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0주일(다해) 루카 12,49-53; ’22/08/14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8-04 ㅣ No.5112

연중 제20주일(다해) 루카 12,49-53; ’22/08/14

 

 

 

 

 

 

 

예전에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첫해에는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좋기만 하였습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었던 것이 이루어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첫해에는 그저 기쁘고 좋은 것만 보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는 것이 지난 세월의 인생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고 또 추구하는 이상이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경쟁 사회와는 대조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처음 천주교를 찾는 분들이나, 새로 이사 와서 새로 성전을 짓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울 때의 기분도 이와 같으리라 여겨집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받고, 대부모님을 만나고, 내가 배운 교리 지식대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에 대한 기대와 지난 세월의 갖가지 어려움과 방황 속에서 저질렀던 죄악을 다 씻고 새로 태어나는 세례의 은총을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사 와서 새 성당에 들어와 새 신자들을 만나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나 새로운 지역에 새로 본당이 설립되고 신자들이 합심하여 새 성당을 건립하고 구역반과 각 단체를 세우며 신앙 공동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활기차고 주님 은총의 그느르심 안에서 친교를 누리는 새내기 공동체의 모습과도 비견될 수 있습니다.

 

신학교 2년차가 되면서부터, 어디서인지 모를 불평과 불만 그리고 동료 이웃 신학생들에 대한 비교와 판단 등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주제 파악을 하고 그나마 나를 받아주고 양성시켜 주시는 신학교 당국을 통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기는 하면서도, 옷깃에 스치는 사소한 자극들이 왠지 모르게 불평과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나 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신 동료 이웃을 보면서도 기쁨과 감사의 정만을 품기에는 부족한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신학생이라고 신학교에 들어와 살 수가 있지?’라고 하는 오만불손한 마음에서 주제넘은 생각들이 하나둘 표출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현실 세계에 바로 비추면, 현실은 지옥과도 같이 보인다.”라는 교수 신부님의 말씀처럼, 내 존재 양식과 내 삶의 형편은 뒤로하고 내 눈에 드러나는 이웃에 대한 주제넘은 우월감과 비난과 단죄를 표명하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시고 함께 살라고 맺어 주신 형제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부족하고 나약한 점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으로 채워주어야 할 자세와 소명을 망각하고, 거꾸로 나 하나 잘랐다는 식으로 형제들의 부족하고 나약한 점들을 내 나름의 윤리의식에 맞춰서 판단하고 그것도 모자라 충고한답시고 끄집어내서 지적하고 단죄하며 경원시하기 시작한 이기적인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주 하느님의 은총만을 바라보고 주님 은총을 받은 이로서의 걸맞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데, 괜실한 탐욕으로 이웃을 사랑으로만 받아들이고 친교를 맺지 못했습니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그만 내가 직접 살아내지도 못하는 이론으로 들어온 반 푼어치 윤리 지식과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폭 좁은 내 나름의 경험치로 형제를 심판하고 비난하고 단죄하는 죄악의 노예처럼 행동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과 마음이 기쁘고 반갑기만 하지 않고, 좋은 점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나라면, 우리는 스스로 악마에게 내 영혼을 빼앗기고 죄악의 노예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겠습니다. 누구는 이래야 하고,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누구는 저래야 하는데 저러지 못하고 등등. 나의 현주소는 고사하고서라도, 사건과 상황의 이해당사자와의 진행 과정과 그나마 현실의 한계 안에서 취한 나름의 고육지책임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그저 상대의 형편과 처지와는 전혀 다른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면만을 바라보고는 최고의 이상을 기준 삼아 비교 비난하는 어리석음이겠습니다.

 

사랑은 넘치면 흘러내려 퍼져나가고 점점 더 커지고 늘어나 풍요로워지고 평안해지는 데 반해, 죄악은 사랑보다 더 매혹적이어서 더 급속히 퍼져나가고 견고해지는 대신 더 이상의 물질적인 이득을 추구하고 취한 이득을 이웃과 공유하지 못하는 독점적인 이해관계에 빠지게 됨으로써 사회와 관계는 더 각박해지고 피폐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직신학과 교의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점점 하느님과 교회와 사회에 대한 사고체계가 머릿속으로는 급격히 팽창하는 반면에, 마음과 삶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삶 안에서 이론과 실재,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큰 차이를 가져오면서, 불균형한 상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목표와 비교하면서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교회공동체의 불완전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실망이 커짐으로써 교회 장상들과 동료 신학생들과의 불편하고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실천하여 더욱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시기에,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나 자신이 아닌 에게 적용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스스로의 영적 성숙에 방해가 되고,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보다는 거꾸로 비난과 갈등의 현실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미성숙함이 실천신학을 배우고 또 사목 실습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공부한답시고 한걸음 뒤에 서서 방관자처럼 무책임하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현실이 아니라, 나름 보듬어 안고 책임을 지고 돌봐야 하는 사목 현장으로 바뀜으로써, 양을 찾아 나서고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바치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불완전하고 불의한 세상을 똑같이 바라보면서, 조직신학을 공부할 때는 신학지식과 이론체계로 가득 차 비판과 비난의 일색이었지만, 실천신학을 접하며 사목 실습을 하기 시작할 때는 사목자의 용서와 자비를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마는 우리에게 네가 보는 세상은 불의하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비춰 비난하고 단죄하라고 유혹하며 그 안에서 너 하나 살아나갈 길을 모색하라고 유혹하고, 성령은 우리에게 네가 보는 세상은 불의하므로 너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평화와 사랑의 하느님 나라로 바꾸기 위해 같은 믿음을 지닌 형제자매들과 함께 헌신하라고 충동합니다.

 

그 무렵 주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애를 끓이는 사랑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으로 태어난 피조물들과 우리 인류가 하느님 사랑보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악마의 유혹에 빠져듦으로써 사랑과 친교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탐욕과 경쟁의 혼란과 갈등으로 피폐해지는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워하실까 하는 자각에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을 끌어안고 쓸어 담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와 역사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처방을 내고 또 서로 다른 생활양식을 취하듯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모습도 신앙성숙의 단계마다 신앙 실천의 깊이에 따라, 서로 다르고 심지어는 상반되기까지 하는 생활양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해오면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1-2)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다가오시고 거듭 용서하시며 축복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이 스스로 주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회개하고 헌신하여, 형제자매들과 함께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평화와 구원의 하느님 나라로 변모시켜 나갑시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3)

 

 

--------------------------------------------

 

연중 제20주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4&id=186815&Page=2&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6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