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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7일 복녀 마리아막달레나 마르티넨고 동정♬성프란치스코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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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6-07-26 ㅣ No.1939

 


축일:7월27일
복녀 마리아막달레나 마르티넨고 동정, CAPUCHINESS

Beata Maria Maddalena (Margherita) Martinengo Religiosa
Brescia, 4 ottobre 1687 – 27 luglio 1737
Blessed Mary Magdalene Martinengo,  CAPUCHINESS
Also known as : Margarita Martinengo, Maria Maddalena
Born : 5 October 1687 at Brescia, Italy
Died ; 27 July 1737 of natural causes
Venerated : 5 May 1778
Beatified : 3 June 1900 by Pope Leo XIII
Canonized : pending;


 

복녀 마리아막달레나는 1687년 브레시아에서 태어나
1705년에 카푸친 성 클라라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련장과 수도원장으로 봉사했다.
그녀가 남긴 문헌은 영성생활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짐작하게 한다.
1737년 선종했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넨고는 1688년 이태리 브레시아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고향에 있는 카푸친 글라라 수녀원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특별히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졌으며
단순하고 헌신적인 공동생활을 하였다.
또한 수련장과 원장으로서 공동체에 봉사하기도 하였다.
천상 행복을 그리는 그녀의 생활로 많은 상처 받은 영혼들이 위로를 받았고
하느님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www.ofmconv.or.kr)


 

카푸친 글라라회 회원들의 개혁

이 개혁은 나폴리에서 생겨났는데, Catalonia 출신의 귀족부인, Maria Lorenza Longo에 의해 설립된

"Incurabili" 병원에서 시작 되었다.

이 병원은 프란치스칸 3회원들이 돌보는 곳이었다가 1533년 Thiene 의 성 Cajetan 이 후에 인수한 곳이었다.

1533년 그는 "성녀 글라라의 회칙을 따르는 성 프란치스코의 3회 자매들"

(sisters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under the Rule of St. Clare)의 생활양식을 인준받았다.

바오로 3세는 같은 해에 이 생활 양식을 확인해 주었다.

 

개혁은 이탈리아 도시들 전역으로 퍼져갔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밀라노 였다.

밀라노에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가 세 개의 개혁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이 개혁운동은 후에 스페인과 멕시코, 칠레에 까지 퍼져 나갔다.

 

이 개혁에 있어 가장 현격한 인물은 Maria Maddalena Martinengo(+1737)와

St. Veronica Giuliani(+1727)였다.

(간추린 프란치스칸 역사 강의록 79쪽에서)
 

 

2회 글라라수녀회

프란치스칸 2회인 글라라 수녀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글라라 수녀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린다.
글라라 수녀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현재 한국에는 양양, 양평, 익산, 광주, 인천, 제주에 글라라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성 다미아노 성당 1층 경당

 

성프란치스코가 성녀 글라라에게 써 보내신 유언


1.저 작은 형제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의 생활과 가난을 따르고 끝날 까지
그 생활 안에 항구하기를 원합니다.


2.저의 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간청하며 권고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 생활과 가난 안에서 항상 살아가십시오.


3.그리고 누구의 가르침이나 권고 때문이라도
이 생활을 절대로 떠나지 않도록 온갖 조심을 다하십시오.






