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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토착화를 위한 한 개의 필요 조건인 popular piety의 보급 및 실천의 활성화 1444_piety 1293_evangel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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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4 ㅣ No.162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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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1: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그 영어본을 읽을 수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2013년 11월 24일자 첫 번째 교황 권고[제목: 복음의 기쁨]에서, "popular piety(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제122항부터 제126항에서 "The evangelizing power of popular piety(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의 복음화하는 힘)" 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언급하는 신학적 근거/이유가 무엇인지요?: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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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영어로 "popular piety" 로 번역되는 교회의 용어를 지금까지 국내 가톨릭계에서 "대중 신심(大衆信心)"으로 번역해 왔는데, 그러나 이 차용(借用) 번역 용어는, 중국 가톨릭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용어 번역이며, 더구나, 원 라틴어 용어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단히 부적절하게 번역된 일본식 차용(借用) 번역 용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의 제1항-제3항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삽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9.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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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대표적인 "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이라는 한 개의 윤리덕(a moral virtue)실천(實踐, practice)의 예(example)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1. 들어가면서

위의 질문 1에 대한 답변을 드리기 전에, 하느님께 대한 정의(justice) 를 말하는 한 개의 윤리덕(a moral virtue)인 "religion(경신덕)" 이라는 교회의 용어의 어원(etymology)에 대하여 먼저 고찰하고자 합니다. 

 

2.

2-1. 다음은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religion(敬, 경신) 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의 첫 단락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12738a.htm#I

(발췌 시작)

Religion

경신(敬)

 

Derivation, analysis, and definition

유래, 분석, 그리고 정의

 

The derivation of the word "religion" has been a matter of dispute from ancient times. Not even today is it a closed question. Cicero, in his "De natura deorum", II, xxviii, derives religion from relegere (to treat carefully): "Those who carefully took in hand all things pertaining to the gods were called religiosi, from relegere." Max Muller favoured this view. But as religion is an elementary notion long antedating the time of complicated ritual presupposed in this explanation, we must seek elsewhere for its etymology. A far more likely derivation, one that suits the idea of religion in its simple beginning, is that given by Lactantius, in his "Divine Institutes", IV, xxviii. He derives religion from religare (to bind): "We are tied to God and bound to Him [religati] by the bond of piety, and it is from this, and not, as Cicero holds, from careful consideration [relegendo], that religion has received its name." The objection that religio could not be derived from religare, a verb of the first conjugation, is not of great weight, when we call to mind that opinio comes from opinari, and rebellio from rebellare. St. Augustine, in his City of God X.3, derives religio from religere in the sense of recovering: "having lost God through neglect [negligentes], we recover Him [religentes] and are drawn to Him." This explanation, implying the notion of the Redemption, is not suited to the primary idea of religion. St. Augustine himself was not satisfied with it, for in his "Retractions", I, xiii, he abandoned it in favour of the derivation given by Lactantius. He employs the latter meaning in his treatise "On the True Religion", where he says: "Religion binds us [religat] to the one Almighty God." St. Thomas, in his "Summa", II-II, Q. lxxxi, a. 1, gives all three derivations without pronouncing in favour of any. The correct one seems to be that offered by Lactantius. Religion in its simplest form implies the notion of being bound to God; the same notion is uppermost in the word religion in its most specific sense, as applied to the life of poverty, chastity, and obedience to which individuals voluntarily bind themselves by vows more or less solemn. Hence those who are thus bound are known as religious. (이하, 생략)

 

