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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Verbum Caro Fact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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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9-23 ㅣ No.1379

 

축일:9월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San Pio da Pietrelcina (Francesco Forgione)

BLESSED PIO FORGIONE (Padre Pio)

CAPUCHIN PRIEST

Pietralcina, Benevento, 25 maggio 1887

-San Giovanni Rotondo, Foggia, 23 settembre 1968

Venerable:18 December 1997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 :2 May 1999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16 June 2002 by Pope John Paul II at Rome, Italy

Pio=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devout person, religious, pietoso

 

 

 

성프란치스꼬의 거룩한 상흔 축일: 9월17일.게시판1369번.

San Francesco d’Assisi, Impressione delle Stimmate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사건은

육화와 수난을 통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성 프란치스코에게 정확히 알려준 사건이며

동시에 성 프란치스코의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극치를 이룬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그리스도화를 가능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성프란치스꼬의 오상은 수난 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닮도록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즉 가난의 구체적 표지이며 성인의 일생을 극적으로 요약하는 사건인 것이다.

성프란치스꼬는 오상을 받음으로 완전한 해방 체험을 하게된다.

 

*성프란치스꼬의 거룩한 상흔 축일: 9월17일.게시판136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성 비오 사제는 1887년에 이탈리아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나,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한 뒤 191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을 섬겼으며,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간직하며 살았다고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6월 16일에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1887-1968)
카푸친의 최근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1887-1968)는 1903년에 카푸친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에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평생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오가 1918년에 경당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 하는 동안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오상은 팔과 손과 옆구리에 기적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을 사랑한 비오는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남은 일생을 보냈다.
매일 미사를 드리신 다음 수시간 동안 고해 성사를 죄인들에게 주고 하느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었다.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신의 건강에도 관심을 많이 쓴 성 비오는
산 죠바니 로톤도에서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현대적인 병원을 세웠다.
널리 인기를 얻은 비오 형제는 항상 기도하는 가난한 형제로 남고 싶어했다.
그리고 1948년에 평화와 교황님의 지향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모임도 조직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형제적인 덕담과 영성 지도를 주었다.
기적과 거룩함, 인정과 유머감각에 가득찬 생활 끝에 비오 형제는 1968년에 죽음 자매를 만났고
2002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의 시성을 거행하셨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오상의 비오 신부님

 

1. 2002년 6월 16일, 오상의 비오 신부님(1887-1968년)이 시성되셨다.

내겐 지나칠 수 없는 날이었고, 1999년 5월 2일 시복식에 이어 3년 만에 찾아온 기쁨의 날이었다.1987년에 처음으로 "마리아"지에서 비오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리 시대에 이토록 놀라운 분이 사셨다.’는 사실에 놀랐고,’이토록 놀라운 분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접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 출신의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 23일에 81세로, 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산조반니 로톤도(S. Giovanni Rotondo)의 수도원에서 돌아가셨다. 비오 신부님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서 반세기 동안 어떠한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五傷)을 지니고 사셨다. 손바닥에 난 작은 동전 크기의 구멍에서, 그리고 발과 가슴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수많은 기적적인 병치유가 이 수도사제의 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예언, 신비한 향내,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 공중 부상 등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증언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었던 소녀 젬마 양이 보게 된 것이라든지,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실명한 오른쪽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조반니 사비노의 기적적 치유는 과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2.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어려운 여행에도 아랑곳없이 비오 신부님을 뵙고자 산조반니 로톤도를 찾아온 것은, 단지 기적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실 수많은 순례자들은 근본적으로 영성적 동기 때문에 비오 신부님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부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분을 찾는 첫번째 이유는  그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단순히 기억 속에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거하였다.

 

 

그러하기에 역대 교황님들도 큰 사랑으로 비오 신부님을 대하셨는데,1921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했는데,그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같은 증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3.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다.

선종하기 직전인 1967년에는 만오천 명의 여자와 만 명의 남자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사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며칠씩 차례를 기다려야 했고참다운 회개와 통회가 선행되어야 했기에 적어도 편안하고 친절한 만남은 아니었다.

 

 

비오 신부님은 신중하지 않은 이에게는 엄격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을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물론 대개는 몇 달 또는 며칠 뒤에 되돌아와 진정으로 뉘우치며 고해성사를 보았고, 그로 인하여 삶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영성 지도에서 그분의 모든 위대함이 드러나는데,그는 독특한 지도 방법과 영혼들의 고뇌에 그 자신이 함께함으로써 삶을 변화시켰다.다음의 말씀이 그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4. 또한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여 1시간 반 정도 집전하는 미사는,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같아지려는 그의 영성의 절정이었다.  밤 1시부터 사람들은 성당 문이 열릴 때까지 서서 기도하며 기다린다. 멀리서 온 그들은 하룻밤을 설치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비오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자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성당 문이 열리면 성당은 이내 신자들로 꽉 차고, 신부님의 열정 어린 미사는 때론 두 세 시간씩 계속되곤 하였다.

 

 

비오 신부님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여있었고,"왜요?"라는 물음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는 미사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미사 때마다 양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에 떨어지곤 하였는데,온몸으로 십자가의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에 대한 그분의 열정은 다음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은 태양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성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대 건너편에는 자주,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 제가 하느님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하며 회개하곤 했다.

 

 

5. 비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긴 소송은 1969년에 시작되어  1999년 5월 2일 시복식을 거쳐, 2002년 6월 16일로 막을 내렸으나 그분의 사도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되었다. 나는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그리고 타종교인과 믿지 않는 이들이 비오 신부님을 통하여 열성을 회복하고예수님을 이 시대에 새롭게 만나는 일이 확산되리라 믿는다.

 

 

"나는 이 세상에 있을 때보다 세상을 떠난 뒤에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하신 비오 신부님이 그 약속을 이 땅에서 이루어가시리라 믿는다. 성인께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심으로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듯이,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일치하심으로 이 땅의 더 많은 영혼들을 특히 북녘 땅의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나는 고통을 사랑합니다. 고통을 위한 고통이 아닙니다.  나는 하느님께 고통을 받을 수 있기를 간청했고, 그 고통에서 생겨나는 열매 때문에,  또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 때문에 고통을 열망합니다. 고통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이 구원되고, 불쌍한 연옥영혼들의 고통이 단축될 것입니다." 

-송열섭 가시미로, 청주 용암동 성당 주임신부, 경향잡지, 2002년 11월호에서- 

 

 

오상의 비오신부

저 자: 요란A.슈그,역 자:송열섭,가톨릭출판사    

 

"이 책은 카프친 프란치스코회 요한 슈그 수사 신부가비오 신부를 만난 사람들의 구체적인 증언들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저자는 비오 신부 가까이에서 생활했던 신부, 수녀, 전문의와 평신도들 등 스물아홉 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신앙의 핵심 주제인 ’십자가의 예수님’ , ’미사’, ’고백성사’, ’기도’,’복되신 동정 마리아’ 등의 의미를 새롭고 감동깊게 이야기한다. 50년 동안 손과 발, 옆구리에 오상을 지녔던 비오 신부는 어마어마하게 큰 영적 능력이랄까 아니면 사람을 끄는 힘을 가진, 신약성서적 의미에서 카리스마적 존재였다. 비오 신부는 훌륭한 삶, 성성, 덕행으로 충만한 분이었다. 그분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게 대한 특별한 신심과 함께 끝없는 기도, 고백성사와 영적 만남을 통해 전세계 그리스도인에게 사도직으로써 많은 영웅적 희생 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감탄할 만한 사랑에 찬 고행의 삶을 살았다. 그분의 삶은 제단과 고해실이라는 두 기둥으로 압축되며 사제직의 이러한 본질적이며 영속적인 가치는 비오 신부에게서 뛰어나게 실현되었다. 우리는 이 증언들을 통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영적지도로 영혼 들을 돕는 데에 온 삶을 바친 비오 신부의 자비와 신앙의 핵심 주제인 ’십자가의 예수님’, ’미사’, ’고해 성사’, ’기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등의 의미를새롭고 감동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저자: H. 바익셀브라운,역자: 최옥식, 성바오로출판사

 

이 책은 비오 신부의 많은 일화들을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소개함으로써 생애의 행적에 대해 한번쯤 품어 봄직한 의혹들을 풀어주고 있다.5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의 오상을 간직 한 채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자신에게 인도된 영적, 육체적 병자들을 치유해 준 비오 신부에 관해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다. 비오 신부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저자 H. 바익셀라운은 비오 신부의 기적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뿐 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느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호소하는지 헤아릴 수 있도록 이끌고자 했다. 비오 신부는 기적을 잃어버린 20세기를 우리와 함께 살아간 사람이었지만 오상을 받고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며, 고백성사를 보는 이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꿰고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을 보여준 일들은 하느님의 전능과 은총을 증거하고 선포하였다.  비오 신부가 보여준 어떤 기적은 결국「십자가의 영광」으로 귀결된다.  기도와 사랑」의 삶 자체가 다른 어떤 기적보다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기적이었다.  비오 신부에 관한 작지만 진솔한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구세주를 향해 활짝 열릴 수 있도록 해준다..