하느님 사랑이 불타는 수도승원의 잡역부, 복녀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넨고  


'팔방미인'
"Il facchino del monastero – 수도승원의 잡역부"! 바로 그것은 이탈리아 북구, 베레시아의 (Brescia)'눈의 성 마리아의 수도승원(Monastero di Santa Maria della Neve)'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녀들이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넹고(Martinengo) 자매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32년 동안의 수도생활 동안 그녀는 수련자, 설거지 담당자, 부엌일꾼, 문지기, 원예사, 제빵사, 옷방 담당자, 세탁부, 양모직공, 제화공, 포도주창고 관리인, 재봉사, 사무국장, 자수업자, 제의실담당 보조, 수련장, 개찰구 담당, 대리, 아빠티사의 역할을 각각 한 번씩이나 맡았었다. 모든 면에서, 그녀는 강하고 건강해 보였으나, 죽기 직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수많은 육체적 질병과 몹시 고된 극기와 보속행위들을 숨겨 왔었다. 그렇지만 1705년에 그녀가 만 18살의 처녀로 수도승원에 처음 입적했을 때에, 그녀의 체격과 인상이 매우 여리게 보였기에, 그곳에 사는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승녀들에게는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가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어야 하는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가 지녔던 그 넘치는 기운과 놀랍도록 집요한 인내심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틀림없이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의 끊임없는 기도와 고된 보속 행위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황홀한 사랑으로 키워온 그녀의 은밀한 내면적 생활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호 속에 양육된 여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딸인 그녀는 그 성인의 축일인 1634년 10월 4일에 베레시아의 공작궁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바르코(Barco)의 백작, 프란치스코 레오폴도 마르티넹고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라곤(Aragon)의 마르가리타 세키(Secchi) 귀부인이었다. 그들의 딸아이는 매우 허약한 탓에 곧바로 집에서 세례를 받아야 했고, 마르가리타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기를 낳은 지 5개월 내에 별세했고, 어린 마르가리타 자신의 건강 또한 생후 5년 내내 생사의 갈림길을 헤맬 정도로 매우 위태로웠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혼했고, 만 6살짜리 딸아이의 교육은 우르술라회의 한 수녀에게 맡겨졌다. 이 여가정교사로부터 마르가리타는 읽는 방법과 기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잘 장비된 아버지의 도서관 덕분에 이탈리아어권 문학과 라틴어권 문학에 관하여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나는 독서 안에서 내 모든 만족을 찾았다."라고 진술했다. 어쨌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라틴어 성무일도서였고, 꼬마였을 때에도, 그녀는 좀처럼 묵주를 손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마르가리타는 마차에서 곤두박질친 적이 있었지만, 아무 탈 없이 말굽에 밟히거나 마차 바퀴에 치이는 치명적 사고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유년기 사고 이후, 그녀의 기도는 더욱 강화되었다.

만 11살 즈음, 마르가리타는 아우구스티회 수도승녀들이 운영하는 천사들의 성 마리아의 수녀원 부속 기숙학교에 등록했는데 그 수도승녀들 중의 두 명은 자신의 이모였다. 그녀의 첫 영성체는 상당히 극적이었다. 왜냐하면 성체가 바닥에 떨어지게 되자, 그녀가 그 성체를 혀로 집어서 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염려와 자신이 읽고 있는 성인들의 전기들이 미친 영향 때문에, 그녀는 맨발로 뾰족한 바위들과 날카로운 가시들, 그리고 찔러대는 쐐기풀을 밟고 다니는 그러한 극심한 고행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묵상하는 일에 더욱 더 많은 시간을 바치게 되었다. 그러나 매우 시기심 많고 강압적인 이모들로 인해, 1699년 8월, 마르가리타는 아버지에게 베네딕토회 수도승녀들이 운영하는 성령의 기숙학교에 등록시켜 줄 것을 부탁하게 되었다.

 

한 십대 소녀, 사랑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느끼다
한편, 이세오(Iseo) 호수를 둘러싼 산 속에서 보낸 가족 휴가 동안, 마르가리타는 봉쇄 관상생활에 대해 알아가는 매력을 느끼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그 지방 경치에 매혹되었는지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이 살지 않는 그 알프스 지방과 그곳의 작은 동굴들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들이 나를 그곳에 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늑대들의 (많은) 수(數)가 나를 무섭게만 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나는 그곳으로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성령의 수도승원에도 두 명의 이모가 있었는데, 그들은 아우구스티노회의 이모들만큼 시샘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조카딸의 건강과 결혼적령, 그리고 사교계의 귀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장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열렬한 기도생활과 만 13살 때 그녀가 했던 사적 동정서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베네딕토회의 생활양식에 대한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훗날 그녀는 회상했다. "나는 참으로 지겨웠기에 세상의 모든 황금을 다 준다 해도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종류의 유혹에 시달리며 가족들의 기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를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병이 들었고, 그녀의 말에 의하면, 수녀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투약으로 자신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한다.


