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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신문]열광의 뒤끝에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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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yuli76] 쪽지 캡슐

2002-06-28 ㅣ No.7889

열광의 뒤끝에 무엇이?

 

정달영(프란치스코, 전 한국일보 주필)

 

 

“1승이라도 해야 한다”던 것이 여기까지 왔다. 첫 승의 꿈이 실현되더니, 그 뒤로는 만나는 축구 강국마다 뛰어넘었다. 16강? 8강? 4강? 또 어디?

 

“현실에서 진행되는 판타지를 보고 있다, 이것은 기적이다, 무슨 불가사의한 힘이 이 일을 돕고 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는 등 놀라움과 찬탄이 쏟아졌다. 정말, 믿을 수 없는 현상이다.

 

지난 백년 이상 독점적이던 축구 중심권의 권력과 오만을, 하찮은 축구 변두리 권의 나라가 잇달아 깨는 라이브 동화상 장면들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동시 전달됐다.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다윗 같은,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이것은 어쩌면 메인 스트림, 주류, 메이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해 터뜨리는 비주류, 마이너, 제3 세계권의 ‘난쏘공’ 이다. 그래서 역사성이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은 축구 경기만이 아니었음이, 주교님조차도 입고 나선 붉은 티로 설명된다. 붉은 물결로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린 국민적 열광이다.

 

주교님도 신부님도 없었듯이, 남녀도 노소도 지역도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우리 모두는 붉은 물결에 동참했다.

 

응원이지만, 응원을 넘어서는 집단의 힘의 과시요, 열광이 만들어내는 엑스타시의 체험이다. 세대, 계층, 직업, 그리고 지역에 이르기까지, 온갖 ‘벽’은 이미 무의미하다. 일찍이 우리 역사에서 경험한 일 없는 ‘하나 됨’ 이다.

 

극복한 것은 서구 콤플렉스만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은 최대의 소득이다.

 

붉은 셔츠가, 대립과 갈등과 분열과 보복으로 지리멸렬한 우리 역사의 레드 콤플렉스를 넘어, 축제와 평화와 탈(脫)이념의 거대한 하모니를 불러내는 화색(和色)으로 승화한 장면은 두고두고 눈물겹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조차 ‘청군 홍군’으로 못 나누고 ‘청군 백군’으로 불렀을 만큼, ‘동무’라는 정겨운 국어 하나를 아예 잊어야 했을 만큼, 어처구니없던 우리 현대사의 ‘붉은 이웃’ 콤플렉스를 참으로 오랜만에 멋지게 벗어버린 계기다.

 

‘대한민국’ 국호(國號)를 이렇게 당당하게 목 터져라 부른 일이 역사상 처음이다. 국기(國旗)인 태극기를 이렇게 흔들고, 몸에 감고, 경기장 스탠드를 덮어버린, 그것이 그렇게 멋지게 보였던 기억도 난생 처음이다.

 

조회 마당도 아니고 광복절 경축식장도 아니고 무슨 지루한 의식의 시작도 아닌 때와 장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온 수십만 명의 애국가(愛國歌) 대합창을 들은 일이 있었던가. 이런 모든 열광의 뜻이 무엇인가.

 

물론 축구라는, 태중의 아기조차도 발길질을 하는 인간 본능의 총집합과 같은 경기가, 대중에게 격정과 몰입의 마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나라가 선 지 반세기 남짓에 참가하기를 여섯 번째,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참담한 전적의 우리가, 그리하여 겨우 첫 승이라도 이루기를 목표로 했던 처지에서, 뜻밖에도 멋진 승리를 계속하는 이 벅찬 감격의 역사 만들기를 다 어떻게 주체할 수 있겠는가.

 

거리로 광장으로 몰려나간 붉은 행렬은 그대로 축제의 주인이 되었다. 응원도 응원이지만, 그에 앞서 즐거운 어울림이고 만남이고 놀이이고 외침이며 도취다.

 

축제란 본래 인간이 일상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어려운 말로 ‘일탈의 문화’다. 그들이 광장에 나온 것은 PC방에, 노래방에, 공부방에, 혹은 술집에 갇혔던 온갖 밀실의 문화를 일거에 허문 결과다.

 

처음 청년층이, 소년층이 시작하다가 중년이 가세하고, 다시 아줌마들이 세를 이뤄 나서는 등 남녀노소 없이 붉은 셔츠를 입는, 전혀 새로운 문화를 열어젖혔다.

 

이 쯤 되면 월드컵 대회의 본질이고 열광을 촉발한 매체인 축구 경기, 그 자체의 승패는 반드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축제는, 즐기는 것이다. 축구는, 달리고 부딪치고 땀 쏟고 나뒹굴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월드컵 대회는 국가대항전의 형태로 진행된다. ‘국가주의’가 개입되는 불가피한 측면이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국운(國運)’을 지나치게 내세우거나 민족적인 욕구, 그 전투적인 행태를 부각시키는 모습은 온당치 않다.

 

축제로,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서로 웃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축제는 억눌렸던 것들을 터뜨리고 발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축제 자체는 탈(脫)국가적이고 탈(脫)민족적인 것이며, 대중의 카타르시스에 기여한다.

 

문제는 이 엄청난 열광의 뒤끝이다. 이 굉장한 성취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가. 모든 절정의 순간 뒤에 찾아오기 마련인 허탈감의 심연을 어떻게 대처할 작정인가.

 

국민의 ‘하나 됨’ 이라는 놀라운 현상을 만들어낸 이 신명의 마당들은 이제 폐쇄될 것인가. 그리하여 이 놀라운 현상들도 한때 달아오르고 식어버린 알루미늄 냄비의 운명이 될 것인가.

 

‘잔치는 끝났다’고 하는 그 때를 의연하게, 슬기롭게 맞이할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모처럼 깨닫고 되새긴 ‘일등 시민, 일등 국가’ 의 국민적 결의를 살리고 ‘아시아의 자존심’을 지켜가야 한다.

 

시민 광장과 그 광장의 문화도 새롭게 만들어나가고, 창의적인 한국축구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분수에 맞는 국가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이 이 열광의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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