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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갈색 차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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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국 [skpaul] 쪽지 캡슐

2002-11-16 ㅣ No.165

 

신달자씨의 수필 중에서

"한 잔의 갈색 차가 되어"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을 겁니다.

함께 나누기 위해 요약해서 올려봅니다.

 

 

꽃이었으면 한다.

누구나 한번쯤 걸음을 멈추는 어여쁨을 지녀서

자연에서 멀고 피곤에 지친 도시인에게

한순간의 가벼운 탄성을 올리게 하는

나는 아름다운 휴식이고자 한다.

진한 향내를 피우는 치자꽃도 아니고

그 모습부터 황홀하여 손끝이 두려운 장미꽃도 아니며

붉은 함성을 내지르며 피의 깃발을 무더기로 펄럭이는

사루비아꽃도 나는 더욱 아니다.

나는 평범한 안정을 갖게 하는 그런 꽃이었으면 한다.

당신의 퇴근길에 몰리는 피로와 그 무거운 눈꺼풀을

잠시 되살리는 어느날의 새벽 피부같이 싱그러운

모란이었으면 한다.

 

나는 작은 새여도 좋다.

고운 목소리를 지닌 빛깔 고운 새.

아무 교태를 부리지 않아도 손에 쥐고 싶은

당신의 욕망을 흔들어 놓는

안타까운 한 마리 작은 새여도 좋다.

당신의 퇴근길에 처진 어깨 위에서

어디를 갈까 망설이는 당신의 방황을 풀어주는 나는,

한 마리 새였으면 좋을 것이다.

 

나는 비였으면 한다.

여름의 소낙비나 겨울의 을씨년스런 비는 내가 아닐 것이다.

땅과 땅의 통로를 뚫어 스미고

마침내 사람의 마음에까지 스며들어서

자리를 잡는 사랑처럼 설레이는, 나는 봄비이고자 한다.

그 봄비는 당신의 창가에서 오랫동안 당신을 부를 것이다.

그리고 점점 당신 가까이로 다가갈 것이다.

 

구름이었으면 한다.

그 구름은 언제나 글자가 되어 서서히 하늘을 떠 갈 것이다.

나만 아는 이 글씨를 당신이 해석한다면

당신은 언제라도 하늘을 우러러 내 마음을 읽을 것이다.

번개이거나 우뢰였어도 좋을 것이다.

하늘이 그어대는 한 줄기 질긴 불빛으로

당신의 마음을 비춰보거나

세상을 진동하는 우룃소리로

당신의 미운 마음을 겁주는 일도,

살다가 몇 번은 좋을 것이다.

 

아, 나는 하늘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땅이고자 한다.

당신의 생활이고 당신의 이상이면서

이 시대가 아끼고 인색한,

예기치 않았던 당신의 눈물이고도 싶다.

그 눈물의 소금기, 한 인간의 동력이고 싶다.

 

나는 다시 그물이고자 한다.

몇 번이고 침몰한 당신의 젊음을,

그래서 조각난 꿈의 부스러기까지 잡아 올리는 나는

당신의 그물이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만선의 가득함으로 돌아오는

어부의 넓은 이마이고자 한다.

 

나는 한 잔의 차( 茶 )이고도 싶다.

음악을 듣는 당신 옆에서 따뜻한 한 잔의 갈색 차가 되어

당신의 입술을, 당신의 휴식을 적시게 하는

향내가 좋은 차여도 좋을 것이다.

차를 마신 다음에 무심코 한입 베어넣는

질 좋은 사과 한 쪽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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