 

그녀는 누구의 신부가 되어야 했는가?
그런 후, 그녀는 만 17살 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많은 구혼자들이 이미 그녀를 찾고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베네치아(Venice)의 상원 의원의 아들과 그녀의 혼인을 승낙한 상태였다. 마르가리타의 친오빠들도 그녀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랑이야기로 가득 찬 연애 소설들과 아름다운 디자이너 옷들을 여동생에게 사주곤 했다. 마르가리타는 곧 그런 것들에 현혹되었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소설을 비록 훗날 "지옥에서 온 책"이라고는 했지만, 당시 그녀는 그 책들을 밤낮으로 읽어댔다. 그리고 그녀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옷을 갖춰 입기를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딜레마를 몹시 비통해 하며 성체감실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때에,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카푸친 글라라회의 가공되지 않은 거친 천연양털 옷을 입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환시로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불러내주신 이 영감으로 인해, 마르가리타의 내면에 신비스러운 빛이 온전히 스며들긴 했었지만, 사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그녀는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승녀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때 그녀 나이는 만 18살이었다. 카푸친 글라라회 자매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접한 사람들은 모두들 그 생각에 반대했다. 누구보다도 특히 그녀의 아버지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냈고, 1704년 말 즈음, 그녀는 '눈의 성 마리아 수도승원'의 카푸친 글라라 회원들에게 "저는 거룩해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단순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관습대로, 카푸친 글라라회 자매들은 마르가리타가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복을 착복하기 전에 그녀에게 우르술라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시련기를 거치게 했다. 1795년 사순절 끝나자, 그녀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레오폴도 백작은 딸을 위해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여행하게 해주었다. 실제로, 이것은 그 당시 수도생활을 하려는 귀족가문 출신 여인들에게 흔히 해주는 풍습이었다. 여행 하는 동안, 그녀의 사촌이 마르가리타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청혼하게 되었다. 마르가리타는 그의 청혼을 허락하려 했지만, 어느 충실한 하인이 이 일에 대한 인도를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라고 그녀에게 충고했다. 마르가리타는 밤새도록 기도했고, 아침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성소가 카푸친 글라라회 생활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이 수련자가 '수도승원의 몰락 원인'이 될 것인가?
1705년 9월 8일, 환희에 찬 마차 행렬의 호위를 받은 마르가리타는 '눈의 성 마리아 수도승원'에 도착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봉쇄구역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카푸친 글리라회 수련자의 밤색 수도복과 흰 베일을 착복했고,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융통성 없는 괴짜 수련장의 지도를 받았던 것과 동료 수련자들의 선망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의 1년간의 수련기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서약한 많은 자매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가 성소가 없었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녀가 '수도승원의 몰락원인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 젊은 수련자는 이러한 외면적 반대에 부딪친 것뿐만 아니라, 기도 할 때의 무미건조함과 그 외의 다른 영적인 시련도 겪었다. 수련장이 교체됨으로써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가 항구할 확률이 높아졌고, 결국 1706년 9월 8일, 그녀는 공동체의 만장일치의 지지로 종신 성대서약을 할 수 있었다.


 

카푸친 글라회 수도승녀 생활의 눈에 보이는 단조로움
외부에서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의 남아 있는 31년간의 수도생활은 손일과 기도가 틀에 박힌 단조로운 일상처럼 보일 수 있다. 그녀의 생애는 대부분의 면에서 다른 동료 카푸친 글라라회 회원들의 삶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실, 가끔 병 치례를 하거나 잦은 직무교체를 제외하고, 그녀의 외면적 수도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부분 경우, 가장 하찮은 집안 허드렛일이 그녀의 임무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공동체 자매들의 신뢰를 얻게 된 것으로 보이고, 그들에게 그녀는 차례로 수련장과 대리와 아빠티사로 선출되었다. 수련장과 아빠티사로 그녀는 어머니다운 친근함으로 유명했으나 또한 성녀 클라라의 회칙과 카푸친 수녀들의 고유 회헌과 엄격한 생활양식을 준수할 것을 고집하는 확고부동함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수련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영적 권고를 한 적 있었다. "자신들의 무(無)에 자신들의 기초를 세우시고, 수도생활에 있어서, 오직 잊히고 한구석에 내버려지기만을 바라세요. 이렇게 진멸된 자기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면,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당신의 딸들로 받아들이실 거예요."