경신(敬)(religion)이라는 단어의 유래는 고대 시기들부터 논쟁의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것은 한 개의 종료된 질문이 아닙니다.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는, 자신의 저술인 "De natura deorum", II, xxviii 에서, 경신(敬)(religion)relegere [조심스럽게 취급하다(to treat carefully)]로부터 다음과 같이 도출합니다(derives): 잡신(gods)에게 적절한(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pertaining to) 모든 사물들의 시중을 조심스럽게 떠맡는 자들은, relegere 로부터, religiosi 라고 불렸다." Max Muller(1823-1900년)는 바로 이 관점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신(religion)은, 바로 이 설명에 있어 사전 전제된(presupposed) 복잡한 의식(儀式. ritual)의 시기를 아득히 멀리 선행하는, 한 개의 요소적 개념이므로, 우리는 그 어원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 단체적 시초에 있는 경신(敬)(religion)이라는 관념에 적절한, 한 개의 더 있음 직한 유래는 락탄티오(Lactantius, 240-320년)에 의하여, 자신의 저술인 "Divine Institutes", IV, xxviii 에 제시된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religare [묶다(to bind)]로부터 경신(敬)(religion)을 다음과 같이 도출합니다: "우리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이라는 구속(bond)에 의하여 하느님께 속박되고(are tied to) 그리고 그분께 의무지워지며, 그리고 경신(敬)(religion)이 그 이름을 이미 받았던 것은,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가 견지하였듯이, 조심스러운  고려(careful consideration)[relegendo]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것으로부터이다." religio 가 제1변형의 한 개의 동사인 religare 로부터 유래될 수가 없다는 반대(objection)는, opinio  opinari 로부터, 그리고 rebellio rebellare 로부터 유래함을 우리가 상기할 때에, 커다란 무게를 가지지 못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자신의 저술인 하느님의 도성(City of God), X, 3 에서, 다음과 같은 회복 행위의 의미로 rebellare 로부터 religio 을 도출합니다: "태만 행위(neglect)[negligentes]를 통하여 하느님을 이미 상실하였는데, 우리는 그분을 회복하고[religentes] 그리고 그분 쪽으로 끌려가게 된다." 속량(Redemption)의 개념을 의미하는, 바로 이러한 설명은 경신(敬)(religion)이라는 원시적인 관념(primary idea)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 자신도 이 어원(deviration)에 만족하게 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저술인 "철회(撤回)(Retractions)들", I, xiii 에서, 그가 락탄티오(Lactantius, 240-320년)에 의하여 제시된 어원(derivation)을 선호하여, 그것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인 "On the True Religion" 에서, 후자의 의미를 적용하는데,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경신(敬)(religion)은 한 분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쪽으로 우리를 묶는다(binds)[religat]."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ams Aquinas, 1225-1274년)는,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II, Q. lxxxi, a. 1 (<--- 필독 권고) 에서, 세 개의 어원(derivations)들 모두를, 어느 것에 대한 선호의 표명 행위(pronouncing) 없이, 제시합니다. 정확한 어원은 락탄티오(Lactantius, 240-320년)에 의하여 제공되었은 바로 그것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신(敬)(religion)은 그것의 가장 단체적 형태로(in its simplest form) 하느님 쪽으로 묶여져 있음(being bound to)이라는 개념(notion)을 의미하며, 그리고 이 동일한 개념은, 그쪽으로 개인들이 다소의 장엄한 서원(vows)들로써 자기 자신들을 자발적으로 묶는(bind), 청빈(poverty), 순결(chastity), 그리고 순명(obedience)의 삶[즉, 수도회의 삶(religious life)]에 적용되듯이, 그것의 가장 구체적인 의미에 있어 경신(敬)(religion)이라는 단어에 있어 최고의 의미(uppermost)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묶여진 자들은 경신(敬)적인 자들(religious)[즉, 수사들 혹은 수녀들]로서 알려지게 됩니다.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2. 다음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저술인 "하느님의 도성(De Civitate Dei, City of God)", Book X, Chapter 1의 세 번째 단락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fathers/120110.htm

(발췌 시작)

The word religion might seem to express more definitely the worship due to God alone, and therefore Latin translators have used this word to represent (야고보 1,26; 1,27); yet, as not only the uneducated, but also the best instructed, use the word religion to express human ties, and relationships, and affinities, it would inevitably introduce ambiguity to use this word in discussing the worship of God, unable as we are to say that religion is nothing else than the worship of God, without contradicting the common usage which applies this word to the observance of social relationships. Piety, again, or, as the Greeks say,, is commonly understood as the proper designation of the worship of God. Yet this word also is used of dutifulness to parents. The common people, too, use it of works of charity, which, I suppose, arises from the circumstance that God enjoins the performance of such works, and declares that He is pleased with them instead of, or in preference to sacrifices(이사야 1,10-17; 예레미야 7,22-23; 호세아 6,6 참조). From this usage it has also come to pass that God Himself is called pious, in which sense the Greeks never use(사도 행전 17,23; 1티모테오 5,4), thoughis applied to works of charity by their common people also. In some passages of Scripture, therefore, they have sought to preserve the distinction by using not, the more general word, but(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1티모테오 2,10), which literally denotes the worship of God. We, on the other hand, cannot express either of these ideas by one word. This worship, then, which in Greek is called(latreia, 하느님께 제공되는 봉사, 요한 16,2; 로마 9,4; 12,1; 히브리 9,1; 9,6), and in Latin servitus [service], but the service due to God only; this worship, which in Greek is called(야고보 1,26; 1,27), and in Latin religio, but the religion by which we are bound to God only; this worship, which they call(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1티모테오 2,10), but which we cannot express in one word, but call it the worship of God this, we say, belongs only to that God who is the true God, and who makes His worshippers gods. And therefore, whoever these immortal and blessed inhabitants of heaven be, if they do not love us, and wish us to be blessed, then we ought not to worship them; and if they do love us and desire our happiness, they cannot wish us to be made happy by any other means than they themselves have enjoyed — for how could they wish our blessedness to flow from one source, theirs from another?

