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4월을 보내며 그리움을 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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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하 [domini0727] 쪽지 캡슐

2005-04-22 ㅣ No.3400

 

            복숭아꽃

 

                                  권  태  하



남풍 불어 꽃소식이 전해 오면

고향 집 텃밭 밭둑가에 서 있던

복숭아나무 한그루

화사하게 피어있던

분홍색 복사꽃


물 올라 생기 돋는

푸른 나무가지 사이사이로

초록 여린 잎 사이사이로

볼그레한 자태로 생글거리다가

달 밝은 밤

열일곱 살 내 누이처럼 수줍어

하얗게 숨어서 떨어지던

분홍색 복사꽃


그때는 왜 몰랐을까

가까이에서보다 멀리서 바라 보아야

빛이 더 곱고 더 정겨운 꽃인 것을

복숭아꽃은 내 고향 꽃

내 누이의 꽃이었어라

 

세월이 흐른 후에야

더욱 살갑고 더욱 그리운

내 고향 꽃

내 누이의 꽃이었어라


                    2005. 4.



            식목일


 

                             권   태  하


내 아버지는 산간수이셨다

금단추 달린 제복

허리춤에 포승줄 차고 수갑 차고

가죽 테 둘린 순경모자까지 쓰고

군청 산림계 권 주사 떴다 하면

온 마을이 벌벌 떨었다 한다 



나무를 군불 땔감으로 썼던 그 시절

내 아버지는 촌마을의 왕이셨다.

자네 나 좀 보세 하면

모두들 얼굴이 새파래지고

이집 저집 동네를 돌아다니시면

모두들 숨을 죽이고 

문구멍 사이로

내 아버지 거동만 살폈다 한다.

들키지 않으려고

솔가지 위에 짚을 덮고

그 위에 다시금 가시나무를 쌓고

별 위장을 다한들

이집 저집 다 둘러 본 후

구장 집에서 막걸리에 취하시면

뉘 집에 혼인 날 받아 놨는가?

뉘 집에 어르신 환갑 날 다가오는가?

귀신같이 찍어냈다는 산간수 권주사가

바로 내 아버지셨다.


탯줄을 묻은 고향에서만 근무하셨으니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연이 걸리는 걸

하다못해 사돈네 팔촌이라도 연이 걸리는 걸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그집 잔칫날 돼지라도 잡으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집에 해소기침이 잦은 미수 넘은 노인이 계신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술 취해 돌아오시어 엉엉 우시며 하소연하던

내 아버지의 술 주사에

따라서 눈물 짓던 내 어머니


이제 두 분 모두 세상 떠나신지 2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 그립습니다.

봄이 와서 땅이 녹으면 소나무 묘목을 두 가마니씩이나

소달구지에 실어다 마당에 갖다 놓으시고

“학교 끝나는 대로 곧장 집에 오거래이” 닦달 하셔서

동네 뒷산

학교 뒷산

국보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산까지

근처의 산이란 산은 모두 다니시며

나무를 심게 하셨던 아버지

“땅을 30센치 정도 파야 된데이.

잔뿌리를 쫙 펴서 심고 발로 밟아서 흙을 다질 때는

심은 나무를 두 손으로 잡고 약간 위로 댕기는 듯해야

잔뿌리가 잘 펴져서 나무가 잘 산데이“

아직도 그 음성이 귓가에 맴돕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도벌꾼을 적발하지 못한 갚음으로

아버지는 나무를 심어 대신하신 것인데

그 때문에 아들은 봄이 정말 싫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이 어른이 되어

보르네오 밀림을 누비며

지름이 2미터에 가까운 원시림을 베어 파는

원목벌채회사의 간부가 되다니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죄스러워서 그랬을 겁니다.

큰 나무를 베는 현장을 보는 날이면

공교롭게도 그 후 며칠 동안

지독한 몸살을 앓아야 했던

저는 분명히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그때 아버지와 제가 함께 심었던 묘목이

이제는 어른나무가 되어 잎이 청청한데

오늘 식목일

옥탑에 큰 플라스틱 화분 올려놓고

5년생 소나무 묘목을 하나 심었습니다.

아버지.

저도 이제 아버지 곁에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200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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