그녀의 내면생활의 드라마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의 수도승녀 생활양식의 외면적 단조로움은 결코 단조롭지만은 않은 그녀의 내면적인 생활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의 저서에서 그녀는 자신의 영성생활이 한 편으로는 하느님께 대한 불타오르는 사랑과 심오한 관상기도, 그리고 극적인 신비주의적 체험들로 가득 찬 생활이었음을, 또 한 편으로는 심각한 영적 시련과 극심한 육신적 고통과 스스로에게 부과한 지나친 고행으로 가득 찬 생활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관찰력이 가장 뛰어난 동료자매들의 호기심어린 눈길로부터도 이 영성의 장려한 파노라마를 감추어 왔다. 오직 하느님과 그녀 자신만이 그녀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녀의 고해사제들과 영성지도자들은 어느 정도까지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저서는 이 숨은 생활의 극적이고 아름다운 일면에 대해 약간의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성 삼손의 요한 수사의 영적 격언의 해설, 영적권고, 카푸친 수녀회 회헌의 설명, 겸손에 관한 논문, '신비주의적 대화' 등과 같은 저서가 포함된 그 글의 대부분은 순종으로 쓴 것들이다. 그 저서들은 삼위일체론적이면서도 그리스도론적인 영성을 흠뻑 내 품고 있으며, 십자가와 성체와 성모님께 대한 그녀의 신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 저서의 완성본은 아직까지 마감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느님 사랑에 불붙은 신비가
십대 소녀 시절에도 그녀는 이미 묵상과 기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이제 수도승녀로서 그녀의 기도생활은 정감기도에서 일치기도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그녀는 주부적(注賦的) 관상의 신비로운 은사를 받게 되었다. 1713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계속, 그녀는 자신의 머리와 가슴과 등에서 주님께서 수난하실 때에 겪으셨던 그 고통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이 체험의 결과가 자주 사랑스러운 대화였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있어 나름대로 내 자신의 방법을 따랐지만, 내가 그것을 보다 큰 사랑과 보다 더 많은 성실함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선하심으로 나와 지극히 달콤한 말씀을 주고받으셨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닥에 내 머리를 대었다. 즉시 주님께서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나를 사랑하지만, 나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더 너를 사랑한다.' 내가 그분께 말했다. '주님, 제 마음 가지옵소서. 저는 더 이상 그것을 갖고 싶지 않나이다.' 그분께서는 나의 봉헌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리고 생각건대, 그분께서 내 마음을 제거하시고는 그 자리에 사랑에 온전히 불붙은 당신 자신의 마음을 넣으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자신이 발광(發光)하며 불타오르는 것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기에, 나를 달콤하게 불태우는 그 열정으로 인해 나는 기절해 버렸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피투성이 신부'
하느님 사랑의 불은 계속해서 그녀를 불태웠다. 그 화염을 끄기 위해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믿기가 어려운 정도의 극심한 보속 행위를 가했는데, 그녀의 겸손은 그 보속의 흔적들을 의사들에게도 마저 감추게 했다. 피가 날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과 스파이크들이 박힌 철망을 허리에 차는 것, 그리고 음식에 압생트(쓴 맛이 있는 독한 술의 일종)와 생선 쓸개즙을 첨가하는 것과 자기 몸을 예리한 침으로 찌르는 것이 포함된 그녀의 보속 행위들과 육신적 고행들, 현대의 참관인들이라면 그것을 극심하고 자기학대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살았던 바로크 시절의 수도자들에게는 그러한 관습이 성화에 이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완덕을 지닌 수도생활의 필수조건으로 여겨져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수도승원에 입회했을 때에, 그녀는 십자가 밑에 선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자신이 그분의 '피투성이 신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카푸친 글라라 수도승녀에게 그동안 보속 행위들과 육신적 고행으로 자신에게 부과했던 그 모든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스스로 겪어야 했던 영적 윤리적 시련이었다. 그녀는 기도할 때에 무미건조함을 체험했고 악마의 유혹 공세도 받았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그녀의 고해 사제들 중에 그녀의 영적 시련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의 한 사제는 그녀를 '속아 넘어간 거짓말쟁이요, 영적인 환각에 빠진 자'로 낙인이 찍히기까지 했다. 그 사제는 그녀의 저서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그것들을 모두 불살라버리도록 했다. 그리고 수녀들에게 한 번 공동체 피정지도를 해주었던 어느 반(半)얀센파인 예수회 신부는 젊은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에게 지옥살이에 대한 크나큰 두려움을 불어넣었고, 그로인해 그녀는 병에 걸려 죽을 뻔했을 것 같았다. 수도승원의 대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가 영적인 주제에 관해서 자신의 옛 수련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공동체의 네 명의 자매들은 그녀를 망치는 데에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이 모든 굴욕과 오해를 침묵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고통을 주님의 고통과 일치시켜 죄의 속죄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느님께 그것을 바치곤 했다. 장상들과 고해사제들과 영성지도자들로부터의 그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사람들의 명령에 늘 복종했으며 그들이 시키는 일들을 세세히 모두 다 시행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가장 어려운 일일수록 더욱 더 영웅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 자비의 위로를 받다
이 모든 시련 한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친히 그녀를 위로해 주시곤 했다. 가끔 기도할 때에 그녀는 위로를 주시는 주님과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환시들 또한 체험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그녀가 성체 앞에서 죄를 깊이 뉘우치며 많은 눈물을 쏟으며 기도할 때에, 그녀는 대사제의 옷을 입으신 주님께서 당신의 오른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내미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녀를 안심시키셨다. "딸아, 이것이 네 모든 잘못에 대한 나의 전대사(全大赦)이다!"


