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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6일(9월27일)성 엘제아리오와 복녀 델피아 부부OFS♬평화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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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07-20 ㅣ No.2016

 
 

축일:9월26일(9월27일)
성 엘제아리오와 복녀 델피아 부부,OFS
St. Elzear of Sabran and Bl. Delphina, husband and wife, III Order (For the III Order)

Sant'' Elzeario Conte di Ariano
27 settembre 
Martirologio Romano: A Parigi in Francia, sant’Elzeáro di Sabran
St. Elzear
Born : 1285 at Ansouis, Provence, France
Died : 27 September 1323 in Paris, France of natural causes
Canonized : 1369 by Pope Urban V

Beata Delfina di Signe Vedova
26 novembre 
Puimichel, Francia, c. 1285 - Apt, Francia, 1360
Blessed Delphine
Born : 1283 at Chateau-Puy-Michel in Languedoc, France
Died :  26 November 1360; buried next to Elzear at Apt



  성 엘제아리오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복녀 델피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3회에 속하여 회원들의 영광을 더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과감하게 가난한 이와 나누었고
기도와 선행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였다.
성 엘제아리오는 1323년 9월27일에, 복녀 델피나는 1358년 11월26일에 세상을 떠났다.
 
  복된 엘제아리오와 델피나 부부를 통하여 혼인생활에서 뛰어난 성덕의 모범을
저희에게  주신 하느님, 간절히 비오니 지상에서 그들의 경건한 삶을 공경하는 저희가
천상에서 그들과 함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발자취를 따라서-재속 프란치스코회 지침서에서) 



   사브랑(Sabran)의 성 엘제아리우스(Elzearius, 또는 엘제아리오)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앙주이(Ansouis)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비앙(Robians)의 부친 성에서 태어났고,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의 원장인 사브랑의 빌리암(William)으로부터 교육받고 성장하였다. 수도원장은 그의 아저씨였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고, 1299년에 소유권 및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서 같은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의 딸인 델피나(Delphina, 12월 9일)와 결혼하였다. 알프스맥 저지대에 위치한 퓌미셸(Puimichel) 성에서 태어난 델피나는 당시 15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앙주이에서 살다가, 곧 퓌미셸 성으로 옮겨 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지녔으며, 델피나는 남편을 따라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또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이 거룩한 부부는 관상과 기도를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선행과 애덕 실천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며 삶으로써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성 엘제아리우스는 매일같이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의 나이 23세 때에 부친의 명예와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이에 따르는 온갖 위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한 신심과 지혜로써 세속적인 재물을 다스렸다. 또한 그는 국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탁으로 파리(Paris)에 대사로 갔다가 중병을 얻어 1323년 9월 27일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즉시 총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매일 묵상함으로써 온갖 고통을 이겨냈다. 노자성체를 영하면서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나의 희망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어느 작은 형제회 회원의 팔에 안겨 영광된 삶을 마쳤다.



   1309년경에 그는 자신의 조카인 그리모아드의 빌리암의 대부를 섰는데, 빌리암은 나중에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교황이 되었고, 1369년 4월 15일 자신의 대부인 엘제아리우스를 시성하였다. 한편 델피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37년을 더 살았는데, 그녀는 그 동안에 나폴리(Napoli)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녀가 된 나폴리 여왕 산치아(Sanchia)와 함께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서 살았다. 그녀와 여왕은 절친한 사이였다. 델피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많은 자선을 베푸는 등 은수자처럼 생활하다가 1360년에 사망하였다. 델피나는 1363년부터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791년 델피나의 유해는 앱트(Apt)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남편의 유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 '엘제아리오와 델피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2년, 6077-6078쪽.  (가톨릭홈에서)

 

 

San Francesco abbraccia Gesu crocefisso 

프란치스코성인께서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

1.회개하는 이들
1)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마태 22,39) 사랑하고,
2) 악습 및 죄악과 더불어 자신들의 육신을 미워하며,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4)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
5) 오, 그런 일을 실행하며 항구하는 남녀 모든 이들을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6) 주님의 영이 그들 위에 내리고(이사 11,2), 주님이 그들을 거처와 집으로 삼으실 것이며(요한 14,23),
7) 그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들이요 형제들이요 어머니들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12,50).
8)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9)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마태 12, 50)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에게 형제들이 됩니다. 
10)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

11)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아버지를 하늘에서 모시는 것은, 오,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12) 위로되시고 아름다우시고 감탄할 만하신 그러한 정배를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13) (아버지의 마음에)드시고 겸손하시고 평화로우시고 달콤하시고 사랑할 만하시고
또한 무엇보다도 바랄 만한 그러한 형제와 그러한 아들을 모시는 것이 오,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일인지! 
이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비치셨고(참조: 요한 10,15)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14)거룩하신 아버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나에게 맡겨 주신(요한 17,6)
이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십시오.(요한 17,11). 
15) 그리고 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참으로 믿었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16)나는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요한 17,8-9). 
17) 그들을 축복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요한 17,17).
그들을 위하여 나도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요한 17,19). 
18)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간구합니다.(요한 17,20).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요한 17,11)  이들도 거룩해져 하나가 되게 하소서(참조 : 요한 17,23) 
19) 그리고 아버지,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시고(요한 17,24),
당신의 나라에서(마태 20,21)나의 사랑을 그들이 볼 수 있게 하소서(요한 17,24).아멘.

