cycle)를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나해(Cycle B) 동안에 우리의 복음 말씀 듣기들은 마르코 복음서에 집중한다(단, 마르코 복음서가 너무 짧기에 요한 복음서로부터 발췌된 것들로서 보충이 됨). 가해(Cycle A)는 마태오 복음서에 집중하고 다해(Cycle C)는 루카 복음서에 집중한다.

 

          제1독서와 제2독서를 위한 대체 독서들이 있는데, 이들을 또한 사용할 수 있다. 이들 독서들 두 조는 여기서 학습하게 된다.


제1독서 - 이사야 42,1-4.6-7

 

          오늘의 제1독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고통 받는 종(suffering servant)의 노래 중에 그 첫 번째이다. 고통 받는 종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최상의 자질(qualities)들을 나타내고 있다. 첫 번째 노래에서, 그는 모세(시편 106,23), 다윗(시편 89,4),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1역대기 16,13, 이사야 41,8)과 같은 ‘선택된 자(chosen one)’인데, 이는 그가, 거룩한 종으로서, 다윗 왕조의 왕(Davidic king, 2사무엘 3,18), 메시아적 왕(Messianic king, 에제키엘 34,23-24), 그리고 예언자(아모스 3,3)의 역할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왕다운(kingly) 특권(prerogative)은 여기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Cyrus II, 기원전 590-530년)의 군사적 전술들과는 대조적으로 그가 설정되어(set) 있을 뿐만 아니라(가해 연중 제29주일), 하느님의 의지(divine will)를 승인하고 또 실행하는 적법한 판단(decision)인, ‘정의를 구현하는(bring forth justice)’ 권한이 그에게 위임된다. 성경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판관기 4,5; 1사무엘 7,6; 3,20), 왕들, 사제들, 그리고 지역의 권력자(local magistrates)들에게 이 권한을 남겨두었다(reserved). 그러나 이 종은 또 다른 자질(quality)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르침(토라, 즉 모세 오경)을 전달하는데(imparts), 이 직무(task)는 왕들에 의하여 수행된 적은 전혀 없었고 단지 예언자들(이사야 8,16; 즈카르야 7,12)과 사제들(예레미야 2,8, 에제키엘 7,26)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었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하느님께서, 아마도 천상의 궁전(heavenly court)을 향하여, 말씀 중이시다. 당신의 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내 마음에 드는 이(with whom I am pleased)’라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하라.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 축제와 함께 경축하는 예수님의 세례 및 주님의 거룩하신 변모(transfiguration)에 대하여 공경하는 자세로 주의를 집중하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질서를 유지하라고(conformity) 백성에게 채찍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 종은 그의 직무를 겸손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수행한다. 그에게는 다른 이들에 대한 예의바른(gentle) 존경심이 있다.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인 영어 성경인 The New American Bible(NAB)에는 제3절의 마지막 부분 및 제4절의 첫 부분인 “he will faithfully bring forth justice. He will not grow faint or be crushed.(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라는 부분이 생략된 것은 흥미롭다.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배교를 한(apostate)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 제국 구석구석까지, 알려진 세상 끝 모서리들에까지, 퍼졌는데, 그리하여 군중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은 다시 전향할 것(conversion)을 요청받는다.

 

이 구절에서 ‘공정’으로 번역을 한 표현을 NAB 영어 성경에서는 justice(정의)로 번역을 하였는데,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른 정의(justice, righteousness)의 정의(definition)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의 몫(due)을 주기위한 확고하고 지속적인 의지’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CCCC) 제 381항].[주1]

 

[주1] 정의(justice, righteousness)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해설서 시리즈의 가해 연중 제17주일 3분 복음/교리 묵상과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9.htm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의로움으로’으로 번역된 표현은 NAB 영어 성경에서 ‘for the victory of justice’ 로 번역되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한 단어이다. 이 한 단어는 ‘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함으로써(conformable to my plan of salvation)’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주2]

 

[주2]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 보시기에 사람이 의롭게 됨(justified)을 뜻하는데 구약 성경의  한 구절이므로,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순종(obedience of faith)’을 말한다. 따라서 이 의로움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주: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 144항에 정의된 ‘믿음에 대한 복종(obedience of faith)’, 즉 “자신이 들은 하느님 말씀에 기꺼이 순종”: 믿음에 대한 복종[‘복종하다’라는 라틴어 oboedire는 ob(에게)와 audire(듣다)의 합성어이다]이란 자신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며, 이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성서는 아브라함을 이러한 복종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를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셨다.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c144.htm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항)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이 구절은 최초의 사람을 창조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창세기 2,7). 이 단어는 자신의 진흙을 조심스럽게 빚는 옹기장이에 의하여 또한 사용된다(이사야 45,9; 64,8; 예레미야 18,6; 로마 9,21).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하느님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이스라엘은 나라들 중에 맏배(firstborn)이며, 장자로서 본(example)을 보여야 하고, 또 다른 나라들을 인도하여야 한다.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그들을 어둠으로부터 인도하기 위하여.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죄로부터 치유되고 또 자유롭게 되기 전에 자신들이 눈이 멀었고 또 죄의 노예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체 제1독서 - 이사야 55,1-11