  

update 2004.9.23

 

♬14.Canto Gregoriano-Verbum Caro Factum Est

 

 

 

 

 

 






십자가와 고해소와 병원
1999년, 피에트렐치나(Pietrelcina)의 성 비오의 시복식 강론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오상'의 낙인이 찍힌 그의 몸은 파스카 신비의 특징인 죽음과 부활 간의 그 긴밀한 유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피에트렐치나의 복자 비오는 특유의 열렬함으로 주님 수난에 동참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말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탁월한 사랑의 학교입니다. 실은 사랑의 원천입니다. 고통으로 정화된 이 충실한 제자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수 없는 요청인, 구원의 복음에로 마음들을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를 만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의 신앙을 되찾았습니다. 그의 모범에 영감을 받은 기도 모임들이 세계만방에서 급작스럽게 발생했습니다. 무리지어 몰려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는 그 완전한 신성을 들어 올린 채, 그들에게 되풀이 말하곤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의 영혼을 성화시키는 일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어 보이십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사랑은 그의 형제자매들의 나약함과 고통 위에 마치 연고를 바르듯 마구 발려졌습니다. 그리하여 파드레 비오(Padre Pio)는 영혼들에 대한 열정과 인간 고통에 대한 염려에 하나 되어, 산 죠반니 로톤도(San Giovanni Rotondo)에 '고통을 덜어주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이라고 칭했던 종합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는 그 병원이 최고 수준의 병원이 되기를 바랐는데, 무엇보다도 그는 따뜻한 배려와 진심어린 보살핌으로 환자를 대하는 참 '인간다운' 의술에 마음을 썼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메시지를 더욱 더 간단명료하게 표현합니다. "영혼들을 지도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일, 이 말로 우리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의 사명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산 죠반니 로톤도 형제회 성가대석에 있는 피투성이 십자고상, 그리고 한 쪽에 배치된 자그맣고 소박한 목재 고해소, 그리고 또 다른 쪽의 크고 설비 좋은 대리석 병원건물은 몸과 영혼의 치유자인 페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의 탁월한 상징이다.



환시를 보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꼬마
총애 받는 카푸친 형제이며 성 프란치스코의 위대한 이 제자는 1887년 5월 27일, 남이탈리아의 해변 근교인 '피에트렐치나' 라는 작은 마을에 태어났다. 그는 5명의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농장에서 힘들게 일했던 그라치오 포르지오네(Forgione)와 마리아 요세바 데 눈지오(de Nunzio) 사이에서 태어난,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었다. (실제, 한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는 유아 때 사망했고, 맏형과 세 명의 여동생은 살아남았다.) 그는 그 다음 날 근교에 있는 성녀 안나의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프란치스코' 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훗날 그는 그 성당에서 미사복사로 봉사했고, 12살이 되었을 때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  신앙심 깊은 집안에서 자라난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지오네는 어릴 적부터 신심이 깊은 아이임이 분명했다. 그는 성가 부르기를 좋아했고, '미사' 놀이를 하며 혼자서 기도하거나 공부하기는 것을 선호했다. 아직 꼬마였던 그가 큰 돌을 베개로 삼아 맨바닥에 자거나 매 맞으신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행위를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만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예수님과 성모님과 수호천사의 환시를 보았으며, 악마의 공격들로 고통을 받아 왔는데, 그 사실을 그는 어른이 된 후에야 자백을 했다. 당시 그는 이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수염이 있는 형제가 되고 싶어"
프란치스코 부모는 1897년 처음으로 카푸친이 되고 싶어 하는 그의 소망을 알아챘다. '카밀로 형제' 라는 카푸친 동냥자이자 평형제가 기부예물을 구하러 정기적으로 그 지방에 두루 다니곤 했는데,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거룩한 사람에 대해서 매력을 느꼈고 부모에게 "나는 수염이 있는 형제(frate)가 되고 싶어" 라고 말했던 것이다. 초기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린 프란치스코는 꾸준히 자신의 꿈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카푸친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3년간의 공교육을 받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아들의 사적 교육비를 벌기 위해 처음엔 남미, 그리고 그 다음엔 미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프란치스코가 만 15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 모르코네(Morcone)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수련원에 받아들여졌다. 1903년 1월 22일 착복식 때, 그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형제' 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동기수련자들과 양성담당자들은 비오 형제의 모범적 태도와 경건함의 깊이에 감탄했다. 이에 한 동기수련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에게는 다른 학생들과 구별 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그는 늘 겸손했고, 묵상에 잠겨 있었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비오 형제에 관한 나의 가장 인상 깊은 점은 기도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1904년 1월 25일에 비오 형제는 유기서약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여러 지역 형제회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마쳤고,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07년 1월 27일, 그는 산텔리아 아 피아네지(Sant'Elia a Pianisi) 카푸친 지역 형제회에서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로서 종신서원을 발원했다.
 


 

비오 형제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었다. 그저 세례명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수호성인에 대한 신심을 가져야 함을 어머니께로부터 배워왔던 것이다.  사실 가족 모두는 무엇인가 필요할 때에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이라는 호칭으로 알려진 그 성인에게 기도하곤 했다. 카푸친 수련자로서 비오 형제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글, 특히 성 프란치스코 회칙을 공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훗날 그는 사람들에게 성 프란치스코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거나, 적어도 되기를 바라야 하는 생활모범으로 추천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재속 3회원으로서 삶을 주님께 봉헌한 여(女)평신도들을 영적 보조 해주는 것에 인생의 상당 부분을 썼다. 이 성 프란치스코 3회원들은 오늘날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라고 불린다. 이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비오 형제의 그 사랑과 신심에 보답해 주었다. 쇠약한 몸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비오 형제의 신학생 시절, 그때는 그가 카푸친 수도회를 떠나야 할지 많이 걱정할 때였다. 하지만 그가 가장 힘겨울 때 성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두 번 나타나 안심시키고 위로해주었던 것이다. 

1922년, 비오 형제는 자신의 카푸친 성소에 관하여 그의 영적인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니, 주님께서 저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덜 쓸모없는 아들이 될 은총을 베풀어 줄 수도 있도록, 그리하여 제가 동료 형제들에게 모범이 되어, 이 수도원에서 완전한 카푸친이 되고자 하는 열성이 저 안에서 점점 더 자라날 수도 있도록, 주님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거룩한 사제이자 완전한 희생제물
종신서약을 한 후, 비오 형제는 사제직을 위해 다시 학업에 착수하여 신학 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1908년 5월, 건강 문제들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고열을 동반한 열병에 극도로 시달렸다. 장상들의 특별허가로 그곳에서 개인적으로 신학공부를 이어갔고,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Benevento)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 밖에 안 되었다.

성 비오가 자신의 첫 미사를 바쳤던 날, 즉 1910년 8월 14일, 그는 자신의 사제서품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O rex, dona mihi animam meam pro qua rogo et populum meum pro quo obsecro [Esther 7,3] (임금님.. 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소청입니다. 아울러서 제 민족을 살려 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에스테르기 7장 3절]) 나의 첫 미사 기념. 제 갈망이시며 제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날 제가 얼마나 떨리는 채로 사랑의 신비 안에서 당신을 들어 높이는지! 저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하여, 세상을 위해서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을 위해서는 거룩한 사제이자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소서.

위의 말은 비오가 훗날 역사상 첫째로 오상을 받은 사제로서 놀라운 양식으로 살아가게 될 예언적 말들이었다.  
 



병에 시달리는 비오 형제
그러나 그는 건강 문제들 때문에 카푸친 형제회로 돌아오지 못하고, 피에트렐치나에 있는 그의 집에서 부모와 함께 6년을 더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비오 형제는 고열 외에도 천식성 기관지염에 평생 동안 시달렸고, 또한 커다란 신장 결석으로 인하여 심한 복통에도 자주 시달렸다. 훗날 궤양이 될 만성위염으로 고통을 받았고, 안염과 이비인후염에도 자주 시달렸다. 그는 형제회 바깥에서 죽을까봐 많이 걱정했고, 이 시절엔 특히 극심한 외로움 때문에 고통 받았다. 1915년 여름, 그는 군대에 가야 했는데 건강상태 때문에 몇 번이나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하지만 결국 그는 병역에 적합하다고 여겨져 1916년, 나폴리(Napoli)시에 있는 군부대로 배치되었다. 결국 1917년에 그는 폐결핵 진단을 받아 아예 귀향하게 됐다.



내면적 고통
하지만, 비오 형제의 육체적 고통들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고통으로 더욱 더 심해진 것이었다. 그는 자주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악마는 절망과 자만심으로 그를 계속 유혹했고, 그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폭행을 가한 적도 많았다. 악마는 '빛의 천사' 로 둔갑해 나타나 사악한 속임수를 쓰기도 했고, 영적지도자에게 주고받은 편지들을 없애버리거나 편지들의 내용을 바꾸어버려 그에게 고뇌를 더욱 가중시키기도 했다. 그의 영적지도자인 산 마르코 인 라미스(San Marco in Lamis)의 아우구스티노 형제는 편지에서 이 사실을 재확인했다. "악마는 벌거벗고 춤을 추는 처녀들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나 수사들의 젊은 친구로, 영적지도자 신부 혹은 관구봉사자 신부로, 교황 비오 10세로, 수호천사로, 성 프란치스코나 성모님으로 나타납니다." 비오 형제는 자신의 정신 상태와 환시가 불러일으킨 느낌들에 조용히 주의를 기울여, 예수님과 마리아님과 자신의 수호천사와 성 요셉,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전구와 보호를 끈질기게 믿음으로써 실제 환시들과 환각을 구별할 수 있었다. 스스로 쓴 편지에서 그는 악마의 빈번한 물리적 공격을 묘사했다. "악령들이 그들의 화를 나에게 표출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허락해 주신지가 벌써 22일이나 지났어요. 나의 아버지여, 나의 온 몸은 현재까지 우리 원수들에게 당해온 매질로 인해 타박상을 입고 있어요. 그 놈들은 제 맨몸을 때리기 위해 몇 번씩이나 나의 셔츠를 벗기기까지 했어요."



