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성당 게시판

연중 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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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웅 [mathias] 쪽지 캡슐

2004-01-15 ㅣ No.2843

연중 1주간 목요일

마르코 1,40-45

웃음(기쁨)의 신학

 

+ 찬미 예수님

 

여러분, 웃음면 뭐가 오죠? 다시 한 번 크게 외쳐 볼까요? 웃으면~ 옛날 우리 선인들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단순히 어느 누구의 한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률. 즉 시행착오를 거쳐 나온 말, 즉 이렇게 했더니 그렇게 되더라는 수학적인 데이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몸을 움직이는 주요 6백 50여개의 근육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가 웃을 때 2백 30여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건강을 위하여 심한 운동을 몇 시간 하는 것보다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웃음 몇 번 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요 근래의 신학 중에 한 테마는 바로 기쁨의 신학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항상 슬픔에 잠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때 예수님의 표정은 항상 십자가의 고통받는 예수님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최근에는 부활의 예수님, 웃으시는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추구하시고자 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삶이 십자가의 고통으로만 끝나버렸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참으로 필요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부활이 없는 고통만을 요구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일 겁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는 고통은 항상 부활의 기쁨을 함께 동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넘어선 부활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병을 치유시키시면 신신당부하십니다. “네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보여라” 기쁨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슬픔은 꾹꾹 삭히고 삭힐 수 있지만 기쁨은 속에서 터져나오는 폭탄과 같아서 도저히 삭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쁨은 항상 우리의 수고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수고하지 않고 얻게 되는 기쁨은 금방 우리의 몸에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오늘 나병환자가 얻게 되었던 기쁨은 참으로 엄청난 수고의 댓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수고는 자신의 몸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야만 하는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일반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 예수님 앞에 나왔고 자신의 부족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선생님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그 확신이 그를 낫게 하였고 그의 치유는 이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다이너마이트처럼 그의 몸 안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들은 일상의 삶 안에서 기뻐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들은 오늘 복음상의 치유된 나병환자처럼 예수님을 온 세상에 전파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자신을 아직도 있는 그대로 예수님께 하느님께 보여드리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말 주님이 계시는 걸까? 정말 주님께서 날 치유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나는 웃음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닌 걸까?

 

한 번 믿어봅시다.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한 번 메달려 봅시다. “선생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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