  

성프란치스코.나환자와 함께

2. 회개하지 않는 이들
1) 그런데 회개 중에 있지 않고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지 않으며 
3) 악습과 죄악을 일삼고 욕정과 자기 육신의 나쁜 욕망을 좇아 다니며, 
4) 하느님께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고, 
5) 육적인 욕망을 가지고 세속의 걱정과 살아갈 근심에 싸여 세상을 육적으로 섬기는 남녀 모든 사람들, 
6) 악마의 짓을 그대로 하고 악마의 자식들이 된 이들은 악마에게 붙들려 눈이 멀었습니다.
7) 참된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8) 그들은 아버지의 참된 지혜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기에 영적인 지혜를 가지지 못합니다. 
9) 그들에 관하여 이런 말이 있습니다 : "한다한 그 재주도 다하였다"(시편 106,27). 그리고 : "당신의 영을 어기는 자는 저주를 받나이다"(시편 118,21). 
10)그런 이들은 악을 보고 알아채며 알면서도 행하여, 고의로 자기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11) 눈을 뜨십시오, 소경들이여, 그대들은 우리 원수들인 육신과 세속과 마귀에 속았습니다. 죄를 짓는 일은 육신에 달콤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육신에 씁니다. 
12)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모든 악습과 죄악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솟아 나오기"(참조 :마르 7,21)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그대들은 이승에서도 내세에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합니다. 
14) 그리고 그대들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오랫동안 소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속았습니다.
그대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모르고 있는 그 날과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쇠약해지고 죽음이 다가오고 결국 육신은 쓰디쓴 죽음을 당합니다.
15)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람이 죽든 보속을 할 수 있는데도 보속을 하지 않고 회개와 보속 없이 대죄 중에 죽으면, 당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한 고통과 시련 중에 마귀는 그의 몸에서 그의 영혼을 빼앗아 갑니다. 
16) 그리고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재능과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빼앗깁니다. 
17) 그리고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유산을 넘겨주었고 이들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은 나중에 말했습니다 : 그는 우리에게 더 많이 줄 수 있었고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던 재산을 벌지 못했으니, 그의 영혼은 저주나 받아라. 
18) 벌레들이 시체를 먹어 버립니다. 이리하여 그는 짧은 이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을 잃고 끝없이 고통받을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19) 이 편지를 받으시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참조 : 1요한 4,16) 부탁합니다 :
위에서 언급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잘 받아들이십시오.
20) 그리고 글 모르는 사람들은 읽어달라고 자주 부탁하십시오.
21) 그리고 이 말씀들이 "영과 생명이니"(요한 6,63) 거룩한 행동으로 끝날까지 간직하십시오.
22) 그리고 이것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참조 :로마 14,10) "심판 날에 헴 바쳐야 할 것입니다"(참조 :마태 12,36).

  

  Il Crocefisso di San Damiano
 

재속 프란치스코회란?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Ordo Franciscanus Saecularis" 라는 명칭은 이전까지 ’프란치스코 3회’라고 불리우던 것을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78年 새 회칙을 인가하시면서 붙여준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천년의 긴 역사를 살아오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수많은 영적 가족들을 탄생시켰고,
그 중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신 1, 2, 3회의 영적가족이 있으니
그 숫자가 오늘까지 8백년 동안 수천만에 이르렀고 현재의 가족수도 백만이 훨씬 넘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가족들
1회는 프란치스코 남자 수도회를 말하고,
2회는 글라라회라고 불리우는 여자수도회(관상수녀회)이며,
3회에는 수도생활을 하는 정규3회,수도자인 수도 3회와 재속 신분으로 구성된 재속프란치스코회를 말하며,
(전국 51개의 형제회와 6,5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들 프란치스코 영적 가족의 공통된 특징은 말할것도 없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세 가족의 친교와 고유 역할
이 세가족은 활기에 찬 친교를 이루면서도 각기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실천한 빛나는 영성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교회가 더욱 주님의 거룩하심으로 충만되도록 돕는다.

"선교활동"을 펴서 이 세상을 하루 빨리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로 돌아오는데에 그 공동목표를 두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전국, 국제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조직체이다.
"입회자격은, 50세 미만의 가톨릭 신자이면 되고, 영세한지 3년이상. 견진성사를 받은 자라야 합니다.