 

고해 사제의 영대를 붙잡은 채로 숨을 거둔 그녀
늘 주님의 자비에 기뻐하는 그녀는 1737년,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죽음 자매가 다가오는 동안에 그녀는 몇몇의 성경 구절을 암송하며 기도했으며, 자신 앞에 놓은 바구니에서 딸기 열매 몇 개를 꺼내어, 눈물을 흘리며 임종을 지키는 자매들의 입에 다정하게 넣어 주었다. 그런 다음, 만 50세가 된 수도승원 아빠티사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넹고 자매는 "주님, 제가 지금 가나이다. 제가 지금 가나이다."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고해사제의 영대를 붙잡은 채로 1727년 7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가 자신의 몸에 가했던 그 수많은 고행 행위의 흔적들이 발견되어졌다. 의사들은 그녀가 죽은 지 몇 시간이 흘렀는데도 사후 경직이 일어나지 않는 점에 놀라워했고, 그녀의 시신은 매장되던 순간까지 제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그대로 유지했다. 엄청난 군중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기에, 그녀의 시신은 마지막 안식처까지 근위대들에 의해 호위되어야 했다.


 

유전적 거룩함!
1900년 6월 3일, 마리아 막달레나 자매는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72년에 그녀의 시신은, 최소한 '브레시아'에 있는 각각 다른 두 군데의 성당에 모셔졌다가, 결국 그 도시에 새롭게 건축된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승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녀의 외가 친척들 중에 시성된 유명한 예수회 신학생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가 있는 것을 보면, 거룩함은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넹고의 집안 내역인 것 같다.



"요한의 형상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어머니께 우리 모두를 자녀로 맡기셨습니다. 마치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나의 어머니, 당신께서는 이제부터 죄인들의 참된 어머니요, 변호자이실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당신의 탄원들은 나에게 은혜로이 들릴 것입니다. 각각의 은총은 당신의 손을 거칠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무한한 자비들의 보물고가 될 것입니다.' 지극히 순결하신 동정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이 짧은 몇 마디의 말씀 안에서 아드님의 의향을 알아들으시고 즉시 마음 안에서 그 임무를 받아들이셨으며, 당신의 모든 어머니다운 애정으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 복녀 마리아 막달레나 마르티넹고
 
 

 

가난의 특전 privilege of poorness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 아가 2,6; 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 아가 2,6; 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제주성글라라수도회홈에서)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인창동성당게시판676번,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오상)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성녀 글라라 축일: 8월11일.게시판1312번,1313번.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St. Veronica Giuliani(사랑의 불) 축일:7월19일,게시판1262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트리엔트공의회)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성 가예타노 사제 St. Cajetan of Tienne(테아틴회 설립자) 축일:8월7일,게시판1306번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축일:6월21일,게시판 183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프란치스코의 기도

주여 내 사랑의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주여 당신 사랑의 사랑 때문에
당신을 위해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달게 해 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나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노래: 작은꽃 성가대

 

 


 

 

 

 

 

 

Beata Maria Maddalena (Margherita) Martinengo Religiosa
27 luglio 
Brescia, 4 ottobre 1687 – 27 luglio 1737

Della nobile famiglia Martinengo. All’età di 18 anni entrò nel monastero delle Clarisse Cappuccine. Per le sue esimie virtù, fu ben presto prescelta prima come maestra delle novizie, poi come Abbadessa. Lasciò alcuni scritti di alta mistica. Dotata in vita di carismi celesti e di una visibile conformità a Cristo Crocifisso.

Martirologio Romano: A Brescia, beata Maria Maddalena Martinengo, badessa dell’Ordine delle Clarisse Cappuccine, celebre per i suoi digiuni.

