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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사람들? - 사도행전 13,48 [교리용어_예정론] 776_predestination [_이중예정설] #<다해부활4주일1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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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3 ㅣ No.1367


질문:

사도행전 13,48에는 다음의 언급이 있습니다:

(발췌 시작)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이상, 발췌 끝).

 

여기서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이라구 나와 있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들은 이미 정해진 건가요?

--------------------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아닙니다.
여태까지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사도행전 13,48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부활 제4주일 제1독서(사도행전 13,14.43-52) 에 포함됩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missaid=5486&gomonth=2013-04-21


그리고 사도행전 13,48은 또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행전 13,44-52)에 포함됩니다.

2.
2-1.
 사도행전 13,48에 대하여, NAB(New American Bible)의 주석은 주어져 있지 않으나, 다행히 "주석 성경"에 다음과 같은 간략한 주석이 주어져 있습니다:

(발췌 시작)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 은 유다교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인데, 모든 것이 이미 오래전에 결정되어 인간의 자유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무슨 예정설(豫定說)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그런데, 이 주석이, 사실은 가톨릭 신자라면 교리적으로 꼭 알고 있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기에, 이 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2013년 다해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학습하여야 하는 "신앙의 해"이므로, 이 글을 마련하였습니다.

2-2.
질문 1: 위의 "주석 성경"의 주석에서, 무슨 예정설(豫定說)은 구체적으로 "어떤" 예정설을 말하는지요?

질문 1에 대한 답변: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예정(론)(predestination)"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측의 일부가 주장하는, 소위 말하는,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이 또한 신봉하였던, "이중 예정설(PREDESTINARIANISM)"을 말합니다.

질문 2: 이들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1) 다음은,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 edition에 주어진, 사도행전 13,48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게시자 주: 이 주석이 전체 윤곽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며, 이들 둘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본론은 이어지는 제(2)항에 있습니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128.html

(발췌 시작)
Ver. 48. As many as were pre-ordained to eternal life,[3] by the free election, and special mercies, and providence of God. (Witham) --- Some understand this as if it meant, predisposed by their docility, to receive the word of life. But the Fathers unanimously understand it literally of predestination, which is defined by St. Thomas Aquinas, serm. i. qu. 23. a. 1. "The disposition of God, by which he prepares, what he will himself perform, according to his infallible foreknowledge." In other words, it is the manner in which God conducts a reasonable creature to its proper destiny, which is eternal life. In this mystery of the Catholic faith, which cannot be clearly explained to human understanding, because it is a mystery, there are nevertheless several points, which we know for certain. 1st. Though it is certain, that this decree of the Almighty is infallible, and must have its effect, yet it is far removed from the blasphemy of Calvinists, who pretend that it destroys free-will, and therefore removes all motives of exertion to good works. 2nd. For it is a point of Catholic faith, that this foreknowledge of the Almighty no ways interferes with man's liberty, but leaves him still a perfectly free agent, and therefore responsible for his actions. 3rd. It is likewise decreed by the Council of Trent, that no one can certainly know that he is of the number of the predestined, without a special revelation to that effect. These are the most essential points, which it concerns us to know of this doctrine. As to the consequences which may be drawn from these positions, it were better for us to submit our understandings to the obedience of faith, than entangle ourselves in a maze of abstruse errors, far removed from our comprehension. Would that this sober line of conduct were pursued by many moderns, who at present talk and write so much on this subject, and to such little purpose. How excellently well does the great genius of the Latin Church, St. Augustine, say: Melius est dubitare de occultis, quam litigare de occultis! How much wiser and better is it to confess our ignorance on mysteries, than idly to dispute on mysteries! (lib. viii. de Gen. ad litt. chap. 5.)