교황이 인가한 세계적 공동체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성 프란치스코 가족 중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가지고
온세계 모든 평신도와 재속 사제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교황이 인가한 회칙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계층의 형제회,
즉 지역, 지구, 국가형제회들을 묶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기원과 발전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사도적 여행을 한 1212년경,
기혼 남녀 평신도들이 프란치스코와 그 동료들의 복음적 생활에 매력을 느껴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르려고 헌신하였던데서 비롯하였다.
당시에 귀족이나 천민이나 성직자나 평신도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이끌려
프란치스코에게 오기 시작하여 성인은 제3회를 생각했고,
그들에게 생활규범과 모든계층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복자 루케치오 와 보나돈나 부부가 첫회원으로 알려져있다.

3회 배출 성인
제3회가 배출한 성인은 성 루도비꼬, 성 토마스모어, 성 요한 비안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등 60여명이 되고,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바오로 6세까지 20여명의 교황과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시성 단테, 예술가 미켈란젤로, 라파엘, 탐험가 콜럼버스,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 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 프레데릭 오자남 등
각계 각층에서 3회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교회를 빛냈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복자 루케치오와 복녀 보나돈나 부부(재속프란치스코회 첫회원) 축일:4월28일,게시판 1737번.

*성왕 루도비코 9세(3회 주보성인)축일:8월25일.인창동성당게시판1331번.
*성 토마스 모어 순교자(정치인들의 수호성인:축일:6월22일.게시판1237번.
*성 요한 비안네 사제(본당사제의수호성인)축일:8월4일.게시판1302번.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3회 주보성녀)축일;11월17일.게시판1474번.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 동정 축일:9월4일.게시판1348번.
*복자 프레데릭 오자남(빈첸시오와 바울로회 창설자)축일:9월8일.게시판1356번.
*레지오마리애 창설자 프랭크 더프(Frank Duff):1921년9월7일 레지오 마리애를 창설.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an Francesco a Subiaco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 역사

일본의 조선인 재속 3회원
한국의 첫 재속 프란치스칸은 1922년 미국 유학 중
재속 3회에 입회하여 서약한 장 면(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400여 년 전에 이미 조선인 재속 3회원이 있었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생활 중에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들의 쓰라린 생활을 극복해 나갔다.
그 당시 일본에는 프란치스꼬 회원들이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조선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프란치스꼬 재속 3회에 입회했던 것이다.

159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26명이 나가사끼에서 순교의 화관을 쓰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프란치스칸으로 성 베드로 밥티스타를 비롯하여 17명의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1627년에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862년 6월 8일에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또한, 1867년 7월 2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205위 중 두 명도
한국인 프란치스꼬 재속 3회원이었다.
한 명은 파스칼 보스이고, 다른 한 명은 가이오리 에몬인데 모두 같은 날 순교했다.
따라서 한국의 3회의 역사에 있어 그 첫 자리는 일본에서 3회원이 된 순교자들이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일본의 순교자]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축일:2월 6일(게시판1605번)
일본에서 태어난 바오로 미키(1564,1565-1507년) 성인은 예수회에 들어간 다음,
복음을 널리 퍼뜨리는 데 큰일을 하였다.
박해 때 다른 동료 25명과 붙잡혔는데,
그 25명은 베드로 밥티스타와 5명의 프란치스코 제1회 회원들과 17명의 제 3회 회원을,
그리고 미키 신부와 일하던 2명의 교리교사였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

성 레오 가라수마루
ST. LEO KARASUMARU
in Owari, Korea -
crucified on 5 February 1597 at Tateyama (Hill of Wheat), Nagasaki, Japan
First Korean Franciscan tertiary 

한국 태생인 그는 원래 이방 종교의 사제가 되었으나,
1589년에 일본에서 예수회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꼬 회원이 되었고, 또 전교 회장이 되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일본 내의 크리스챤 박해 동안,
그와 25명의 다른 교우들은 1597년 2월 5일에 나가사끼 교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와 함께 그의 동생 바오로 이바라끼 및 그들의 20세 되는 조카 루도비꼬 이바라끼가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1862년의 일본 순교자로 간주되어 시성되었다.

*동료순교자
*성 베드로 밥티스타 사제 순교자(1회)축일:2월6일.게시판1605번
*성 바오로 스즈끼 순교자(3회)
*성 레오 가라수마루 순교자(3회):한국인으로 첫번째 재속 프란치스코회원
*성 바오로 이바라끼 순교자(3회):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동생
*성 루도비꼬 이바라끼(3회):성 레오 가라수마루의 조카
*복자 파스칼 보스(3회):한국인.
*복자 가이오리 에몬(3회):한국인.