Margherita Martinengo nacque a Brescia il 4 ottobre 1687. La sua era una famiglia importante: il padre, Conte Leopardo, era Capitano della Repubblica Veneta. Per le complicazioni del parto la mamma, Margherita Secchi d’Aragona, morì dopo cinque mesi; la beata ne aveva ereditato il nome. Crebbe in un ambiente sereno, con diverse nutrici, ma nonostante le cure fu sempre malaticcia, soffrendo in particolare di debolezza di stomaco. All’età di cinque anni prese come mamma e modello la Madonna. Frequentò la scuola delle Orsoline manifestando predisposizione per la lettura e la preghiera. Il palazzo dei Martinengo aveva una ricca biblioteca, oltre a molte opere d’arte. Di quegli anni si ricorda un episodio singolare: un giorno cadde dalla carrozza in corsa senza farsi alcun male. Disse di aver sentito il suo Angelo Custode prenderla in braccio. A dieci anni fu accolta dalle Agostiniane, ove vi erano due zie, per perfezionare la sua istruzione e la sua spiritualità. Il momento tanto atteso della Prima Comunione ebbe un risvolto eccezionale: la sacra particola cadde a terra, Margherita si prostrò e la prese dal pavimento. Un freddo improvviso la scosse, sentì dentro di sé la presenza di Dio. Due anni dopo, per sottrarsi alle attenzioni delle due zie monache, andò dalle Benedettine dove erano religiose altre due zie. Anche queste però erano più preoccupate della sua futura collocazione sociale che del travaglio interiore che stava vivendo. Con le altre convittrici era allegra e vivace e amava ripetere che voleva farsi santa. Pensavano scherzasse, ma il Signore faceva sul serio. A tredici anni fece voto segreto di verginità. Tre anni dopo si prospettò l’idea di un buon matrimonio: Margherita disse al padre che voleva farsi cappuccina, ma trovò una ferma opposizione. Seguirono mesi di incertezze. Fece un periodo di prova proprio dalle Cappuccine, poi un viaggio col padre a Venezia. Tornata a casa passò un’intera notte in preghiera, poi prese la decisione definitiva: le vesti eleganti da contessina cedevano il posto al rude saio.
Entrò in monastero l’8 settembre 1705, condotta da un corteo di carrozze. Scrisse: “che spasimo provai quando feci l’ingresso! Diedi quel passo con tanta violenza che credo di certo non sarà più grande quella del separarsi l’anima dal corpo”. Prendeva il nome della Penitente che era stata la prima Testimone del Risorto.
La vita della comunità, una trentina di suore, era scandita dalla preghiera, cinque ore di giorno e tre di notte, e dal lavoro. Il rapporto con la maestra delle novizie fu burrascoso, ma suor Maria Maddalena soffrì nel silenzio. Per nulla al mondo, anche se le sue origini erano nobili, avrebbe voluto primeggiare. Le novizie svolgevano i lavori più semplici: coltivare l’orto, accudire agli animali, cucinare. Essa non li aveva mai fatti prima eppure era tra quelle che lavoravano di più. Soprattutto però ebbe inizio un rapporto profondo col Signore, scrisse: “la mia orazione non ha mai principio perché non ha mai fine, vivendo sempre unita a Dio nel mio interno”. Le sue facoltà erano “tutte ingolfate in Dio”. Alcune ore della notte, invece del riposo, le dedicava alla preghiera, “specchio nel quale si mira Dio”. La sua unione con l’Altissimo è totale: “quanto più mi profondo nel mio niente tanto più mi perdo in Dio e mi scordo del tutto di me”. Amava molto il silenzio ma col suo carattere gioviale non mancava di rallegrare le consorelle con composizioni poetiche. Iniziarono i disturbi di salute che l’accompagneranno per tutta la vita.
Fece la professione con un “amore ardentissimo a Dio intenso e continuo, che abbruci ogni difetto ogni imperfezione ogni neo di colpa”. L’umile suora iniziò anche un magistero attraverso la corrispondenza diretta ai familiari e a religiose di altri monasteri. Cristo “parve mi si mutasse il cuore, dandomi Gesù il suo divin cuore, vera fornace di sempiterno amore”. Aveva il grande timore di non essere diligente. Era consueto, a quei tempi, imporsi penitenze con cilici, suor Maria Maddalena ne aveva a decine. Guardava Colui che si era caricato di tutti i mali del mondo morendo sulla croce. Quali mai potevano essere i suoi peccati? La risposta è che chi vuole uniformarsi a Dio si sente continuamente imperfetto: “la strada del patire e dell’annegar se stessi è la più breve per giunger al possesso del Sommo Bene”. Il Venerdì Santo del 1721 Maria Maddalena ebbe il dono dello sposalizio mistico, alle consorelle che avevano sentore delle sue esperienze diceva “pensate un po’ se il Signore vuol fare a me miserabile tali favori”.
A trentasei anni fu nominata maestra delle novizie, incarico importante e delicato; lo sarà tre volte. La sua condotta suscitò gelosie e alcune suore le divennero “contrarie”: Dio la metteva alla prova. Col successivo incarico di “ruotara” ebbe rapporti con l’esterno e la sua fama si diffuse nella città. Nel 1732 fu eletta badessa. Temendo che non fosse rispettato abbastanza il voto di povertà, mandò alcuni paramenti della chiesa alle Cappuccine di Venezia. Non mancarono le tentazioni: “vivo come una creatura esiliata e dal cielo e dalla terra, tanto arida e desolata, senza sentimento di Dio”.
Il 18 luglio 1734 ebbe la prima emottisi, lo rivelò a poche. Il suo corpo, già provato da tante penitenze, deperì velocemente. Il 12 luglio 1736 fu nuovamente eletta badessa. Una delle “contrarie” dirà che nel suo governo c’era qualcosa di divino. All’affanno dei medici rispondeva “io spero di aver presto a morire per tante cose ch’essi non sanno. Sono tutta in Dio, non penso ad altro”. Gli ultimi mesi furono penosi, soffrendo meditava la Passione di Cristo: “i misteri della sua santissima vita e passione e morte li ho tutti scolpiti nel cuore, non per averli meditati, ma per averli veduti”. Tutti i particolari delle ultime giornate furono annotati dalle consorelle. Qualche anno prima aveva scritto: “che contenti per un’anima nel mirare il crocifisso che l’è posto nell’ultima agonia in mano!”. Spirò, da poco passata l’una di notte, il 27 luglio 1737. Qualche ora dopo tutta Brescia le rese omaggio.
La Beata Maria Maddalena Martinengo è una grande mistica francescana, con influssi di spiritualità carmelitana. Possediamo numerosi suoi scritti, sia diretti alle consorelle che autobiografici, redatti per obbedienza ai confessori e che tanto le costarono. Erano cose “intese dall’anima per esperienza e non per scienza”. “Tante cose le intendo, ma non so spiegarle; altre le spiego, ma dico spropositi”. A noi oggi dice: “O creature tutte, perché non correte ad amare sì smisurata bontà di Dio?”.
Leone XIII la proclamò beata il 18 aprile 1900.

