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암동성당 게시판

2000년연중7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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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yk1004] 쪽지 캡슐

2000-02-20 ㅣ No.275

2000년 2월 20일 연중 7주일 강론

 

제1독서: 이사야 43, 18 - 19; 21 - 22; 24ㄴ - 25.

제2독서: 2 고린토 1, 18 - 22.

복음: 마르꼬 2, 1 - 12.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마르꼬 2, 5)

   지난 주에 여러분께서는 주임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서 사제 성소의 중요성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신부가 하는 일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로서의 역할, 예언자적인 역할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신부가 집전하는 성사 중에 매우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고백성사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한 고백성사로 인해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우리는 잘 모르고, 잘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죄의 용서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까지 내주셨다는 의미는 당연히 모를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에 천국의 열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맡기셨기 때문에 사제를 통해 죄의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주신 얼마나 큰 선물인지 충분히 짐작하기는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나병환자가 소외를 당했던 이유는 외모가 흉칙하게 일그러진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문둥병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이나 전염병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병이 끔찍하게 여겨진 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도 자식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외모가 흉칙하게 일그러지고 신체가 일그러진다는 사실, 코가 떨어져 나가고 귀가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 발가락이 뭉개져 없어져 가면서 죽어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병이 낫게 되어 그 진행이 멈추어도 보기흉한 불구의 몸 때문에 저주받은 인생처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마'라고도 불렸던 천연두도 나병 이상의 공포심을 일으켰습니다. 마마, 천연두가 가 한 번 돌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목숨을 한 순간에 빼앗길 뿐 아니라 낫게 되더라도 곰보가 되어 추한 외모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높은 사망률 못지 않은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병과 함께 천연두를 가장 무서운 병으로 꼽았던 것입니다.

   그런 것 말고도 지금은 멀쩡한 내가 교통사고라도 당해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눈이 멀거나 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자신과 다른 게 있으면 시선을 주기 마련인데 내 없어진 팔이나 다리에 사람들이 시선을 자꾸 주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하는 것은 직접 장애를 겪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선 장애인 시설, 복지 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서게 되면 집 값이 떨어지고 아이들 교육에 지장이 있다 하여 - 왜 아이들 교육이 지장이 있는 지는 모르지만 - 반대운동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렇게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불쌍한 장애인들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커다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러나는 장애인은 사회를 심각하게 병들게 하지 않지만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심각하게 병들게 만듭니다.

   마음을 뒤집어 보이고 싶다고 생각이 들 때도 가끔은 있지만 마음이란 것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나의 주위의 사람들은 나의 좋은 면을 보고서 호감을 갖고 있는데, 내가 때로는 흉칙한 생각, 웅큼한 생각, 나쁜 생각, 어리석은 생각 등을 할 때에 바로 바로 주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드러난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생각이야 금방 지울 수 있어 다행이지만 죄 때문에 불구가 된 내 영혼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끔찍한 불구의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잘난 체하기도 하고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기도 하고 교만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는 그 볼품없는 모습이 다 드러날텐데, 그때에는 누구나 그 모습을 다 보게 될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뻐기면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경우인가?

   팔에 흉터만 있어도 더운 여름에 짧은 소매의 옷을 안입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데 마음의 흉터, 영혼의 불구가 다 드러난다면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병을 고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인 것입니다. 말로 하기에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는 말이 쉬울지는 몰라도 우리 영혼의 불구가 치유된다는 것,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병고침을 받는 것 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은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병 고치는 기적을 보고서도 예수님께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하는 것은 그들도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병 고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병고치는 능력을 보고 놀랐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분이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병을 고친 것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보내신 구세주에 '다름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물질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의 소중함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불구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영혼의 불구가 두렵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하며, 그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영혼의 불구를 치유하는 치유의 성사가, 치유의 은사가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보편 사제직의 한 모습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 말한 것 중 특기할 것 하나는 보편 사제직입니다. 보편 사제직은 직무 사제직과는 구별되지만 직무 사제직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치유받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는 데 비해 오늘 복음에서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가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자신의 영혼의 불구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치유하고 항상 건강한 영혼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지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죄스런 병든 영혼을 병든 지도 모르고 영혼의 불구를 불구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치유의 은총이 다 내리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 주신 주님께서 우리 신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오늘날 이 병든 세상에 치유의 은사를 내리시도록 기원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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