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성당 게시판

보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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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연 [tr.clara] 쪽지 캡슐

1999-07-02 ㅣ No.73

 

 

               보약

 

 

그 남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착하고 상냥하던 아내가 며칠 전부터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거니,

오늘은 아침부터 짜증을 심하게 내었습니다.

냉장고의 문을 쾅쾅 소리나게 닫으면서, 냉장고가 너무 작아서 속상하다고 아내는 불평을 했습니다.

하긴 그들의 냉장고는 이제는 골동품상에서나 볼 수 있는 200리터짜리 연녹색 냉장고였습니다. 15년이나 된 천연기념물같은 냉장고였지요. 그래도 알뜰한 아내는 한번도 불평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 남자는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아내의 저 갑작스러운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내는 요즘 나 모르게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남편 얼굴이 보기 싫어진 권태기가 온 것일까... 그 남자는 고민만 할 뿐 아내에게 시원스럽게 묻지를 못합니다.

 

갑자기 냉동실의 문이 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며칠 전 어머니께서 그 남자를 위해서 보내주신 보약들이 우르르 쏟아졌습니다. 냉동실에서 꽁꽁 언 보약팩들은 마치 얼음덩이가 쏟아지듯이 쏟아졌고, 아내는 기가 막힌 듯이 바라보고 있었지요. 아내는 쏟아진 보약팩들을 하나씩 주워서 다시 냉장고에 넣었지만, 좁은 냉동실은 그 보약들을 다 품지 못하고 쏟아내고 또 쏟아내곤 했습니다. 그 남자는 뒤늦게 달려가서 아내를 도왔지만 아내는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때서야 그 남자는 아내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남자도 아내의 알 수 없는 눈물과 우울함이 서운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남자가 드디어 물었습니다.

 

"여보, 우리도 냉장고 큰 걸로 바꿀가?"

그러자 아내는 눈물이 남은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더니 한 숨을 쉬면서 대답했습니다.

"내가 지금 냉장고가 작아서 이러는 줄 아세요?"

 

 

그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복도에 서서 담배를 한대 피워물다가 말고 그 남자는 '아차, 그랬수가' 하고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무딘 그 남자는 그렇게 한 발 늦게야 아내가 흘린 문물의 이유와 짜증의 이유를 알았던 거지요. 몸이 약한 딸을 위해서 보약 한 첩 지어 줄 친정어머니가 안계신 아내. 아마도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보약을 지어보내주신 시어머니가 고맙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신 친정 어머니가 그리워서 그렇게 며칠 슬펐던 것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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