 

♬평화의 기도

 

 

 

 

평화의 기도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주여,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자기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잊음으로써 찾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고,   
죽음으로써 영생으로 부활하리니.
- 성 프란치스코

 

Italiano  

PACE E BENE
O! Signore, fa di me
uno strumento della
tua Pace:

Dove e odio, fa ch’io
porti l’Amore
Dove e offesa, ch’io
porti il Perdono.
Dove e discordia,
ch’io porti l’Unione.
Dove e dubbio, ch’io
porti la Fede.
Dove e errore, ch’io
porti la Verita.
Dove e disperazione,
ch’io porti la
Speranza.
Dove e tristezza,
ch’io porti la Gioia.
Dove sono le tenebre,
ch’io porti la Luce.

O! Maestro, fa ch’io
non cerchi tanto:
Ad essere consolato,
quanto a consolare.
Ad essere compreso,
quanto a
comprendere.
Ad essere amato,
quanto ad amare.

Poiche:
e Dando, che si riceve:
Perdonando che si e
perdonati;
Morendo, che si
risuscita a Vita
Eterna.
- San Francesco

 

English 

PEACE AND GOOD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let me sow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let me sow unity
Where there is doubt,
let me sow faith
Where there is error,
let me sow truth
Where there is despair,
let me sow hope
Where there is sadness,
let me sow joy
Where there is darkness,
let me sow light.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m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into eternal life.
- St. Francis

....................

English 

Peace Prayer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bring love.
Where there is injury, let me bring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let me bring union.
Where there is doubt, let me bring faith.
Where there is error, let me bring truth.
Where there is despair, let me bring hope.
Where there is sadness, let me bring joy.
Where there is darkness, let me bring light.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Sant' Elzeario Conte di Ariano
27 settembre 

Martirologio Romano: A Parigi in Francia, sant’Elzeáro di Sabran, che, conte di Ariano, osservata la verginità e tutte le altre virtù insieme a sua moglie, la beata Delfina, morì in ancor florida età.


Un santo laico del XIII secolo, francese di nascita, sposo casto, condottiero di esercito, difensore del papa, è compatrono di Ariano Irpino città dell’Avellinese, di cui porta il titolo di conte.
Elzeario, il cui nome nei vari processi di canonizzazione è modificato in vari modi fra latino, lingua volgare e francese, nacque ad Apt in Provenza fra il 1284 e il 1287, primogenito di Ermengao de Sabran conte di Ariano e di Laudana d’Albe de Roquemartine.
Studiò presso lo zio Guglielmo de Sabran, abate del monastero benedettino di S. Vittore in Marsiglia. Per volere del re Carlo II d’Angiò, dovette sposare verso i 18 anni nel 1299, la futura beata Delfina di Signe, così pur non volendo, si incontrarono due anime belle, che riluttanti al matrimonio, stabilirono di comune accordo, di conservare la loro castità..
Elzeario, morto il padre, ereditò fra l’altro il titolo di conte d’Ariano, quindi venne in Italia, in Irpinia, per prendere possesso della contea, ma l’accoglienza di quel popolo fu ostile, in quanto contrario al vassallaggio, preferendo dipendere direttamente dal re.
Fu suo merito e per le virtù professate, che riuscì a conquistare l’amore del popolo, per questo fu apprezzato dal re di Napoli Roberto d’Angiò, che quando nel 1312, fu necessario inviare dei soldati in aiuto del papa assediato a Roma dall’esercito dell’imperatore Enrico VII di Lussemburgo, ne affidò il comando ad Elzeario.
Fu inoltre incaricato di delicate missioni presso la corte di Francia, dove nel 1323, durante uno di questi incarichi, si ammalò gravemente, tanto da morire a Parigi il 27 settembre 1323 a soli 38 anni; fu sepolto ad Apt nella chiesa dei Francescani, di cui era fedele Terziario.
La sua fama di grande uomo di carità, specie nell’assistenza ai lebbrosi, si diffuse largamente al punto di attirare l’interesse dei pontefici dell’epoca e fu proprio papa Urbano V, che era suo figlioccio di battesimo, che ne riconobbe la santità, ma che venne poi proclamata ufficialmente il 5 gennaio 1371 dal suo successore papa Gregorio XI.
Le sue reliquie furono trasferite nel 1791 dalla chiesa francescana di Apt, alla cattedrale della città, dove sono tuttora venerate, insieme a quelle della sua casta sposa, la beata Delfina.
Ha culto liturgico in Apt, in Avignone, nella Badia di S. Vittore di Marsiglia, nell’Ordine Francescano e in Ariano Irpino, dove nel giorno della sua festa il 27 settembre, si tiene un’antichissima fiera con grande partecipazione di popolo.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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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2-09-14

 



Beata Delfina di Signe Vedova
26 novembre 
Puimichel, Francia, c. 1285 - Apt, Francia, 1360
Martirologio Romano: Ad Apt nella Provenza in Francia, beata Delfina, che, moglie di sant’Elze­aro di Sabran, insieme al quale fece voto di castità, dopo la morte del marito visse in povertà e dedita alla preghiera. 