 

          이사야서는 한 시기에 모두가 기록된 종류의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다른 부분들은 이사야의 예언직 50여년(fifty-odd years)에 걸친 다른 시기(times)들에 기록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한 권의 책을 이루기 위하여 언제 다른 부분들이 다 모아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우리는 역사적 증거로부터 이 책이 적어도 일찍이 기원전 3세기에 지금의 형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작자(authorship)에 관한 한, 유다교 및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전체 책의 인간 저자로서 이사야를 항상 인정해 왔다. 일부 근대 비평가들은 이사야서를 세 부분들로 나누었으며 각 부분의 저작권을 다른, 그리고 나중의, 저자의 것이라는 시도를 해 왔다. 이 이론은 역사학적 및 사회학적 주장들, 즉 이 책이 이사야의 생애 이후에 발생하였던 사건들을 언급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예언 능력(prophetic abilities)들을 의심하는 것을 뜻한다.

 

          시편들 다음에, 이사야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성경의 책이다: 22번의 인용들 및 13번의 언급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이사야서에 대한 언급을 그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

 

          오늘을 위한 우리의 독서를 택한 이사야서의 한 부분은 위로의 책(Book of Consolation)으로 불리고 있는 부분에 대한 맺음말(conclusion)의 시작 부분이다.

 

1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2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하여 연회(banquet)라는 상징(symbol)을 자주 사용한다.[주3] 시나이 계약(탈출기 24,5.11) 뿐만이 아니라 ‘이집트로부터 히브리인들의 해방(Passover)’은 가족 연회로써 경축된다(탈출기 제12장). 종말의 시대에 있어 하늘의 풍성함은 천상 연회(heavenly banquet)로서 자주 묘사된다(이사야 25,6; 65,11-15; 시편 22.5).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 묘사된 이 종말론적 연회에 초대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 대한 열망(thirst)과 당신의 부르심에 대한 복종뿐이다(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주3] 이적(wonders), 기적(miracles), 표상(signs), 그리고 상징(symbols)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 및 성경 말씀 중의 용례 분석 등에 관하여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09.htm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생명의 원천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장차 발견될 것이므로 우리는 들어야만(listen) 한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오래 전에 다윗과 맺었던 영원히 지속되는 계약의 모든 혜택들을 받을 것임을 이스라엘에게 보증한다(assure). ‘영원(everlasting)’은 지금 시작하여 영원히 지속되는 계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먼 과거의 약속들을 현재의 구현으로 가져다주는 계약을 뜻한다. 다윗은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였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왕국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구속하시는 권능을 바라보면서(beholding), 이스라엘의 대열(ranks)들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두름에 따라, 다윗의 모든 희망들은 이제 보장이 된다(secured).

 

4 보라, 내가 그를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민족들의 지배자와 명령자로 만들었다.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르고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너에게 달려오리니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신 까닭이다.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이스라엘은 다급한 기도(urgent prayer)와 극도의 필요(desperate need)와 함께 하느님께로 향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느님을 찾아야만 하나, 그러나 하느님의 길(ways)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 독서는 하느님 은총에 있어 신비로운 정반대의 것들을 결합한다: 하느님께서는 초월하시나 도와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가까이 계시며, 사람은 무력하나(helpless) 원기 왕성하게 행동할 것이 요청되며, 하느님의 길은 높여지나(exalted) 사람을 필요로 한다(호세아 14,10; 욥기 42,1-6; 집회서 43,27-33; 사도행전 13,10).

 

[주4] 성경 및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RSV, KJV(1611) 등의 영어본 성경)의 집회서 43,27-33 구절들은 NAB 영어 성경에서 집회서 43,28-35에 해당하며, DRB 및 라틴어 불가타 성경에서는 집회서 43,29-37에 해당한다.성경 및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RSV, KJV(1611) 등의 영어본 성경)의 집회서 43,27-33 구절들은 NAB 영어 성경에서 집회서 43,28-35에 해당하며, DRB 및 라틴어 불가타 성경에서는 집회서 43,29-37에 해당한다.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 말씀(Word)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나, 오직 그것이 인간의 생명(life) 안에 배어들어(soaked) 인간의 말(accents)로 나타내어 질 때에 비로소 이 말씀은 들릴 수 있게 된다. 일단 듣게 되면, 이 말씀은 효능이 있게(efficacious) 된다.