사랑으로 상처를 입은 형제
이러한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비오 형제는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에로 착실하게 발전해 나아가고 있었다. 1911년, 그는 보이지 않은 오상을 받았다. "그리고는 어젯밤 내가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은 일어났어요. 내 손바닥들 한 가운데에 일 센트 동전 크기의 빨간색 흔적들이 나타났어요. 그 빨간 흔적들의 중심에서는 격심한 통증이 동반되었어요. 왼손에 있는 고통은 더욱 더 확연한 것이어서 아직도 그것을 느낄 수 있어요. 내 두 발에도 역시 약간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이 빨간 흔적들은 그를 신경 쓰이게 했고, 그 안에서 엄청난 부끄러운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주님께 이 흔적들을 없애 달라고 기도했고, 그 표면적인 흔적들은 당분간 사라졌다.

1916년부터 비오 형제는 오랜 요양과 군복무로 인해 중단되었던 일상의 형제회 생활 안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산 조반니 로톤도의 바깥, 언덕 꼭대기에 있는 조그만 카푸친 집에서 머물렀는데, 그는 그곳에서 학업중인 카푸친 소신 학생들의 영적 지도자와 고해사제로 활동했다.  


 

신비가들은 가끔 하느님과 사랑스러운 일치를 지시하는 영혼과 심장의 꿰뚫림이나 transverberatio라는 영적 현상에 대해 말하는데 비오 형제는 그 현상을 체험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1918년 여름에  제 1 차 세계대전의 정전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는데 비오는 이에 응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내세웠다.  1915년 초반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나타나 그의 옆구리를 꿰뚫으셨다. 이의 결과로 비오 형제는 그때부터 옆구리에 육체적 상처가 있었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같은 해 9월 20일, 더욱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비오 형제는 그의 고해사제였던 산 마르코 인 라미스의 베네딕토 형제에게 보낸 1918년 10월 22일자 편지에서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지난 달 20일 아침, 나는 미사를 집전한 다음에 가대석에서 그만 단잠과 비슷한 졸리는 상태에 빠져버렸어요.. 나는 8월 5일 저녁에 뵈었던 분과 비슷한 신비스러운 분을 내 앞에서 뵈었어요. 그 유일한 차이점은 이분의 손발과 옆구리에서 피가 방울방울 흐르고 있었던 점이에요. 이 광경은 나를 몹시 무섭게 했는데, 그 순간에 느꼈던 것을 나는 묘사할 수가 없어요. 만일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내 가슴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나의 심장을 튼튼하게 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죽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환시는 사라졌고, 나는 나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져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경험했고 아직도 여전히 거의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이 괴로움을 상상해 보세요. 심장의 상처에서 거의 지속적으로 피가 나고 있는데, 특히 목요일 저녁부터 토요일까지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느끼는 이 상처들과 난처함으로 인한 고통으로 나는 죽어가고 있어요. 주님께서 이 상태를 덜어달라는 진심어린 나의 애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출혈로 죽을 것 같아 두려워요. 착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 은총을 허락해 주실까요? 적어도 이 외적인 흔적들이 일으키는 난처한 상황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겠지요? 나는 내 목소리를 높여 이 외적인 흔적들을 자비로이 제거하실 때까지 그분께 탄원을 멈추지 않겠어요. 이것은 고통이나 상처를 제거해 달라는 탄원이 아니에요. 내가 고통 받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제거해 달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훗날 교회 조사 때, 그는 신비스러운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까지 50년을 넘게 지체하셨다. 그리고 비오 형제가 이 경이로운 비밀을 지키고자 열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식은 곧바로 누설됐다. 오상은 비오 형제가 받은 영적인 은사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지만, 치유, 방언,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능력,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능력, 공중 부양,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예언, 탈혼, 환시, 음식이나 잠에 대한 비범한 금욕, 마음을 읽는 능력과 상처들에서 풍기는 향기들과 같은 수많은 다른 은사도 받았다.
 



시련들 한 가운데에도 순종하다
1919년 초반이 되자 오상에 대한 소식이 바깥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삶의 터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비오 형제에게서 희망의 상징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 뒤를 잇는 몇 년 동안, 의사들을 포함한 무수한 사람들이 오상 받은 사제를 직접 보기 위해 산 조반니 로톤도로 물려왔다. 그러나 비오 형제는 오상을 설명하려드는 의사들의 시도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 비오의 상흔을 조사하기 위해 온 인물들 중 어떤 조사관들은 그 상처들뿐만 아니라 그 형제의 삶과 사목에 대해서도 조사할 권한을 교회로부터 받은 사람들이었다. 교회의 권위자들은 소수의 광신적 추종자들의 행위와 비오 형제에 관한 그들의 놀라운 주장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 조사관들 중에는 유명한 의사이자 수도 사제인 조사관이 있었는데, 그는 그 시절의 교회 지도부로부터 매우 존경 받은 인물이었고, 오늘날 시성 지망자이기도 하다. 1920년 이 조사관이 산 조반니 로톤도에 왔을 때, 비오 형제는 교황청 검사성성의 서면 허가증 없이 상처를 검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거부에 화난 전문 조사관은 비오 형제가 '사람들의 맹신을 이용하는 무식하고 자해적인 사이코패스' 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결과로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 오상과 비오 형제를 둘러싼 다른 기이한 현상들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믿지 말기를 권했다. 다양한 여러 추가 조사들과 부정적인 보고들이 바티칸에 제출되었고 마침내 1931년 5월, 성좌는 비오 형제가 고해성사를 주거나 미사를 공공연히 집전하는 것을 금지했다.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그 규제들은 점차 철회되었지만, 또 다른 혐의들이 잇따랐기에 비오 형제는 다시 한 번 성좌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거짓 고소들, 진실 왜곡과 그의 사목에 대한 규제들, 이 모든 경우들 안에서 몹시 고통스러웠던 비오 형제였지만 그는 여전히 온전하게 순종했다. 규제들이 정식적으로 철회됐을 때까지 그는 성좌의 지시들과 장상들의 명령들을 글자 그대로 끝까지 따랐다.
 



'나는 그저 기도하는 가난한 형제가 되고 싶다'
대부분을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보냈던 그의 60년간 수도생활 동안, 비오 형제는 기도와 고해성사 및 영적 지도를 해주는 일에 온전히 헌신한 사람이었다. 비오 형제가 선종한지 3년도 채 안되었을 때, 바오로 6세 교황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이 사실이 너무나 잘 입증된다. "그분이 가졌던 명성은 얼마나 높은지! 세상만방에서 온 그분의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왜 그랬을까요? 그분이 철학자여서, 학자여서, 혹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그게 아니라, 그분은 미사를 겸손히 바치고 아침부터 밤까지 고해성사를 해주었던, 우리 주님의 오상 흔적을 가진 대표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진실로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오 형제는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자주 말하곤 했다. "나는 그저 기도하는 가난한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거의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지루하고 판에 박은, 진부한 상투 어구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형제자매를 위하여 전구하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지속적이고 꾸준한, 가끔은 고통스러운 대화였다. 그는 끊임없이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무도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때라도 그는 멈추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했다. 실제로 그는 오랜 기간 동안 기도 안에서 메마름을 견뎌냈고, 하느님께 버림받은 느낌을 체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하는 일에 꾸준히 헌신했고, 하루 내내 그리고 밤의 대부분을 하느님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책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지만,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그는 스스로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함께 기도하도록 초대하여 영감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기도하십시오. 온 세상이 기도를 필요로 하니 나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특히 여러분의 마음이 삶의 외로움을 느낄 때, 기도하십시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니 다 함께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미사의 위대한 신비를 보지 못하시는 겁니까?"
거룩한 미사는 비오 형제의 온 하루의 핵심이자 그의 모든 일과의 염려어린 관심사였고, 사제요 희생자이신 예수님과의 가장 긴밀한 친교의 순간이었다. 그는 자주 새벽 12시 30분, 혹은 1시에 깨어나 미사 시간이 됐었느냐고 묻곤 했다. 그리고 그는 로사리오를 바치며 몇 시간을 그의 의자에 앉아 미사를 준비하곤 했고, 결국 새벽 4시쯤이 되면 직접 대비하기 위해 제의실로 내려가곤 했다. 그 대비하는 시간은 아침 5시까지 지속되곤 했다. 그때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해골산에 올라가셨듯이 미사를 하기 위하여 제단에 오르곤 했다. 미사 집전 중에 비오 형제는 거의 지속적으로 울곤 했다. 이것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적은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홍수 같은 눈물을 흘리고 싶습니다. 미사의 위대한 신비를 보지 못하시는 겁니까?"