Delfina è nata infatti a Puimichel, probabilmente nel 1285. Era figlia del signore del luogo. La madre era di Barras, a circa dieci chilometri da Digne. Giovanissima, Delfina perde i genitori, ha una sorellastra, dal leggiadro nome di Alayette, che entra presto in convento. Quanto a Delfina, i parenti che le restano, degli zii, la mettono nel monastero agostiniano di Santa Caterina, a Soys, dove si trova sua zia, una certa suor Cecilia, che probabilmente esercita una forte influenza sulla bambina. I suoi zii la riprendono quando ha tredici anni, poiché la vogliono maritare.
Carlo II d'Angiò, re di Sicilia, la destinava al figlio del conte di Ariano. Delfina rifiuta: dichiara alla sua famiglia che ha deciso di restare vergine e di votarsi a Dio. Furore degli zii, che insistono tanto più in quanto temono che il re fraintenda la causa del rifiuto, e vi veda una maniera mascherata di respingere la domanda. Per cercare di convincere la fanciulla, e ritenendo che un religioso la potrà influenzare meglio di loro, fanno intervenire un francescano, a cui Delfina comunica esplicitamente la sua intenzione di votarsi a Dio. Il religioso le spiega la difficile situazione in cui metterebbe la sua famiglia, e le consiglia di consentire comunque al fidanzamento, salvo poi rifiutare il matrimonio, in seguito. Delfina si lascia persuadere e scambia le promesse richieste con il giovane Elzeario (Auzias) di Sabran, probabilmente nel 1297.
Due anni dopo, il 5 febbraio 1300, il matrimonio è celebrato ad Avignone. Delfina ha quindici anni, due di più del giovane sposo. Quando quest'ultimo le parla di rapporti sessuali, risponde invocando l'esempio di Cecilia e di Valeriano suo sposo, nell'antichità, oppure la vicenda di Alessio che abbandonò il tetto familiare la sera delle sue nozze. E lo fa con tanta gentilezza, si legge nel processo di beatificazione di Delfina, che Elzeario " si mise a piangere, per un senso fortissimo di devozione ".
Tuttavia, senza scoraggiarsi, ogni tanto insiste con la giovane moglie, al punto che un giorno essa si ammala, colpita da una forte febbre, e fa sapere al suo sposo che guarirà solo se egli le prometterà di vivere accanto a lei in uno stato di astinenza perpetua.
Poco dopo Elzeario parte per assistere a una vestizione nel castello di Sault. Durante questa assenza riflette profondamente sulla richiesta di una sposa che ama, e decide di accettare la sorprendente situazione che ne deriva per entrambi.
Poiché era morto suo padre, dovette recarsi in Italia per regolare la successione; la sua assenza si sarebbe protratta per quattro anni. Quando ritorna, Delfina gli confessa di avere fatto voto di verginità nella cappella del castello di Ansouis, Lungi dall'adombrarsi, Elzeario vuole pronunciare lo stesso voto; dopodiché i due sposi ricevono insieme la comunione dalle mani del loro confessore. Entrambi trascorrono la vita compiendo opere buone, tanto quanto possono. Pur amministrando i suoi beni e possedimenti, Elzeario ha riunito a Puimichel una piccola comunità che accetta una regola di vita che potremmo dire monacale: funzioni religiose, discorsi spirituali, opere di carità. Apparentemente vive come un gran signore del suo tempo, ma ha visioni mistiche; e, sebbene Elzeario condivida il letto della sua sposa, quest'ultima dorme vestita, ed entrambi quando sono soli nella loro camera si alzano e pregano insieme.
Elzeario fu inviato alla corte di Francia per un'ambasciata: si trattava di proporre una sposa per il duca di Calabria. Durante questa assenza, mentre si trovava ad Avignone e pregava, Delfina ebbe improvvisamente la visione di tutta la famiglia del conte vestita di nero. Capì che Elzeario era morto. E infatti qualche tempo dopo la notizia giungeva da Parigi alla Provenza. Delfina pianse a lungo quello sposo così amato, fino al giorno in cui, mentre pregava nuovamente, nella sua camera, a Cabrières, egli le apparve e disse: " II nostro vincolo si è spezzato; ne siamo liberi ". Infatti entrambi erano ormai liberi da quel legame coniugale che era stato insieme la loro gioia e il loro tormento. In seguito Delfina decise di vendere tutto quello