Autore: Daniele Bolognin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5-02-16

 

 

 

 


Blessed Mary Magdalene Martinengo
 
Also known as
 Margarita Martinengo
 Maria Maddalena


Memorial
27 July


Profile
Italian nobility. Lost her mother while still an infant, a trauma that affected her deeply, and led her to intense religious devotion and prayer. At age 18 she joined the Capuchinesses of Santa Maria della Neve in Brescia, and spent the rest of her life in the convent. Recognized in the convent for her holiness and prayer life. Twice prioress, and served several years as novice mistress. Worked to promote devotion to Christ Crucified, and used her own example to encourage penance and personal sacrifice for the Lord.


Born
5 October 1687 at Brescia, Italy


Died
27 July 1737 of natural causes


Venerated
5 May 1778


Beatified
3 June 1900 by Pope Leo XIII


Canonized
pending;
if you have information relevant to the canonization of Blessed Mary, contact
   Monastero dell’Immacolata
   Via Arimanno, 17
   25127 Brescia, ITALY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Google Directory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MARY MAGDALENE MARTINENGO
Memorial
27 July
Profile
Italian nobility. Lost her mother while still an infant, a trauma that affected her deeply, and led her to intense religious devotion and prayer. At age 18 she joined the Capuchinesses of Santa Maria della Neve in Brescia, and spent the rest of her life in the convent. Recognized in the convent for her holiness and prayer life. Twice prioress, and served several years as novice mistress. Worked to promote devotion to Christ Crucified, and used her own example to encourage penance and personal sacrifice for the Lord.
Born
1687 at Brescia, Italy
Died
1737 of natural causes
Beatified
1900 by Pope Leo XIII
Canonized
p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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