 

비오 형제는 비록 다른 사제들이 사용했던 예식 형식과 똑같은 예식을 사용했지만, 미사의 열정에 있어서는 분명히 실제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의 얼굴 표정은 열렬했고, 창백했으며, 변모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주 울기도 했다. 그는 그의 몸에서 아픈 진통을 겪었다. 때로는 두 시간씩이나 걸렸던 미사 동안에의 그의 행동거지와 소리 없는 흐느낌은 그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자들은 비오 형제의 강렬한 사랑과 고통을 지켜보면서 믿기도 했으며 기도하기도 했는데, 수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결함들을 깨닫고는 하느님께로 되돌아왔다. 비오 형제에게 그의 미사가 모든 것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도 그의 미사는 모든 것이었다. 한 번은 그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세상이 미사 없이 존재하는 것보다 태양 없이 존재하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달콤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내 심장의 박동은 극도로 강해요. 가끔 심장은 내 가슴에서 터져 나올 것만 같아요. 때때로 제단에서 나는 내가 묘사할 수 없는 큰 불을 느껴요. 특히 내 얼굴은 불길이 확 타오를 것만 같아요." 그리고 다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마음과 머리는 불타는 듯 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이로운 불이었어요. 내 입은 하느님의 아드님의 티 없는 살의 단맛 모두를 맛보았어요. 아아! 다시 한 번 이 모든 것을 느끼던 그 순간에, 내가 그 위로들을 내 마음속에 묻어버릴 수 있었다면, 나는 분명히 천국에 있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고 계시는지요! 그분의 영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요!" 하지만 미사 동안에 경험했던 그 위로들은 그의 특별한 고통들을 떨쳐 버리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미사를 위해 제의를 입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눈물흘림으로 나의 쓴맛을 덜어보고자 제의실을 떠나야 했어요. 미사 거행 동안, 정확히 축성의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시 동안 나에게 조그만 위로를 주셨다가 도로 쓴맛으로 되돌아가게 하셨어요.", "거룩한 미사는 나와 예수님 사이의 성스러운 일치예요. 당신의 인류구원 대사업에 동참할 은혜를 저에게 허락해주신 예수님, 그분께서 겪으셨던 그 모든 것을 나도 당치도 않게 겪게 되었어요." 때때로 비오 형제의 미사들은 아주 길긴 했지만, 그는 서있는 것에 전혀 지치지 않았다. "나는 전혀 서 있는 것에 지치지 않아요. 그리고 나는 전혀 지칠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은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통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에요." 영성체 때에, 그는 하느님과의 신비스러운 일치를 아주 깊게 경험했다. 그리고 미사 후에도 그는 주님께 대한 감사 안에서 아주 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미사가 끝나자 나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려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아아! 오늘 아침 그 천국과의 대화는 얼마나 달콤했는지요!.. 이런 표현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심장과 나의 심장은 용합되었어요. 두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한 심장만 뛰고 있었어요. 내 자신의 심장은 마치 바다 속에 빠진 물방울처럼 사라져버렸어요.. 기쁨의 눈물들이 얼굴을 타고 줄줄 흘러 내렸어요." 한 통의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신적인 희생과 영혼들의 구원 안에서 내가 예수님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유일한 위로예요."



거칠지만 헌신적인 고해사제
주님의 파스카 신비에 대한 비오 형제의 순응은 그것의 열매인, 화해의 사목에 대한 헌신을 필연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해서 비오 형제는 아침과 오후 안팎으로, 고해성사를 주는 일에 하루의 많은 시간을 바쳤다. 어떤 날은 14시간을 고해실 안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 시절의 풍습에 따라 남자 고해성사와 여자 고해성사를 따로따로 집전하곤 했다. 제의실에서는 남자들에게, 성당안 고해실에서는 여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화해시키는 일, 곧 고해성사를 주는 일은 비오 형제의 주된 사도직이었다. 고해성사 중에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심중을 알아차렸다. 자주, 죄인들이 제대로 고백할 용기가 없을 때, 비오 형제는 고해성사 동안 그들의 죄를 열거하곤 했다. 비오 형제는 매주 고해성사를 받을 것을 권했다. "고해성사는 영혼의 목욕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매주 (고해성사를 받으러) 가야 합니다. 나는 영혼들이 일주일 이상 고해성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비어 있는 방도 먼지를 뒤집어씁니다. 일주일 지나서 되돌아가보면 그 방은 먼지를 털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고해성사 중에, 그는 많은 요구를 하기도 했고, 때때로 거칠기도 했다. 하루는 어떤 남자가 비오 형제한테 고해성사를 받으러 산 조반니 로톤도에 갔다. 1954년에서 1955년 사이쯤이었다. 그가 자신의 죄를 다 고백하자, 비오 형제는 "고백할 것이 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님" 하고 대답했다. 비오 형제는 그 질문을 반복했다. "고백할 것이 더 있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님" 하고 말했다. 비오 형제는 세 번째로 그에게 "고백할 것이 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세 번째 부정하는 대답이 나오자 폭풍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비오 형제는 성령의 음성으로 "당장 나가! 당장 나가! 네가 죄를 뉘우치고 않기 때문이야!" 그 남자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느껴지는 수치심 때문에 겁에 질려 버렸다. 그가 어떤 말을 하려했는데, 이에 비오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닥쳐, 이 수다쟁이! 너는 이미 충분히 말했어. 지금은 내가 말 할 거야. 네가 디스코텍들에 다니는 것이 사실이지?", "예, 신부님.", "춤추는 것이 죄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 남자는 매우 놀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그의 지갑에 디스코클럽 멤버십카드가 있었다. 그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안 하겠다고 약속했고, 힘겹게 용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형제는 다른 고해사제들에게 자신의 경우를 본받지 말라고 권고했다. 마음을 읽는 그의 능력은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할 초자연적인 은사였다. 다른 고해사제들이 그렇게 무뚝뚝하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고, 이 하느님 자비의 성사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것에 대한 혐오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 형제들이 동시대의 유명한 고해사제 '헤르젝 노비의 성 레오폴도' 의 죄인들에 대한 온화함을 그에게 알려주었을 때에, 비오 형제는 스스로 "가장 처리하기가 어려운 죄인들을 나에게 보속으로 보냈기 때문에" 레오폴도 형제가 죄인들에게 쉽게 온유할 수 있는 것이라며, 농담으로 대답했다.


비오 성인은 고해성사를 주는 것 외에도 성체를 분배하곤 했고, 가끔 세례성사를 주었으며, 혼인성사 집전에 주례를 한 적도 있었다.



영혼들의 지도자
성 비오는 고해성사의 탁월한 수행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신들의 식별의 은사를 타고난 능수능란한 영혼의 지도자였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영적지도를 해주는 처지가 되었고, 그들은 비오 형제를 하느님께 매우 가까운 사람으로 알아 영적이면서 실천적인 그의 충고를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그는  힘겹게 얻어낸 자기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활용하여 완덕에 목말라하는 영혼들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었고, 분명하고 정확한 지시들과 단호하고 확실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적 생활의 일반 원칙들을 개인적, 사적, 구체적인 사례들에 잘 적용시키는 묘한 노하우가 있었다. 영적 지도를 받는 사람들을 책망할 때나 충고할 때나 격려할 때, 비오 형제는 항상 분명하고 솔직하고 진실했다. 그는 다른 이들의 고민과 슬픔, 십자가와 어려움에 적극적이며 진심어린 자세로 참여했고, 그들이 기뻐할 때나 선량함의 길로 진보했을 때 그도 함께 기뻐할 줄 알았다. 게다가, 악마의 속임수를 알아챌 능력, 은총의 활동과 하느님의 총애를 받음에 대한 현실을 분별할 능력, 그리고 의심과 불확실함과 유혹 때문에 동요되고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진정시킬 능력 - 비오 형제에게 있었던 이 모든 특이한 재주는 그의 가르침과 영적 지도를 특별히 효과적이며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에게는 영적 발전을 위한 다섯 개의 규칙이 있었다. 매주의 고해성사와 매일의 영성체, 영적 독서와 묵상, 그리고 양심성찰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보낸 영적지도 편지의 구절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걱정이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라, 마음속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작게 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아무런 장애 없이 마음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비오 형제의 영적지도의 지침은 다음과 같다. "기도하십시오!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의 프란치스칸 영성
비오 형제의 영성과 신심들과 기도생활은 전형적으로 프란치스칸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신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육화와 그분의 모친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대한 신심으로도 나타난다. 게다가 그는 '신적 옥수'이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깊은 존중을 가지고 있었다. 




골고타 산을 거쳐 타볼 산에 오름
비오 형제는 어린이이었을 적에도 그리스도 수난 신심과 그 수난에 참여하고픈 진심어린 바람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것을 발견한 어머니에게 어린 프란치스코 포르지오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행위를 설명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때려서 어깨에 피가 나게 했듯이, 나도 내 자신을 때려야 하는 거야."  평생 동안 비오 형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더욱 더 비슷해지도록 항상 노력했다. 그것은 그가 속량의 사업에 협조할 부르심을 받았다고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으면 그의 거룩함을 이해할 수 없다. 한 번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 목표에 성공적으로 이르기 위해서는 (교회의) '신적 머리' 를 따라야 하는데,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께서 친히 따르셨던 오직 그 길, 다시 말하면, 자기희생과 십자가의 그 길에 따라 선택받은 영혼을 이끌고 싶어 하십니다." 또, 우리는 비오 형제가 타볼 산의 영광을 수난의 신비와 관련시키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그의 한 편지에서 읽을 수 있다. "베드로와 함께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고 탄성을 지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죽음과 쇠못들과 가시들, 고통과 기이한 어둠들, 그리고 버림받음과 까무러침만이 보이는 해골산에 먼저 올라야 한다."