 
제2독서 - 사도행전 10,34-38

 

          오늘의 제2독서는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코르넬리우스는 유다교의 유일신적(monotheistic) 믿음들과 엄격한 윤리 규정(code of ethics)에 이끌렸으며, 유다교 회당 예배들에 참석하였고 또 십계명들을 지켰으나, 그러나 할례와 음식과 관한 제약들을 지키지 않았기에, 유다인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지 못하였던 자들의 대표적 개종자였다. 그가 기도하고 있는 중에 천사가 방문하였는데, 천사는 그에게 베드로를 요파(Joppa)로부터 불러 오라고 지시하였다. 베드로가 도착하여 그의 환시에 대하여 들었을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가르쳤다. 가르침의 끝 무렵에 성령께서 코르넬리우스와 그의 전 가족들에게 내려오셨으며, 그들에게 신령한 언어(gift of tongues, 방언)를 허락하셨다. 비록 그들이 이방인들이었지만, 베드로는 이것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충분한 사유(justification)가 됨을 알게 되었다. - 첫 이방인 개종자들. 오늘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시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졌던 베드로의 가르침 약간을 듣는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글자 그대로, ‘하느님께서는 편애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구절은 신명기 10,17을 암시한다. 하느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고 또 뇌물을 받지도 않으신다. 구원은 모두에게 가능하다.
 
35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정의(righteousness)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일은 유다인이 아닌 사람이라도 행할 수 있다.
 
36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만민의 주님을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이스라엘의 후손들인) 유다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던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라는) 선포(proclamation)는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시편 107,20을 보라). ‘평화의 복음’은 예루살렘에 전해질 복음(good news)을 전하는 전령(herald)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는 이사야서 52,7(예수 성탄 대축일 낮 제1독서)을 암시할 수 있다.

 

말씀을 37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logos(요한 복음서 1,1).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죄들에 대한 인정과 뉘우침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재결합하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이었으며 이 구절은 이사야서 11,1에 대한 재치 있는 표현이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나자렛(Nazareth)은 “가지-도시(branch-town)”를 뜻한다. ‘기름 부음(anointing)’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61,1을 암시한다(나해 대림 제3주일).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의 ‘힘’이 예수님께 부여됨을 상기하게 한다(루카 복음서 3,22; 4,14.18).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마자 메시아가 되시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징(sign)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saving activity)에 있어 성령으로 채워진(spirit-filled) 대행자(agent)이시다.


대체 제2독서 - 1요한 5,1-9

 

          복음사가 요한의 첫 번째 편지의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love of God)과 교우들에 대한 사랑(love of the brethren) 바로 그것이며, 이 사랑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특징(hallmark)이다. 이는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성경 본분 중의 많은 장소들에서 우리가 보듯이, 형제다운 사랑(fraternal love, 형제애)은 옛 계명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항상 원하셨으며 당신께서는 이것을 옛 계약(Old Covenant)의 백성을 위한 기본 계명으로 만드셨다(레위기 19,18). 이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안에서 완전하게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되므로, 또한 ‘새’ 계명이기도 하다. 성 예로니모(Saint Jerome)는 복음사가 요한이 나이가 매우 많아졌을 때에 그의 단 하나의 메시지는 “어린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여라.”였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의 제자들이 왜 그가 꼭 같은 것을 항상 말하는지 그에게 물었을 때에 그는, “나의 자녀들아,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실행하면,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항상 대답하였다. 오늘을 위한 우리의 독서는 실천함으로써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proof)가 그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다면(1요한 4,20), 하느님의 계명들에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consists in),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표시(sign)라는 것은 과연 진실인데,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계명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또 가장 포괄적인(inclusive) 계명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의 한 부분이라면, 그래서 “자녀들”로 불린다면,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맏형으로서 사랑하고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우리의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믿음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존재할 수가 없다. 만약에 태어나게 하시는(begets) 바로 그 분을 우리가 사랑한다면, 또한 그 분에 의하여 태어나게 된 자들(begotten)들을 우리는 사랑하여야 한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표시가 바로 그 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한 복음서 14,15.21을 보라).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계명들에 대한 그의 복종을 막을 수도 있는, 모든 적대적인 힘들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역할(character) 안에서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이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서 당신의 공적 사목을 시작하실 때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며(마르코 복음서 1,11), 당신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투성이의 희생으로써 당신의 임무(mission)를 성취하셨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세례에 현존하였으며(마르코 복음서 1,10; 요한 복음서 1,32-34),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는 일에 대하여 계속하여 증언하신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이 구절은 세례성사와, 교회 안에서 물, 피 그리고 성령에 대한 계속적인 증언인, 성체성사에 대한 암시이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당신 자신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증언을 인용하셨듯이(요한 복음서 8,17), 이 한결같은 증언은 신명기 17,6의 율법적 요구 사항들을 만족시킨다.