제48절.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3]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free election), 그리고 특별한 자비(mercies)들, 그리고 섭리(providence)에 의한. (Witham)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마치, 자신들의 유순함(docility)에 의하여 사전(事前)에 기울어져(predisposed),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것처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 serm. i. qu. 23. a. 1에 의하여, "그것에 의하여 당신께서 준비하시는, 하느님의 성향(disposition)인 당신의 무류한(infallible) 선지(先知, foreknowledge)에 따라, 당신께서 스스로 수행하실 바." 라고 정의되는(defined)예정(론)(predestination)에 의해 글자 그대로 이 말을 이해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말은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성을 가진 피조물(a reasonable creature)을, 영원한 생명인, 이 피조물의 고유한 운명으로 이끄시는 바로 그 방식을 말합니다. 그것이 어떤 신비(a mystery)(*)이기 때문에, 인간의 오성(understanding)에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는 가톨릭 믿음(Catholic faith)의 바로 이러한 신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여러 요지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비록 전능하신 분의 바로 이 법령(decree)이 무류하고(infallible),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법령은, 이 법령이 자유 의지(free-will)를 파괴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 선행(good works)들을 향하는 노력의 모든 동기(motives)들을 제거한다고 거짓으로 주장하는(pretend), 캘빈주의자들(Calvinists)신성 모독(blasphemy)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이는 전능하신 분의 바로 이러한 선지(先知)는 사람의 자유(liberty)와 조금도 충돌하지 않고, 그를 여전히 한 명의 완미한(perfect) 자유로운 행위자(agent)로 남겨두어, 그리하여 그 결과 자신의 행동들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바로 가톨릭 믿음의 한 요지(a point)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바로 그 결과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 없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예정된 자들의 숫자 중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년)에 의하여 마찬가지로 포고되었습니다. 이들은 가장 본질적인 요지들인데, 이 말이, 바로 이 교리에 대하여 알게 하려고, 우리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들 명제(命題, positions)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있는 결과들에 관하여, 우리들의 이해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난해한 오류들로 이루어진 미로(迷路) 안으로 스스로를 빠뜨리는 것보다, 우리들이 자신들의 오성(understandings)들을 믿음에 대한 순종(the obedience of faith)(**)에 종속시키는(submit)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현재 바로 이 주제에 대하여 대단히 많이 말하고 글을 쓰는, 그러나 거의 헛되기에 충분한, 많은 현대인들에 의하여 처신에 있어서의 바로 이러한 분별력있는 노선이 추구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지. 라틴 교회의 위대한 천재인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대단히 뛰어나게 만족스럽도록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Melius est dubitare de occultis, quam litigare de occultis! 하는 일 없이 신비(mysteries)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보다 신비들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ignorance)(***)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더 현명하고 그리고 더 좋은 것인지! (lib. viii. de Gen. ad litt. cha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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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신비(mystery)" 라는 신학적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50.htm

(**) 번역자 주: "믿음에 대한 순종(the obedience of faith)""자신이 전해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항)을 말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12.htm <----- 필독 권고

(***) 번역자 주: 우리가 무지하게 된 것은, 과자연적 선물들(과성은혜들, preternatural gifts)들의 상실을 초래하였던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의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다. 클릭한 후에 제1-2항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제77항을 읽고 묵상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1.htm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위의 제(1)항의 설명은, 말씀드리고자 하는 차이점에 대한 입문 요약 설명인데,

여기를 클릭하면 <---- 필독 권유 

이보다 더 상세한 설명이, 특히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으니, 꼭 읽도록 하십시오.

특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예정(론)(predestination)"과, 16세기에 개신교의 한 분파의 지도자인 캘빈(John Calvin, 1509-1564년)에 의하여 재등장하는,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년)에서 단죄된(condemned), "이중 예정설(PREDESTINARIANISM)"의 차이점을 모르고 계신 분들의 필독을 권고드립니다.

추가 참고 자료들:
(i)
 여기를 클릭하면, 신약 성경 본문 중에 "정해진" 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구절들 모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ii)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destined(정해진, 예정된)"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의 항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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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6시간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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