오! 거룩한 밤이여!
그와 동시에, 비오 형제는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로 인해 주님의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파스카 신비가 가능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잘 알았다.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 또한 성탄절과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몹시 좋아했다. 어린 시절, 그는 일찌감치 10월부터 손수 찰흙으로 구유의 작은 상들을 빚어 만들어 성탄 구유를 준비하곤 했다. 동료형제들은 비오 형제가 고해성사를 주면서도 구유를 직접 볼 수 있기 위해 성당 안 구유가 고해실 맞은편에 세워지기를 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구유 안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그에게 대단히 다정한 느낌들을 불러일으켜 자주 눈물을 흘리게 했다. 적어도 2명의 목격자들이 성탄성야미사 거행 전, 빛에 둘러싸인 비오 형제가 살아 계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비오 형제는 이 환시들에 대해 직접 밝히기를 꺼려했으며, 환시를 본 목격자들에게도 그들이 봤던 것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했다. 산 조반니 로톤도 형제회의 수호자들은 비오 형제가 형제회의 성탄성야미사 집전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아 그에게 성탄 밤 미사를 집전할 특권을 베풀었다. 어느 날, 그는 그의 고해사제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늘의 아기께서 그 조그만 가축우리에 뉘어지셨던 그 복된 밤에, 그분께서 나에게 체험하게 해주신 그 모든 거룩한 감정들을 형제의 마음에도 느끼게 해 주시기를 바라요. 아! 그 덧없이 행복한 밤에 내 마음이 느꼈던 것을 나는 거의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내 마음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고 있었어요."




감실에 계신 그 신적 옥수(獄囚, 감옥에 간힌 이)
비오 형제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몹시 사랑했다. 그는 저녁때의 성체강복 예식을 거행하는 것 외에, 수 시간 동안 감실에 계신 성찬례의 주님을 조배하곤 했다. 그가 이 성체조배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인용에서 입증된다. "인간적 영광을 천 년 동안 즐겨 누린다 해도 그것은 복된 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과 나누게 되는 달콤한 한 시간의 대화보다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가톨릭교회만이 성체 안에 참된 평화의 군주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가톨릭교회만이 참된 평화를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톨릭교회에 늘 가까이 머무르십시오."



성 비오의 '작은 엄마'
2009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산 조반니 로톤도로 순례할 동안의 연설에서, 성 비오의 성모 신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성모님을 사랑하고 성모님이 사랑을 받도록 만드십시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곤 했는데, 하늘의 어머니께 대한 그분의 모범적인 증거는 그의 말들보다도 크나큰 효과를 내는데 있었습니다... 세례 때에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받은 그분은 아시시의 그 '작은 빈자' 처럼 복되신 동정녀께 대하여 지극히 다정한 사랑을 키워왔습니다. 그 후, 섭리이신 분께서 여기 산조반니 로톤도, 즉 은총들의 성 마리아의 성지인 이곳으로 그분을 이끌어주셨고, 그분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무르셨습니다. 그분의 시신은 이곳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성모님의 어머니다운 응시 아래서, 그리고 성모님 전구의 힘으로 자신의 온전한 삶과 사도직을 살아왔습니다. 또한, 그분은 '고통을 덜어 주는 집' 마저 '병자의 나음' 이신 마리아님의 사업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오 형제는 자신의 소년시절, 나폴리 근처에 있는 폼페이(Pompei) 묵주기도의 성모님의 성지에 허락 없이 갔었다는 이야기를 후일에 알렸는데, 몰래 갔던 이유는 어머니가 전혀 허락해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나폴리에 주둔한 군인이었을 때에도 자주 그 성모성지에 찾아가곤 했다.


 

그가 몸소 작성한 마리아 무염시태에 관한 짧은 묵상 글과 그의 편지들 속에 드문드문 씌어진 참조 구절 외에, 마리아에 대한 그의 자필 증거자료들은 매우 적다. 그렇긴 하지만, 카푸친의 삶 일생 내내 끊임없이 바쳤던 묵주기도는 그가 전해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성모님을 기리는 '강론' 이었다. "묵주기도를 하루에 몇 번 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온전한(15단) 묵주기도를 하루에 35번 이상 해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 횟수에 놀라워하며 사람이 어떻게 그만큼 기도할 수 있느냐며 질문을 하자, 그는 "그대는 왜 그만큼 기도할 수 없는 거죠?" 하고 되물어보기만 했다. 그 대답을 미루어보면, 비오 형제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인생 말년, 묵주는 항상 그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묵주기도에 대해서 연설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의 평화, 악을 이겨낼 승리, 하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할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그의 신심은 어린이의 사랑과 같은 것이었고, 단순한 것이었으며 애정이 가득 찬 것이었다. 그는 성모님을 그저 ‘맘미나(Mammina)’, 즉 ‘작은엄마’라고 불렀다.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이 이탈리아에 모셔졌을 1959년, 성상이 도착하던 날, 비오 형제는 흉막염으로 중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포지아(Foggia)읍에서 기려지는 파티마의 성모님 예식에 참여하고 싶어 했지만 병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가 일정이 바뀌어, 순례 성모상이 산 조반니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병상에 누운 비오 성인은 성모상 방문을 맞이하는 9일 기도를 지도했다. 8월 6일 아침, 비오 형제는 지치긴 했지만, 성당으로 내려갈 수 있었고, 그곳 성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성모님께 황금 묵주를 봉헌했다. 누군가 그 성모상을 그의 얼굴 바로 앞까지 내려주었으므로 그는 성모상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이것은 어찌나 애정 어린 몸짓이었는지! 하지만, 오후가 되자 성모상을 실은 헬리콥터가 떠나기 위해 성당 상공을 날았고, 비오 형제는 그 헬리콥터를 눈물이 가득한 동경의 눈으로 우러러보며 큰 소리로 이렇게 한탄했다. "성모님, 나의 엄마, 당신은 이탈리아에 오셨고, 저는 병이 들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병든 저를 내버려 둔 채 떠나버리시는군요!" 이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몸의 떨림을 느꼈다. 그는 동료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병이 다 나았어요!" 정말로 그는 다 나았고, 예전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힘차져 있었다. 


 

해골산에서 미사성제를 거행할 때, 그는 십자가 밑에 서 계신 마리아님을 만나곤 했다. 그는 그 신비스러운 현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아드님을 봉헌하시기 위해, 해골산 십자가 밑에 계셨던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어떻게 제단의 신비스러운 해골산에는 안 계실 수가 있겠습니까?" 비오 형제는 임종할 때,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께 자신의 모든 주의를 돌렸고, 예수님과 마리아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드럽게 되풀이하며 불렀다.

성 요셉과 성 프란치스코와 자신의 수호천사에 대한 신심도 비오 형제의 영생 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위령과 해방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곤 했다.



카푸친 회원의 단순한 일상생활
더욱이, 비오 성인은 마음 기도를 공동체적으로 바치며 시간 전례를 형제들과 함께 거행함으로써 카푸친회의 기도생활을 끝까지 실행했다. 그는 건강 상태가 허락하는 데만큼 그 시절의 카푸친 형제들의 일상 일정을 충실히 따랐다. 보통 새벽 2시나 3시의 그의 기상으로 하루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일반적으로 새벽 5시에 거행되는 미사 때까지, 기도와 묵상 안에서 그는 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미사 후, 비오 형제는 제의를 벗은 다음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작은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위치한 가대석으로 가곤했다. 그 다음부터 점심시간 때까지, 그리고 오후 시간 동안에도, 그는 고해성사를 주곤 했다. 정오 12시에 형제회의 식당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난 후에, 마당으로 나가서 30분 정도 휴식을 가졌고, 짧은 낮잠을 잔 후, 일어나서 묵주 기도를 바치곤 했다. 이른 오후, 그는 형제들과 함께 낮 기도를 낭송한 다음, 오랜 시간 동안 가대석에서 개인 기도를 했다. 그 후, 잠시 편지 쓰는 시간을 가졌다가, 오후 4시 30분까지 하는 고해성사 사목을 다시 시작했다. 4시 반이 되면, 그는 다시 형제들과 모여서 저녁기도와 성체 강복식을 거행했다. 그 이후, 그는 10분에서 15분 동안 마당에 나가 있다가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 쥬스와 크래커를 먹으며 공동체와 함께 했다. (1950년부터, 그는 오직 하루에 30그램의 음식물만 섭취했다.)해질녘이 되면, 그는 가대석 창문 밑에 모인 사람들에게 강복해주었고, 저녁때엔 다른 사제들과 의논을 하거나 시내에서 강의를 하거나 편지들을 더 확인하여 답장하곤 했다. 늦은 저녁때에는 형제회와 함께 끝기도를 바쳤고, 그 후 나머지 형제들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불면증에 시달렸던 비오 형제는 새벽 12시 45분까지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를 하곤 했다. 밤 기도 시간이었을 그 때에, 그는 가대석에서 20여명의 형제들과 함께 기도를 하곤 했고, 끝내 새벽 1시 30분쯤이 돼서야,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들었다.