복음-마르코 1,7-11

 

          예수님의 세례라는 사실은 그러한 일이 발생한 후에 거의 곧바로 그리스도론적(christological)으로 또 신학적(theological)으로 따져 보아야만 하는 논쟁거리였다. 아무튼,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을 위한 예식(rite)에 참여하셨을까? 또, 메시아이시며 세례자 요한보다 분명히 뛰어나신 분인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세례자 요한의 권위(authority)에 당신을 맡기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정화의 예식(purificatory rite)을 겪음으로써 당신 자신과 죄 많은 인류들을 동일시하신다. 복음사가 성 마르코는, 복음사가 마태오의 설명(마태오 복음서 3,14-15)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의 역할에 대하여 부덕(unworthiness)이라는 이의제기 없이, 이 문제를 매우 솔직하게 보고한다. 열려진 하늘을 보시는 분 그리고 오직 당신을 향하여 천상의 음성이 주어지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축복들을 보증하기 위하여 그의 목숨을 희생하도록 준비되었던(창세기 22,2.12.16) 이사악(Isaac)의 모범(pattern)을 따라 마음속으로부터 사랑을 받는(well-beloved, 마음에 드는) 아드님이 되심으로써, 당신의 소명을 성자로서 구현하라고 부름을 받으신 것과 같다.

 

7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Elijah)를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말라키서 3,23은 우리에게 엘리야가 주님의 날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하여 올 것이라고 말하나, 그러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해석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언급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비록 티스베 사람 엘리야(Elijah the Tishbite)가 하늘로 들어 올려졌지만(taken up)(2열왕 2,11), 그는 세례자 요한보다 훌륭하지 않았다. 에녹(Enoch) 또한 하늘로 들어 올려졌으나(assumed)(창세기 5,24) 그는 세례자 요한보다 훌륭하지 않았다. 모세는 법 제정자(lawgivers)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였고 또 모든 예언자들은 존경을 받았으나, 아무도 세례자 요한보다 훌륭하지 않았다. 감히 예언자를 예언자와 비교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주인(Master)이시고 또 우리의 주님(Lord)이신 분이신데, 그 분 당신 스스로 ‘여자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선언하셨다(루카 복음서 7,28). 여기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난’이 아닌, ‘여자에게 태어난’에 주목하라!”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Saint Cyril of Jerusalem, 350년경), Catechetical Lectures 3,6].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이런 일은 노예의 일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앞질러 예상한(anticipatory) 그리고 종속적인(ancillary) 그 자신의 세례의 가치를 밝히고 있는 중이며, 그의 세례는 회개로 인도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세례자 요한은 그가 용서의 물로써 세례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회개의 물로써 세례를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능력(gifts)들로 가득한, 그리스도의 세례를 향하여 가리키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 나는 그리스도의 종들 중에서, 심지어 그분의 종들 중의 가장 낮은 사람도 못되고, 또 당신의 사목활동의 가장 존경받지 못하는 몫(portion)조차도 받을 만하지 않은, 높게 서열이 매겨질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중인 듯하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단순히, ‘그분의 신발’이라고 말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는, 어떤 것보다도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인, ‘그분의 신발 끈’을 말하였던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Saint John Chrysostom, 370년), Homilies on the Gospel of Matthew 11,5].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성 바실리오(Saint Basil)(370년경에 씀) 모세 율법 하에서의 세례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모세를 통하여 전해 내려오는 세례는, 우선, 죄들 사이에서의 차이점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사면(pardon)의 은총이 모든 죄(transgressions)들에 대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세례는 또한 다양한 희생 제물들을 요구하였고, 정화(purification)를 위한 정확한 규정들을 처방하였으며(laid down), 그리고 불결(impurity)과 부정(defilement)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당분간 격리시켰다(segregated). 이 세례는 날(days)들과 절기(seasons)들을 지킬 것을 정하였으며, 그리고 오직 그런 다음에라야 세례는 정화의 증표(seal)로서 받아들여졌다. 이에 비하여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훨씬 더 뛰어났다: 이 세례는 죄들에 대하여 어떠한 구별도 인정하지 않았고, 다양한 희생 제물들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정화를 위한 혹은 날들과 절기들을 지키기 위한 엄격한 규정들도 정하지 않았다. 진실로, 전혀 지체 없이, 죄들이 아무리 많고 또 중대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죄들을 고백하는 자 누구든지 간에, 하느님과 당신 그리스도의 은총에 즉시 접근할 수 있었다.” [성 바실리오(Saint Basil, 370년경) Concerning Baptism, 31.2].

