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22/08/13 미사의 영성 9 성변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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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7-30 ㅣ No.5111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22/08/13

미사의 영성 9 성변화3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말씀 십자가에 못박히시다(루카 23,33-49)

23 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47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48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나눔

우리 나라에 '목마른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저자 도미니크 라피르의 원작 '기쁨의 도시'(la cite de la joie)를 영화화한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를 보면, 한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가 도시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갖은 수고를 다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도의 빈민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기 딸을 남부럽지 않게 시집보내기 위해 결국 자기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딸의 정조를 위해 권력가의 아들과 싸우다 칼에 심한 상처를 입었어도 딸의 결혼 지참금을 채워 주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고서는 딸의 결혼식 피로연 도중에 죽습니다. 딸에게 부모로서 할 바를 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죽음도 모르고 일하다가 지참금을 채워 주고 죽음으로써 결국 자기 딸에게 자기를 바쳤던 주인공 아버지의 사랑이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며 젊은이의 결합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참금 제도가 결국 인간을 괴롭히는 사회의 굴레로 등장하게 된 우리 인간 세상의 어둠을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같은 사건 안에서 자식을 위해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의 몸을 바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봅니다. 또 그의 말도. "자식의 지참금을 마련하는 것은 아버지의 의무이기 이전에 권리입니다!" 사랑은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 의무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또 한편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 앞에 죄없는 인간으로 서기 위해 우리를 위해 몸바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마치 딸의 결혼 지참금이라는 멍에를 메고 죽어간 영화의 주인공처럼, 참으로 주님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제도적 사회적인 굴레의 희생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죄와 악의 멍에와 굴레에서 해방시켜 다시 하느님이 천지창조 때 우리에게 새겨 주신 아버지의 모상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철없는 자식을 달래기 위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처럼, 주님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무절제하고 대책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죄악에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 희생해 주셨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주님을 죽이는 이들의 행동은 참으로 철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하기는커녕, 그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루카 23,34)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35)리고,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36-37)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39) 이들은 자신들이 죽이는 이가 주님이라고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인륜적인 모습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마저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 주님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의 잘못을 비호하듯이 역성을 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34) 그리고 주님은 자기 죽음의 의미를 알고 계시고, 자기 죽음으로 인간을 다시 구하실 수 있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 시편 31,5참조)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올리브산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던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23,38)던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를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죽여 버렸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런 의미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7-18)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되돌이켜 보면, 우리는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아주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그러나 한편 우리는 같은 루카 복음 23장에서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발견하고 주님께 청한 사람들도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모욕하는 것을 본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40-42)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방인인 로마인들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47) 또한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48)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49) 그리고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50-53)신 요셉이라는 사람.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응답을 받은 다른 죄수의 자세 안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기본자세와 처지가 어떠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처지를 택하여 오셔서 우리와 같은 취급을 당하신 주님, 우리의 잘못으로 욕먹고 비난받는 우리 주님의 사랑 앞에 선 인간의 청원. 차마 청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죄스러운.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 앞에 선 우리의 청원. 미사의 기도문 안에서도 이러한 청원을 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평화의 기도 중에서)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평신도 사도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사랑은커녕 사랑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용서가 왜 그리 어려운지? 용서하자니 억울하고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용서하지 않고 잡고 있을 때면 내 가슴 속에 숨어 있다가, 내가 한가할 때나 기도할 때마다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잡고 있는 사람과 사건, 상황들. 내가 용서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잡혀 있는 셈입니다. 나의 미움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내 모습 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괴롭기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4.17-21) 사도는 우리에게 그저 우리의 어머니들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대우와 아내와 어머니로서 당해야 하는 시집살이와 시댁과의 관계 안에서 그러해 오셨고 또 그대로 일러 주셨던 것처럼 "남이 뭐라든지, 어떻게 하든 내 할 바나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원수 갚는 일은 주님의 몫이니까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불공평한 세상을 탓하며 억울해하고 불평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8.9.15)

 

한편 우리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구약성경 기자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와 관용을 전제로 제시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 28,2-7) 또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2.14-15)

 

실천적인 면에서 사제가 성작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하면서 성혈을 축성할 때, 내가 용서할 수 없고 내 마음 속에 얹힌 것처럼 맺혀있는 가련하고 한 서린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도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체를 영하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다시 회복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회복된 사랑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빌면서. 동시에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용서해 주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대명사인 자비로우신 주님 앞에서 나의 용서를 청하십시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받아 주소서."

 

 

성찰

주님을 섬기고 모시기 위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내 죄의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 용서해야 할 사람이나 일이 있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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