 

휴식 시간이면,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와 흉내를 잘 내는 타고난 재주로 형제들과 그들의 방문객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고, 듣는 이들이 자신의 농담에 미소를 짓거나 재미있어하면 그는 매우 좋아했다. 그는 친절의 기술을 잘 파악했고, 사려 깊은 사람으로 잘 살 줄 알았다. 그리고 지나친 열정이나 서두름으로 인하여 실수를 하거나 요령 없이 동료 형제를 속상하게 할 때면, 어떻게 용서를 청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의의 표시에 감동했고, 누군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감동하곤 했다. 그는 모든 친절한 행위와 즐거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기쁨과 긴밀한 우정을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그는 동행이 있는 것을 좋아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가족과의 이별과 고독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수도생활을 준비하고 있는 소신학교 소년들에게도 늘 상냥하고 친절했으며 아버지다운 태도를 보였다. 


 




고통을 덜어 주는 집
성 비오의 애덕은 형제들의 집안 사벽 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다만 영적으로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고쳐주곤 했다. 그의 전구 기도를 통하여 수많은 병자들과 중증 심신장애인들의 치유가 허락되었지만, 성 비오의 치유의 사랑은 대개는 그를 둘러싼 병자들과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의료적 관심으로 더 나타났다. 비오 형제가 산 조반니 로톤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 그 고장 주민들에게는 의료 시설이 아예 없었다. 1925년에 이미, 비오 형제는 그 고장에 병자들을 위한 요양원이 설립되기를 원했는데, 그는 아낌없는 기부금을 모아서 예전의 수도원을 규모가 작은 '성 프란치스코의 시립 병원' 으로 개조해냈다. 그 병원은 두 칸의 병실과 기능적 의료 장비와 8명 환자를 위한 병상이 갖추어졌지만, 불행하게도 1938년도의 지진으로 인해 모두 다 부서져버렸다. 1940년이 되자, 비오 형제는 형제회 건물 옆에 종합병원을 지을 착안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병원을 '환자로 하여금, 환자 자신의 치유를 위하여 수고하는 이들을 하느님의 협조자들이자 은총 개입의 길을 준비시키는 데에 종사하는 이들로서 인정하게 할 곳' 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 계획을 위한 기부금은 세계만방에서 흘러 들어왔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신문기자로서 업무 수행 중이었던, 영국의 인도주의자이자인‘바르바라 우어르드(Barbara Ward)는 국제연합구제부흥 사업국(UNRRA)으로부터 이 계획을 위하여 325,000달러짜리 보조금을 얻어내는 데에 주역을 했다. 비오 형제가 그 사업을 직접 감독할 수 있기 위해서, 1957년, 비오 12세 교황은 청빈 서원에 의해 발원된 의무를 관면해주었다. 공사는 1947년에 착공되었고, 병원은 1956년에 개원됐다. 1년 후, 비오 형제는 의사들과 인턴들의 의학연구와 그리스도교 양성 발전을 위한 종교의학센터 계획을 발표했다.



비오 형제는 이 병원의 사명을 다음의 연설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사업이, 육체적 고통만을 덜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여러분의 비범하고 후한 선행의 수단으로 실현된 그저 모범적인 치료소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병원은 다른 여러 사람들이 베푸는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곳으로 여겨지고, 또 환자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평온하게 묵상함으로써 고통을 현명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곳으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덜어 주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 이라고 불리는 이 병원은 개원 당시 250대의 병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1200대 정도의 병상이 있는 곳으로 발전했다.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오 형제의 사랑은 고통 받는 이들의 십자가를 함께 져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깊은 동정심으로 그들과 함께 고통 받는 것, 즉 그의 말대로 자신을 '모든 이의 키레네의 시몬'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 그룹들
전쟁을 방지하기를 위한 비오 11세 교황의 기도 부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정전을 위한 비오 12세 교황의 기도 부탁에 부응하여, 사회의 윤리적 개선의 도움을 주님께 청원하는, 작은 기도 공동체들의 소집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장려 되었다. 비오 형제는 이러한 교황들의 호소에 제일 먼저 응답한 첫 번째 사람들 중에 있었다. 사실, 그는 이미 1920년 때부터, 기도하기 위해 모인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산 조반니 로톤도 형제회의 손님 접대실에서 정기적인 만남을 가져온 터였다. 10여명의 지역주민 여성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모임은 기도하기 위해 손님 접대실 벽난로 둘레에 모이곤 했는데, 비오 형제는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읽어주었으며, 구약 성경을 이해시켜 주기도 했다. 1920년대 그 당시, 성경에 기초를 둔 이러한 기도모임들은 가톨릭교회에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0년 후반, 교황의 호소에 응하여 비오 형제는 그의 친구이자 ‘고통을 덜어 주는 집’의 설립 협조자였던 굴리엘모 산구넷티(Guglielmo Sanguinetti)라는 의사와 함께 이 기초적인 기도 모임을 재조직하여 한 층 더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꾸준히 유지되어온 ‘파드레 피오 기도 그룹들’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파드레 피오 기도 그룹들은 교구장 주교가 임명한 사제의 영적 지도를 받아야 한다. 비오 형제 스스로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현저함, 그리고 왜곡된 목적을 야기할 수 있는 사적 주도권으로 인해 발생 가능한 그 어떠한 탈선이라도” 확실히 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계적으로 2700여개의 파드레 피오 기도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기도 그룹들은 '고통을 덜어주는 집'과 같이 성 비오의 자선 사업들을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기도 그룹의 회원들은 한 달에 4번 모여서 함께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경을 묵상한다.



교회에 헌신적이며 교황에게 충실한 사람
바티칸 제 2 차 공의회를 거쳐 살아온 두 분의 시성된 사제들 중의 한 분으로서, 비오 성인의 교회 사랑과 교황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변함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에 대한 사랑을 1968년, 바오로 6세 교황에게 올려 드린 편지에서 드러냈다. (사실상, 바오로 교황은 1964년에 비오 형제의 사제 사목 봉사에 대한 모든 제한을 철회한 교황이었다.) "성하의 아들들 중에 꼴찌인 제가 드리는 작지만 진심 어린 증여로서 제 기도와 나날의 고통을 성하께 봉헌합니다. 이것은 성하께서 해가 지나가도 절대 바뀌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수호하시는데 있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성하를 위로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특히, 'Humanae Vitae' 라는 최근의 회칙에서 선언하신 성하의 분명하고도 결정적인 그 말씀에 대해, 저는 저의 영적 자녀들과 기도 그룹들의 이름으로 성하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성하의 계몽된 지시들에 저의 신앙과 저의 조건 없는 순종을 재확인하는 바입니다.. 저는 저의 수도 형제들과 저의 영적 자녀들과 기도 그룹들, 그리고 저의 병자들과 함께 저에게 강복해주실 것을, 또 저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하의 보호 아래 성취하고 있는 저희의 모든 좋은 기획에도 강복해주실 것을 성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합니다." 비록 그 당시, 공의회 후의 새 전례개혁들이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나이와 병약함의 이유로 비오 형제에게 트리엔트 예식의 미사를 계속 바칠 수 있도록 윤허를 베풀었다.



애정 어린 효자
비오 형제의 부모, 마리아 요세바와 오라지오 포르지오네는 둘 다 ‘마리아 피일(Pyle)’이라는 비오 형제의 미국인 영적 딸의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비오 형제는 오상의 상처를 입은 발로 바윗길을 걷기가 너무 어려웠기에 노새를 타고 마리아의 집으로 부모를 찾아가곤 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은, 마을 사람들에게 ‘맘마 뻬파(Mamma Peppa)’라고 불렸던 비오 형제의 모친이 아들을 방문하러 산 조반니 로톤도에 왔던 1928년 12월 5일, 그때의 아름다운 대화로 입증되고 있다. 어머니는 상처 입은 아들의 손을 잡고, 그 손에 입을 맞추면서 이렇게 말했다."비오 신부님, 리베라 이모님을 위해서 신부님 손에 입 맞추고, 펠레그리나 이모님을 위해서도, 필로메나 이모님을 위해서도.." 어머니는 다른 여러 명의 이모들과 친지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비오 형제의 손에 입을 거듭 맞추었다. 그러고 난 다음, 아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위해서 손에 입 맞추어요." 그러자 비오 형제는 즉시 손을 빼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되요! 아들이 엄마의 손에 입을 맞추어야지, 엄마가 아들의 손에 입을 맞추지 말아야 해요!" 1929년, 산 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마리아 파일의 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의 나이는 만 70세였다. 사제인 아드님은 어머니의 임종 자리에 끝까지 머물렀다. 사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비오 형제는 실신할 정도로 넋을 잃고 울었다. 17여년 후, 아버지도 마리아 파일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방문한 사람들이 "오라지오씨, 선생님의 아들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고 말하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과 자부심이 눈물 흥건한 눈에서 드러나곤 했다. 오라지오 포르지오네는 1946년, 만 86세의 나이로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돌아가셨다.