 

예수님에 의하여 도입된 세례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행위들을 당신의 진리로써 정화하시며(purifies)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하여, 사람의 육(flesh)의 한가운데로부터 모든 부정(iniquity)의 영을 뿌리 뽑고 또 사람의 육으로부터 모든 불결(impurity)을 성령으로써 씻어 냄으로써, 인간의 몸을 정제하실(refine)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세례를 위하여 물에 풍덩 담겨졌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물가에서 개천을 건너고 다시 강기슭으로 걸어서 올라 갈 때에 우리는 ‘물에서 올라올(come up out of water)’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복음사가 마태오와 복음사가 루카와는 달리, 복음사가 마르코는 예수님의 세례에서의 하느님의 출현(theophany)을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보게 된 계시적 환시(apocalyptic vision)로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주6] 이 하느님의 출현을 예수님에 의해서만 보게 된 하나의 환시로서 유지함으로써, 복음사가 마르코는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오직 독자들에게만 알려지는 비밀로 유지하는데, 이는 이 환시가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목격하였던 자들과 공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환시의 네 개의 요소들은 이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분명히 한다:

 

          (1) 찢어져 열린 하늘은 이사야 64,1에 대한 암시인데, 하느님께서 새로
          운 탈출로서 종말의 시기를 개시할 것이라는 기도의 일부분.

          (2) 위에서 내려오시는 성령은 이사야서 63,11.14에 대한 암시인데 거기
          서 하느님의 영이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의 시기(Exodus, 탈출기) 동안 이
          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와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3) 비둘기는 호세아서 11,11; 시편 68,14; 74,19; 아가 1,15; 2,14 등
          에서 이스라엘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화합하는
          (according to the Spirit)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대표자로서 나타내
          어지고 있다.

          (4)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사야서 42,1에 대한 암시인데,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예언하는 힘을 가진(prophetic) 성령에 의하여 
          기름 부어진,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 하느님의 거룩한 종이심을 증명
          하고 있다(attests).

 

[주5] 그리스도에게는 단지 (거룩한) 한 위격(person)뿐이나 거룩하고 인간적인 두 개의 본성(natures)들이 있다. 이 가르침은 ‘위격의 일치 교의(dogma of the hypostatic union)’이라고 부른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해설서 시리즈 가-II에 있는 가해 삼위일체 대축일 입문 및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70항 및 제483항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c470.htm

 

“예수님의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다. ... 예수님의 경우에는 세례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셨으나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세례로 이끌기 위하여 종(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자유롭게 받으셨던 것이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of Hippo, 416년),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5.5.3,4]

 

?? 3분 복음/교리 묵상

 

CCCC 251. 그리스도교 입문은 어떻게 시작되는지요?

 

CCC 1212, 1275
그리스도교 입문(Christian initiation)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들을 설정하는 다음의 성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례성사(Baptism)에 의하여 새롭게 태어난 열심 신자(the faithful)들은 견진성사(Confirmation)에 의하여 굳건하게 되며(strengthened) 그리고 성체성사(Eucharist)에 의하여 자라게 됩니다(nourished)(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baptlord_c1212.htm

 

CCCC 252. 그리스도교 입문을 위한 첫 번째 성사는 어떻게 불리는지요?

CCC 1213-1216, 1276-1277
이 성사는, 이 성사가 경축되는 중심 예식 때문에, 주로 세례성사(Baptism)로 불립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에 ‘잠기는’(immerse) 것을 뜻합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잠기어졌다가 ‘새로운 피조물’(2코린토 5,17)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소생하게 됩니다(rises). 이 성사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음’이라고 불리며(티토서 3,5), 그리고 이 성사는 ‘조명(enlightenment)’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세례를 받은 자가 ‘빛의 자녀(son of light)’가 되기 때문입니다(에페소 5,8)(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baptlord_c1213.htm

__________
주: 해설서 본문의 오류수정 및 내용보강 자료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서 제공될 예정이오니 본문 학습에 앞서 꼭 확인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b_baptlor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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