che possedeva per darne il ricavato ai poveri, prendendo alla lettera le parole del Vangelo; prima i beni mobili, poi i castelli. Poiché la regina di Sicilia, Sancia, moglie del re Roberto, glielo chiese, si recò a Casasana in Sicilia, dove restò parecchi anni per prendersi cura della regina e farle compagnia. Lì fece voto di povertà assoluta, conforme all'iniziativa presa in Provenza. Convocò i suoi familiari, i domestici, dichiarando che tutto ciò che si trovava nella sua residenza apparteneva loro e che ne avrebbero goduto vita natural durante, con l'obbligo di donare tutto ai poveri dopo la morte; "Se, per amore di Dio, vi piacesse tenermi con voi, insieme a mia sorella monaca, e procurarci le cose necessarie alla vita come fareste con due donne povere qualsiasi, spero che Dio vi compenserà... E voglio che d'ora in poi non mi consideriate più come la vostra signora, ma solo come vostra compagna e come una semplice pellegrina che avete ospitato in nome di Cristo". Ritornata in Provenza, partecipava a tutti i lavori domestici e specialmente a quelli più semplici, come scopare o lavare i piatti. Portava solo abiti grossolani di semplice bigello, e, in testa, un velo di tela di lino.
Delfina morì trentasette anni dopo il suo sposo, nel 1360, "il giorno successivo a Santa Caterina, all'aurora". Aveva settantasei anni, ed era già malata da parecchio tempo. Elzeario era stato dichiarato santo dopo un processo avviato nel 1351. Tre anni dopo la morte di Delfina cominciava anche il suo processo di beatificazione. Le persone del suo ambiente riferirono numerosi miracoli accaduti poco dopo la sua morte. Infatti il 26 novembre 1360 il suo corpo, rivestito del saio dei frati minori, era stato trasportato nella chiesa di Santa Caterina. La notte successiva si udì risuonare una musica armoniosa, riferiscono dei testimoni. Molti dichiarano di essere usciti per vedere donde provenissero quei canti, ma, poiché non videro nessuno, li attribuirono ai cori angelici. Un certo Stefano Martino, che non poteva camminare senza le grucce, entrò nella chiesa e ne uscì guarito, quel 26 novembre; e il giorno dopo il procuratore di Apt, Raybaud de Saint-Mitre, che aveva deciso di offrire un pasto ai poveri nella casa della contessa, fu sorpreso vedendo arrivare molte più persone di quelle previste. Egli aveva fatto cuocere solo un'émine, vale a dire circa cinque litri di piselli; ce ne sarebbe voluto il triplo, per nutrire le duecento persone circa che si presentarono; ma dopo che tutti ebbero mangiato rimase ancora una grossa marmitta piena di piselli.
Dunque i miracoli si susseguirono dopo la morte di Delfina, tanto che, nel 1363, fu intrapreso il suo processo di canonizzazione. L'arcivescovo di Aix, i vescovi di Vaison e di Sisteron furono incaricati dell'indagine, che cominciò il 14 maggio 1363 ad Apt, nella chiesa dei Cordiglieri, Una seduta solenne nella cattedrale riunì tutta la folla, che approvò il processo e dichiarò la santità della contessa d'Ariano.
Da quel momento il processo con le deposizioni dei testimoni oculari è considerato concluso. Il testo è consegnato al papa nell'ottobre successivo. Ma a questo punto i penosi eventi che affliggevano la cristianità avevano un contraccolpo. Urbano V, che allora occupava il trono pontificio di Avignone, e che era il figlioccio di Elzeario, si trovava in una posizione difficile. Desiderava rientrare a Roma, effettuò persino un ritorno che sarebbe stato brevissimo, e preferì rinviare la canonizzazione di Delfina. Poi si succedono, ad Avignone, dal 1378, pontefici eletti in condizioni più che dubbie, e con i quali si apre il periodo chiamato del Grande Scisma. Occorre attendere il 1417 perché siano ristabilite, nella Chiesa, la pace e l'unità. Nel frattempo, nella cappella dei Cordiglieri di Apt, il corpo di Delfina era stato deposto in una cassa vicino a quella che conteneva le spoglie del suo sposo sant'Erario. Il tempo passava. Il processo non fu mai ripreso. Elzeario è sempre venerato come santo, mentre Delfina ha solo diritto al titolo di beata.