비오 형제의 말년
1956년에 착공된 '은총의 성모님' 의 성지성당은 예전 형제회 성당 부근에 인접하여 1959년에 완공되었다. 그 당시, 나폴리 출신인 한 여인은 새 성당의 축성식이 성인의 죽음을 알리는 징조임을 확신하고는 매우 괴로워하며 비오 형제를 찾아갔다. 하지만 비오 형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여인을 안심시켰다.“아닙니다. 그들이 지하성당을 축성할 때, 나는 그 때에 죽을 겁니다.” 그가 지목했던 그 지하성당은 비오 형제의 무덤으로 쓰여질 성당 밑을 파낸 지하실이었는데, 1968년에 완공되었다. 또한, 비오 형제는 그의 장님 친구 베드루치오에게 자신이 82세가 되는 해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죽었을 때에, 그가 82세가 되는 해의 3개월이 지난 때었다. 1960년대 내내, 비오 형제의 건강상태는 분명히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1968년 9월 21일, 비오 형제의 '오상 받음' 의 5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수많은 그의 영적 자녀들이 산 조반니 로톤도로 큰 무리를 지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비오 형제 자신은 커다란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즉 1968년 9월 22일, 비오 형제는 거행될 대미사를 끝까지 집전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그 대신에 평미사를 바칠 허락을 청했다. 그러나 수호자는 미사에 참례할 다수의 순례자들을 고려하여,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비오 형제는 순종의 정신으로 성대한 대미사를 거행하게 되었다.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비오 형제는 대단히 쇠약해 보였고 그의 목소리도 약했다. 그는 미사 끝에 제단 계단을 내려가다가 쓰러지는 바람에 동료형제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미사가 비오 형제가 집전할 수 있는 마지막 미사였다. 


 

1968년 9월 23일 새벽, 비오 형제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받은 뒤 카푸친 서원을 갱신했고  새벽 1시쯤에는 병자성사를 받았다. 안락의자에 앉은 채 계속 묵주를 손에 들고 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성모송을 소리 내어 발음할 수 없었다. 그는 끝나는 순간까지 "Gesù, Maria(예수님, 마리아님)" 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여 속삭이고 있었다. 새벽 2시 30분경, 그는 "나는 두 명의 어머니를 뵈어요!" (이것은 비오 형제의 어머니와 성모님을 뜻한다.)하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다하여 '마리아' 라는 이름을 속삭인 뒤, 새벽 2시 30분에 산 조반니 로톤도에 있는 자신의 독방에서 비오 형제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미사에는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례했다. 사람들은 비오 형제가 "나는 죽고 난 후에 더 많은 일을 할 거예요. 나의 참사명은 나의 죽음 이후에 시작될 거예요." 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을 들었다. 비오 형제와 끝까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보고들에 의하면, 비오 형제 자신이 예언했던 대로 그의 오상 성흔은 흉터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9월 26일, 그의 시신은 ‘은총의 성모님의 성당’의 지하성당에서 안치되었다.
 



시복과 시성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형제의 시성운동은 죽음 후 얼마 안 되었을 때에 곧 시작되었다. 1999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을 받았고, 2002년 6월 16일에 그는 같은 교황에 의하여 시성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에서 유학을 하던 젊은 사제 시절인 1948년, 비오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서 부활시기 방학을 맞아 산 조반니 로톤도에 가서 직접 비오 형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1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1962년 당시 보이티와(Wojtyla)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 중에 자신의 협조자 '봔다 폴탑스카(Wanda Poltawska)' 박사가 심각한 종양에 시달리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의사들이 수술을 시도하고 있으나 목숨을 건질 희망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보이티와 주교는 곧 비오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폴탑스카 박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비오 형제는 어떤 사람을 시켜 그 편지를 읽어 달라고 했고, 내용을 다 듣고 나서 잠시 침묵을 가진 뒤 "이 부탁을 사양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11일 후, 보이티와 주교는 또 하나의 편지를 비오 형제에게 보냈는데, 그것은 폴탑스카 박사가 수술실에 들어갈 찰나 갑자기 병이 다 나았다는 내용의 감사 편지였다. 


 
2008년 3월 3일, 동료형제와 다른 목격자들 앞에서, 선종한지 40년 된 비오 형제의 유해가 전시의 준비를 위해 지하성당 무덤에서 발굴되었다. 개별 교회 공식성명에 의하면 그 시신은 '상당히 괜찮은 상태' 였다고 묘사되었다. 하지만 시신 얼굴의 부패로 인하여, 시신이 은총의 성보 성당의 지하성당에 크리스탈과 대리석과 은으로 만들어진 관에 전시되기 전에, 그 얼굴은 실리콘 마스크로 가려야 했다. 2010년 4월 19일, 세공된 은으로 된 관 속에 누운 비오 성인의 시신은 산 조반니 로톤도에 새로 건축된 '성 비오의 성당' 의 지하성당에 있는 큰 기둥 안에 안치되었다.
칠백만 여명의 순례자들은 매년 산 조반니 로톤도에 가서 성 비오의 무덤에 성묘한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는 세계의 가장 인기 있는 성인 하나가 되어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느 다른 성인보다도 성 비오에게 더 기도한다. 한국에 있는 카푸친들에 의하여 설립된 첫 번째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단위 형제회는 서울 비오 준비형제회인데, 그 형제회는 한 달 한 번씩 서울 효창동 '천사들의 성 마리아의 카푸친 형제회' 에서 만나고 있으며 성 비오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또한, 카푸친 작은 형제회 한국 보호구는 작은 조각으로 된 성 비오의 일등급의 유해인 피 묻은 붕대를 지키고 있다. 성 비오는 틀림없이 카푸친 성인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성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푸친인 우리에게 비오 성인은 여전히 기도하는 가난한 형제요, 참으로 순종한 수도자며, 고통과 동정심의 사람이요, 상처 입은 치유자이자 모든이의 키레네의 시몬이다.  


 

"기도하십시오. 온 세상이 기도를 필요로 하니 나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특히 여러분의 마음이 삶의 외로움을 느낄 때, 기도하십시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니 다 함께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책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지만, 기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기도하십시오!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카푸친 작은형제회홈에서)       update 2012.4.6.






 

 

 

 

  

 

 

 

 

 

 

 

 

 

 

 

 

 

 

 

 

 San Pio da Pietrelcina (Francesco Forgione)

23 settembre
 
Pietrelcina, Benevento, 25 maggio 1887 - San Giovanni Rotondo, Foggia, 23 settembre 1968


Francesco Forgione nasce a Pietrelcina, provincia di Benevento, il 25 maggio 1887. Il 22 gennaio 1903, a sedici anni, entra in convento e da francescano cappuccino prende il nome di fra Pio da Pietrelcina. Diventa sacerdote sette anni dopo, il 10 agosto 1910. Nel 1916 i superiori pensano di trasferirlo a San Giovanni Rotondo, sul Gargano, e qui, nel convento di S. Maria delle Grazie, ha inizio per Padre Pio una straordinaria avventura di taumaturgo e apostolo del confessionale. Il 20 settembre 1918 il cappuccino riceve le stimmate della Passione di Cristo che resteranno aperte, dolorose e sanguinanti per ben cinquant’anni. Muore il 23 settembre 1968, a 81 anni. Dichiarato venerabile nel 1997 e beatificato nel 1999, è canonizzato nel 2002.

Etimologia: Pio = devoto, religioso, pietoso (signif. Intuitivo)