 

경신(神, religion) 이라는 단어가 오직 하느님께만 정당한 예배를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리하여 그 결과 라틴어로의 번역자(Latin translators)들은 바로 이 단어를 (야고보 1,26; 1,27)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미 사용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교육받지 못한 자들뿐만이 아니라, 가장 잘 교육받은 자들도 또한 경신(religion)이라는 단어를 인간적 유대(human ties)들을, 그리고 관계(relations들을, 그리고 밀접한 관계(affinities)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에 대한 예배를 논의함에 있어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단어를 사회적 관계들의 준수에 적용하는 통상의 사용에 모순됨 없이, 우리가 그러하듯이(as we are) 경신(religion)이 단지 하느님에 대한 예배일 따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모호함(ambiguity)을 불가피하게 도입하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 piety, 혹은, 그리스인들이 말하듯이, 은, 하느님에 대한 예배의 고유한 명칭(proper designation)으로서 통상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yet), 바로 이 단어는 부모들 쪽으로 의무를 다함(dutifulness)에 대하여 사용됩니다. 일반 백성/평민들(the common people)은, 또한, 애덕의 일(the works of charity)들(*1)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사용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들의 실행을 명하시는(enjoins), 그리고 당신께서, 희생 제물 대신에, 혹은 희생 제물보다는, 그들에 만족한다고 선포하시는(이사야 1,10-17; 예레미야 7,22-23; 호세아 6,6 참조), 상황(circumstance)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저는 추측합니다(suppose).(*2) 바로 이러한 사용으로부터 하느님 당신 자신께서 당연한 의무들에 대하여 충실하시다(pious)(*3)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 또한 이미 통용되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러한 의미로 그리스인들은, 비록이 또한 그들의 보통 사람들에 의한 애덕의 일들에 적용됨에도 불구하고, (사도 행전 17,23; 1티모테오 5,4)를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4) 그러므로, 성경의 일부 구절들에서 그들은, 더 일반적인 단어인,가 아니고, 하느님에 대한 예배를 자구(字句)대로(literally) 표시하는,(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1티모테오 2,10)을 사용함으로써 이 구별(distinction)을 보존하려고 이미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의 단어(one word)로써 다음과 같은 관념(ideas)들 중의 어느 것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i) 동시에(then), 그리스어로(latreia, 하느님께 제공되는 봉사, 즉, 흠숭지례(欽崇之禮), 요한 16,2; 로마 9,4; 12,1; 히브리 9,1; 9,6)라고, 그리고 라틴어로 servitus [봉사(service)]라고, 불리는, 오로지 이 예배는 오직 하느님께만 정당한(due), 바로 그러한 예배; (ii) 그리스어로 (야고보 1,26; 1,27), 라고, 그리고 라틴어로 religio 라고 불리는, 오로지, 그것에 의하여 오직 하느님께만 우리가 의무지워지는(are bound to), 경신(敬, religion)인, 바로 그러한 예배; (iii) 그들이(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1티모테오 2,10)라고 부르는,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고, 오로지 이것을 하느님에 대한 예배(the worship of God)라고 부르는, 바로 그러한 예배 - 바로 이 예배가 참 하느님이신 분, 그리고 당신의 예배자들을 신(god)로 만드시는 분이신, 바로 그러한 하느님께 오로지 속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 하늘(heaven)의, 이들 불멸의 그리고 복받은, 거주자들이 누구든지간에, 만약에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지(love) 않으나, 그러나 우리가 복받게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들을 마땅히 예배하지(worship) 말아야 하며,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고(love)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욕망한다면(desire),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이미 향유해온 수단 이외의 어떠한 다른 수단(means)에 의하여 우리가 행복하게 되기를 바랄(wish) 수 없는데, 이는, [만약에 그들이] 또다른 원천으로부터 자신들의 복된 상태를 가진다면, 어떻게 그들이 하나의 원천(one source)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우리의 복된 상태(blessedness)를 바랄 수 있겠는지요? 떄문입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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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1-1) 다음에 있는, 2013년 11월 24일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번째 교황 권고 [제목: 복음의 기쁨] 제201항의 각주로 제시되고 있는,

[171]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다음에 있는, 2012년 10월 7일자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Bulletin인, 58개의 제안/건의들 중의 Proposition 45 [제목: The Role of the Lay Faithful in the New Evangelization(새로운 복음화에 있어 평신도 열심 신자들의 역할)]에서 "애덕의 일(the works of charity)들", 즉,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harity)의 일들" 이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171]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1-2)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특히 세례의 부재(absence)에 있어 의화(justification)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설명이 주어진"애덕의 행위(act of charity)" 라는 용어의 설명은 다음의 글의 제3-2항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9.htm <----- 필독 권고