Lo strano destino di questa coppia di santi assume tutto il suo rilievo solo se è collocato sullo sfondo tragico e perturbato in cui visse. Sappiamo che nel XIV secolo hanno luogo grandi catastrofi naturali; la carestia del 1315-16, la peste nera del 1348; e, oltre alle guerre franco-inglesi, la cristianità è in uno stato di incertezza di fronte a un papato un poco indebolito, tenuto al guinzaglio dal re di Francia e dall'Università di Parigi, e residente ad Avignone dal 1309. In quest'epoca così perturbata, la santità di questa coppia vergine e totalmente accordata con la vita del Regno di Dio e i destini escatologici dell'umanità intera assume un alto significato: " Saranno come angeli nel cielo ", si legge nel Vangelo.
In maniera più concreta, Elzeario e Delfina, nella loro preoccupazione costante di approfondire la fede che li anima, sono utili più volte. Elzeario è amico di un famoso francescano, Francesco di Maironnes, del convento di Sisteron, che, recatesi a Parigi per insegnare, ha potuto assistere il conte di Ariano nel momento della sua morte. Quanto a Delfina, i testimoni del suo processo dichiarano più volte che sapeva dissuadere coloro che " avevano opinioni false, o parlavano male del Sommo Pontefice". Si doveva discutere intensamente nella regione avignonese, e non a torto, di fronte a una corte pontificia di cui il meno che si possa dire è che conduceva un'esistenza poco conforme alla povertà evangelica! Ancor più, il suo processo è l'eco delle asserzioni eretiche allora molto diffuse intorno alla Santa Trinità e al "Regno dello Spirito Santo" che annunciavano numerosi visionari, e che aveva l'effetto di introdurre nella vita divina una specie di "quaternità": conseguenza delle predicazioni profetiche di un Gioacchino da Fiore, che al suo tempo non era stato quasi ascoltato, ma di cui lontani discepoli riprendevano le accese teorie intorno a una Chiesa dello Spirito Santo che sarebbe succeduta a quella di Cristo . Sappiamo in che modo tali errori avessero trovato spesso eco nei francescani, nel ramo di quelli che erano chiamati spirituali. Un certo Durando, che depone al processo di Delfina, mostra la contessa " inorridita " dalle opinioni eretiche di un frate minore di cui non ha potuto ricordare il nome e che era venuto da Napoli per discutere con lei sulla fede nella Trinità. " Si serviva di sofismi per tentare di provare che c'era in Dio una quarta persona" dichiara. La contessa rispose ricordando l'insegnamento della Chiesa e il simbolo di Atanasio. In un'altra occasione, fu davanti al papa stesso, Clemente VI, che Delfina, chiamata a discutere con santi dottori, li sbalordì con la sua autorità; e tutti conclusero che non poteva sapere tante cose " se non per ispirazione dello Spirito Santo ".
Si tratta probabilmente dello stesso Durando di cui più testimoni narrano la vita al processo di Delfina, da cui fu miracolato.
Si trattava di un guascone, Durando Arnaldo de la Roque Aynière. Lui e alcuni compagni imperversavano per la Provenza, nel 1358, quando caddero in un'imboscata preparata dalla gente di Ansouis, che, senza processo, li gettò in un pozzo " profondo circa ventidue canne", come precisa un testimone. Lo chiusero con grosse pietre, poi si allontanarono. Quando gli avevano legato le mani, Durando aveva invocato nel suo cuore la contessa Delfina, che era allora ad Apt, e di cui lo aveva profondamente colpito la fama di santità. Ora, in fondo al pozzo, dove era stato gettato il lunedì, tornò in sé il mercoledì mattina, e una voce interiore gli disse: "Alzati, esci di qui"; si accorse che i cadaveri dei suoi compagni che erano stati gettati prima di lui avevano attutito la sua caduta, e che era stato colpito solo da una grossa pietra, alla tibia. Riuscì ad alzarsi, gridò con tutte le sue forze; stupefatti, quelli che erano nel castello lo sentirono, gli portarono delle corde e lo tirarono fuori sano e salvo. In seguito Durando si recò da Delfina, ascoltò le sue esortazioni e si convertì, si confessò e per qualche tempo restò vicino ad Apt, nel romitaggio di Santa Maria di Clermont. Pare che in seguito sia diventato frate, probabilmente a Rocamadour. Nel processo di canonizzazione depone a tre riprese.