 

(*1-3) 여기서 말하는 "애덕의 일(the works of charity)들", 즉, "하느님이 사랑받게 되는 사랑(charity)의 일들" 은, 소위 말하는, "자선 제공(almsgiving)" 을 포함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32. Almsdeeds(자선 행위들), a1, Whether almsgiving is an act of charity(자선 제공이 애덕의 한 행위인지요?)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2

 

(*1-4)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6,1-18에서 구체적으로 거명하신, 기도(prayer), 단식(fasting), 자선 제공(almsgiving)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의로운 일들(piety, righteous deeds, 즉, 탁월한 선행들)" (칠십인 역 토빗 12,8)"자선 제공"이 포함됨에 주목하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44.htm <----- 필독 권고

 

(*2) 게시자 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piety" 의 용례들의 사회 문화적 근거를 제시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가르침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2-6항에 있는 글의 각주 1)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_eusebeia_JP_II.htm <----- 필독 권고

 

(*3) 게시자 주:  바로 이 문장에서, "pious" 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복원/회복된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한" 이라는 표현 대신에, 세속의 영한 사전에 주어진, 경건한, 신앙심 깊은, 독실한, 충실한,  효성스러운, 등의 단어들 중의 어느 단어를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선택하는 것이, 우리말로 번역된 문장의 전후 문맥 안에서, 번연 대본의 대응하는 문장의 의미를 온전하게 잘 전달하는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검토하도록 하라.

 

(*4) 게시자 주: [질문 1에 대한 답변 시작] "piety" 라는 용어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여기까지의 설명이, 사실은, "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의 표출(expression)에 대한 서술임에 주목하라.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민간(일반 백성/평민들)"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의미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들일 경우에는, "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 라는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Christian piety)" 라는 표현이, 이 충실의 행위가 거룩한 전례(the Liturgy)의 정신(spirit), 규범(norms)들, 그리고 리듬(rhythms)들과 조화로워야 한다는 추가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 한하여,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4항에 발췌된, 2001년 12월 17일자 교황청 경신 성사성 문헌 [제목: Directory on Popular Piety and the Liturgy] 제6항-제10항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또한 상기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19.htm 

 

질문 1에 대한 답변은 아래의 제3항에서 이어집니다.

 

(*5) 게시자 주: 위의 글의 전체 문맥은, "사도 행전""1티모테오서"의 최종 저술 시기보다 앞선 시기에, 그리스어본 "야고보서" 가 이미 저술되었음을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54-430년)가 증언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에 있는, 역사 비평 성서학자였던, 영국 성공회 주교 John A.T. Robinson(1919-1983년)에 의하여 1976년에 저술된, 신약 성경 경전들의 저술 연대 분석 논문 [제목: Redating the NEW TESTAMENT]과도 일치함에 또한 주목하라:

http://richardwaynegarganta.com/redating-testament.pdf [제316쪽]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약간의 참고 자료: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2-3.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기에,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에서 그를 "신학자(the theologian)" 라고 부르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경신(敬, religion)",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 등의 윤리덕(moral virtues)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2항에 있으니, 이 글의 후반부로서,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htm <----- 필독 권고

 

3.

게시자 주 3: 위의 (*4) 에서 시작된, 질문 1에 대한 답변은 이번 항에서 계속됩니다.

 

3-1. 특히,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 이 한 개의 자연덕(a natural virtue)으로서 인간들에게 주어지므로, "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 이라는 한 개의 윤리덕(a moral virtue)의 보급(普及) 및 실천(實踐)의 활성화(活性化)가 "복음화(evantelization)" "토착화(inculturation)"를 위한 한 개의 필요 조건(a necessary condition)임을 지적하고 있는,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글의 게시자 주 2-6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몹시 바쁜 분들의 경우에는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아래로 내려가면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24_eusebeia_JP_II.htm <----- 필독 권고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3-2.

질문 2: 대표적인 "민간의(일반 백성/평민들 사이의),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opular piety)"이라는 한 개의 윤리덕(a moral virtue)실천(實踐, practice)의 예(example)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시작: 예를 들어, 연도(연령기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3-2-1. 2005년 9월 2일에 작성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연도의 대상은?" 제목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551.htm

 

3-2-2. 2005년 9월 25일에 작성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가톨릭 신자로서 앞으로 부모상을 당할 분들을 위하여.." 제목의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555.htm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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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10시간 (자료 조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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