Autore: Guido Pettin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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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8-10-14
 

 


ELZEAR
Also known as
Eleazarus
Memorial
27 September
Profile
Noble family. Nephew of William of Sabron, abbot of Saint Victor''s abbey, Marseilles, France, where Elzear was educated. Franciscan tertiary. Married to Saint Delphina of Glandenes at age 16, with whom he lived chastely the rest of his life. Count of Ariano in Naples upon his father''s death. Uncle and godfather of Pope Urban V. Tutor to the son of King Robert of Naples in 1317. Diplomat for King Robert. Died while on a trip to arrange a marriage for Prince Charles. Known especially for his happy, loving, Christian marriage.
Born
1285 at Ansouis, Provence, France
Died
27 September 1323 in Paris, France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369 by Pope Urban V
Patronage
tertiaries


Delphina
Also known as
Delphina of Glandenes; Delphine
Memorial
27 September
Profile
Daughter of the Lord of Puy Michel. Orphaned in infancy; raised by her aunt, the abbess of the convent of Saint Catherine in Sorbo. Franciscan tertiary. Married at age 16 to Saint Elzear, Count of Sarban, Franciscan tertiary, and godfather to Pope Urban V; the couple lived chastely. Became a Lady to Queen Sanchia in Naples. Widow, Elzear dying of natural causes while on a trip to Paris. When Queen Sanchia died, she sold her vast estates, gave the proceeds to the poor, and retired to Provence where she lived her remaining years in seclusion.
Born
1283 at Chateau-Puy-Michel in Languedoc, France
Died
26 November 1360; buried next to Elzear at Apt
Patronage
brides, tertiaries


St. Elzear
Feastday: September 27


Elzear was of noble parents. He was born at the family castle at Ansouis, Province, France. He was educated at St. Victor''s monastery in Marseilles by his uncle, who was abbot and was married to Delphina of Glandieves when both were sixteen. He inherited his father''s estate, becoming lord of Ansouis and count of Ariano in the kingdom of Naples when he was twenty-three. He managed his estate with firmness, prudence, and ability and Elzear and Delphina were regarded as an ideal married couple, known for their holiness and piety. In 1317, they joined the court of King Robert of Naples, and Elzear became tutor to the King''s son Charles. Elzear was named Justiciar of southern Abruzzi by Robert, acted as Robert''s envoy to France to arrange the marriage of Mary of Valois and Charles, fell ill on the trip, and died in Paris on September 27th. Elzear was canonized in 1369 in a ceremony attended by Delphina. His feast day is September 27th.

 


Blessed Delphine
A member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born in Provence, France, in 1284; died 26 November, 1358. Left an orphan in her infancy, she was placed under the guardianship of her uncles, and under the direction of her aunt, the Abbess of St. Catherine of Sorbo. She grew up in the practice of every virtue, and took a vow of virginity which she kept faithfully to the end of her life. In her twentieth year she was married to Elzéar, Count of Sarban, and the couple, having received the habit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 lived together in the edifying practice of prayer, penance, and charity towards the poor until the death of St. Elzéar in 1323. After the death of her husband, Blessed Delphine sold all her vast possessions for the benefit of the poor and retired first to Naples and then to Cabrières. She finally returned to Apt where her husband had been buried. During the last years of her life she endured the greatest sufferings without the slightest complaint or sign of impatience. The cult that had long been paid to Blessed Delphine was confirmed by Pope Urban V, godson of St. Elzéar. Her feast is kept in the Franciscan Order on the twenty-seventh of November.




September 26
Blessed Delphina Of Glandeves
d 1535
 
Blessed Delphina was the only daughter of the wealthy Count William of Glandeves in southern France.  She lost both parents when she was 7 years old, but the little orphan was received into a convent school were an aunt of hers was abbess.  There she received an excellent education in the fear of the Lord and in everything pertaining to her eminent rank.
Delphina had already consecrated herself to God by the vow of virginity, when King Charles II chose her as Elzear’s bride.  Filled with consternation, Delphina had recourse to the Blessed Virgin, to whose motherly care she had entrusted herself.  Our Lady appeared to her and calmed her fears.  Delphina then consented to the marriage, which took place with great solemnity in the presence of the king and the archbishop of Aix.  The holy innocence of his spouse filled Elzear with such love of holy purity that he made a vow to act only as the protector of her virginity, and he was faithful to this pledge all his life.  They lived together like two angels, the one ever encouraging the other in more ardent love of God.
Delphina devoted herself to the care of her household.  The servants, whom she had to retain because of her high rank, she instructed in piety and the fear of God.  She took great personal interest in them all, loving them as if they were her children.  The in turn loved and honoured her as their mother, young as she was.
Elzear died on an errand to Paris in the interests of the king.  Delphina wept bitterly when she heard the news.  Nevertheless she prayed: “My God, may Thy most holy will be done!”  Urged by the spirit of God toward still greater perfection, she presently renounced all temporal goods and added to her vow of chastity the vow of holy poverty.

The fame of Delphina’s holy life induced Queen Eleonore of Sicily to appoint her mistress of the royal household.  Delphina so transformed the easy morals of the court that the palace seemed changed onto a sanctuary. She lived many years yet, edifying the nobility by the brilliant example of her virtue.  She died a saintly death in 1358 at the age of 74.  Her tomb is next to that of her husband in the city of Apt in southern France. Numerous miracles increased the veneration paid to her and Pope Urban V solemnly approved this veneration.
 

REFLECTION

PRAYER OF THE CHURCH
O God, who in addition to other virtues did adorn Blessed Delphina, Thy servant, with virginal purity in the married state, mercifully grant that we who devoutly celebrate her festival here on earth, may arrive safely in her blessed company.  Through Christ our Lord.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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