Martirologio Romano: San Pio da Pietrelcina (Francesco) Forgione, sacerdote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nel convento di San Giovanni Rotondo in Puglia si impegnò molto nella direzione spirituale dei fedeli e nella riconciliazione dei penitenti ed ebbe tanta provvidente cura verso i bisognosi e i poveri da concludere in questo giorno il suo pellegrinaggio terreno pienamente configurato a Cristo crocifi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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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ndo muore, il 23 settembre 1968, a 81 anni, le stimmate scompaiono dal suo corpo e, davanti alle circa centomila persone venute da ogni dove ai suoi funerali, ha inizio quel processo di santificazione che ben prima che la Chiesa lo elevasse alla gloria degli altari lo colloca nella devozione dei fedeli di tutto il mondo come uno dei santi più amati dell’ultimo secolo.
Francesco Forgione era nato a Pietrelcina, provincia di Benevento, il 25 maggio 1887. I suoi genitori, Grazio e Giuseppa, erano poveri contadini, ma assai devoti: in famiglia il rosario si pregava ogni sera in casa tutti insieme, in un clima di grande e filiale fiducia in Dio e nella Madonna. Il soprannaturale irrompe assai presto nella vita del futuro santo: fin da bambino egli riceveva visite frequenti di Gesù e Maria, vedeva demoni e angeli, ma poiché pensava che tutti avessero queste facoltà non ne faceva parola con nessuno. Il 22 gennaio 1903, a sedici anni, entra in convento e da francescano cappuccino prende il nome di fra Pio da Pietrelcina. Diventa sacerdote sette anni dopo, il 10 agosto 1910. Vuole partire missionario per terre lontane, ma Dio ha su di lui altri disegni, specialissimi.
I primi anni di sacerdozio sono compromessi e resi amari dalle sue pessime condizioni di salute, tanto che i superiori lo rimandano più volte a Pietrelcina, nella casa paterna, dove il clima gli è più congeniale. Padre Pio è malato assai gravemente ai polmoni. I medici gli danno poco da vivere. Come se non bastasse, alla malattia si vanno ad aggiungere le terribili vessazioni a cui il demonio lo sottopone, che non lasciano mai in pace il povero frate, torturato nel corpo e nello spirito.
Nel 1916 i superiori pensano di trasferirlo a San Giovanni Rotondo, sul Gargano, e qui, nel convento di S. Maria delle Grazie, ha inizio per Padre Pio una straordinaria avventura di taumaturgo e apostolo del confessionale. Un numero incalcolabile di uomini e donne, dal Gargano e da altre parti dell’Italia, cominciano ad accorrere al suo confessionale, dove egli trascorre anche quattordici-sedici ore al giorno, per lavare i peccati e ricondurre le anime a Dio. È il suo ministero, che attinge la propria forza dalla preghiera e dall’altare, e che Padre Pio realizza non senza grandi sofferenze fisiche e morali.
Il 20 settembre 1918, infatti, il cappuccino riceve le stimmate della Passione di Cristo che resteranno aperte, dolorose e sanguinanti per ben cinquant’anni. Padre Pio viene visitato da un gran numero di medici, subendo incomprensioni e calunnie per le quali deve sottostare a infamanti ispezioni canoniche; il frate delle stimmate si dichiara “figlio dell’obbedienza” e sopporta tutto con serafica pazienza. Infine, viene anche sospeso a divinis e solo dopo diversi anni, prosciolto dalle accuse calunniose, può essere reintegrato nel suo ministero sacerdotale.
La sua celletta, la numero 5, portava appeso alla porta un cartello con una celebre frase di S. Bernardo: “Maria è tutta la ragione della mia speranza”. Maria è il segreto della grandezza di Padre Pio, il segreto della sua santità. A Lei, nel maggio 1956, dedica la “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 una delle strutture sanitarie oggi più qualificate a livello nazionale e internazionale, con 70.000 ricoveri l’anno, attrezzature modernissime e collegamenti con i principali istituti di ricerca nel mondo.
Negli anni ‘40, per combattere con l’arma della preghiera la tremenda realtà della seconda guerra mondiale, Padre Pio diede avvio ai Gruppi di Preghiera, una delle realtà ecclesiali più diffuse attualmente nel mondo, con oltre duecentomila devoti sparsi in tutta la terra. Con la “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 essi costituiscono la sua eredità spirituale, il segno di una vita tutta dedicata alla preghiera e contrassegnata da una devozione ardente alla Vergine.
Da Lei il frate si sentiva protetto nella sua lotta quotidiana col demonio, il “cosaccio” come lo chiamava, e per ben due volte la Vergine lo guarisce miracolosamente, nel 1911 e nel 1959. In quest’ultimo caso i medici lo avevano dato proprio per spacciato quando, dopo l’arrivo della Madonna pellegrina di Fatima a San Giovanni Rotondo, il 6 agosto 1959, Padre Pio fu risanato improvvisamente, tra lo stupore e la gioia dei suoi devoti.
“Esiste una scorciatoia per il Paradiso?”, gli fu domandato una volta. “Sì”, lui rispose, “è la Madonna”. “Essa – diceva il frate di Pietrelcina – è il mare attraverso cui si raggiungono i lidi degli splendori eterni”. Esortava sempre i suoi figli spirituali a pregare il Rosario e a imitare la Madonna nelle sue virtù quotidiane quali l’umiltà,la pazienza, il silenzio,la purezza,la carità.“Vorrei avere una voce così forte – diceva - per invitare i peccatori di tutto il mondo ad amare la Madonna”.
Lui stesso aveva sempre la corona del rosario in mano. Lo recitava incessantemente per intero, soprattutto nelle ore notturne. “Questa preghiera – diceva Padre Pio – è la nostra fede, il sostegno della nostra speranza, l’esplosione della nostra carità”.
Il suo testamento spirituale, alla fine della sua vita, fu: “Amate la Madonna e fatela amare. Recitate sempre il Rosario”.
Intorno alla sua figura in questi anni si sono scritti molti fiumi di inchiostro. Un incalcolabile numero di articoli e tantissimi libri; si conta che approssimativamente sono più di 200 le biografie a lui dedicate soltanto in italiano. “Farò più rumore da morto che da vivo”, aveva pronosticato lui con la sua solita arguzia. Quella di Padre Pio è veramente una “clientela” mondiale. Perché tanta devozione per questo san Francesco del sud?
Padre Raniero Cantalamessa lo spiega così:“Se tutto il mondo corre dietro a Padre Pio – come un giorno correva dietro a Francesco d’Assisi - è perché intuisce vagamente che non sarà la tecnica con tutte le sue risorse, né la scienza con tutte le sue promesse a salvarci, ma solo la santità. Che è poi come dire l’amore”.


Autore: Maria Di Lorenzo

 

 


Spunti bibliografici su San Pio da Pietrelcina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Chifari Giovanni, La parola della croce, Paoline Edizioni, 2012 - 48 pagine
Antonino Giuseppe, San Francesco negli scritti di Pio da..., Edizioni Dehoniane Bologna, 2011 - 544 pagine
Castelli Francesco, Padre Pio e il Sant'Uffizio (1918-1939), Studium Edizioni, 2011 - 216 pagine
Santonastaso Mario, Al mio amico Padre Pio, Pendragon, 2011 - 128 pagine
Savino Francesco, Padre Pio l'Astro del Gargano, Padre Pio da Pietrelcina, 2011 - pagine
Lotti Luciano, Ascolta si fa sera, Padre Pio da Pietrelcina, 2011 - pagine
Colafemmina Francesco, Il mistero della Chiesa di san Pio, Edizioni Settecolori, 2010 - 214 pagine
Conversano Giuseppe, Padre Pio e il mistero della sua Messa, Vivere In, 2010 - pagine
Gnocchi Alessandro, Palmaro Mario, L'ultima messa di Padre Pio, Piemme, 2010 - 224 pagine
Armenti Francesco, Come seme marcito... Padre Pio pane per..., Padre Pio da Pietrelcina, 2009 - 576 pagine
Cattaneo Patrizia, Padre Pio. Luce e mistero. Con DVD, Curcio, 2009 - 189 pagine
Grottola Fortunato, Padre Pio a Foggia, Padre Pio da Pietrelcina, 2009 - 271 pagine
Socci Antonio, Il segreto di padre Pio, BUR Biblioteca Universale Rizzoli, 2009 - 318 pagine
Anastasi Filippo, Padre Pio. La sua voce, la sua storia. Con..., Padre Pio da Pietrelcina, 2009 - 168 pagine
Gianluigi Pasquale, Padre Pio. San Paolo modello del vero..., San Paolo Edizioni, 2008 - 176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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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11-03-21

 

 

 

 

 

 

 

 

PADRE PIO

 

Also known as

Francesco Forgione; Padre Pio of Pietrelcina

Memorial

23 September

Profile

Born to a southern Italian farm family, the son of Grazio, a shepherd. At age 15 he entered the noviciate of the Capuchin Friars in Morcone, and joined the order at age 19. Suffered several health problems, and at one point his family thought he had tuberculosis. Ordained at age 22 on 10 August 1910.

 

While praying before a cross, he received the stigmata on 20 September 1918, the first priest ever to be so blessed. As word spread, especially after American soldiers brought home stories of Padre Pio following WWII, the priest himself became a point of pilgrimage for both the pious and the curious. He would hear confessions by the hour, reportedly able to read the consciences of those who held back. Reportedly able to bilocate, levitate, and heal by touch. Founded the House for the Relief of Suffering in 1956, a hospital that serves 60,000 a year. In the 1920’s he started a series of prayer groups that continue today with over 400,000 members worldwide.

 

His canonization miracle involved the cure of Matteo Pio Colella, age 7, the son of a doctor who works in the House for Relief of Suffering, the hospital in San Giovanni Rotondo founded by Padre Pio. On the night of 20 June 2000, Matteo was admitted to the intensive care unit of the hospital with meningitis. By morning doctors had lost hope for him as nine of the boy´s internal organs had ceased to give signs of life. That night, during a prayer vigil attended by Matteo´s mother and some Capuchin friars of Padre Pio´s monastery, the child’s condition improved suddenly. When he awoke from the coma, Matteo said that he had seen an elderly man with a white beard and a long, brown habit, who said to him: "Don´t worry, you will soon be cured." The miracle was approved by the Congregation and Pope John Paul II on 20 December 2001.

Born

25 May 1887 at Pietrelcina, Benevento, Italy as Francesco Forgione

Died

23 September 1968 of natural causes

Venerable

18 December 1997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

2 May 1999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16 June 2002 by Pope John Paul II at Rome, Italy

 

 

 

Readings

Look what fame he had, what a worldwide following gathered around him! But why? Perhaps because he was a philosopher? Because he was wise? Because he had resources at his disposal? Because he said Mass humbly, heard confessions from dawn to dusk and was-it is not easy to say it-one who bore the wounds of our Lord. He was a man of prayer and suffering.

 

Pope Paul VI, 21 Febuary 1971, commenting on the life of Padre 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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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you, Blessed Padre Pio, look down from heaven upon us assembled in this square and upon all gathered in prayer before the Basilica of Saint John Lateran and in San Giovanni Rotondo. Intercede for all those who, in every part of the world, are spiritually united with this event and raise their prayers to you. Come to the help of everyone; give peace and consolation to every heart. Amen!

 

from the homily of Pope John Paul II at the beatification of Padre P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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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y with me, Lord, for it is necessary to have You present so that I do not forget You. You know how easily I abandon You.

 

Stay with me, Lord, because I am weak and I need Your strength, that I may not fall so often.

 

Stay with me, Lord, for You are my life and without You I am without fervor.

 

Stay with me, Lord, for You are my light and without You I am in darkness.

 

Stay with me, Lord, to show me Your will.

 

Stay with me, Lord, so that I hear Your voice and follow You.

 

Stay with me, Lord, for I desire to love You very much and alway be in Your company.

 

Stay with me, Lord, if You wish me to be faithful to You.

 

Stay with me, Lord, as poor as my soul is I want it to be a place of consolation for You, a nest of Love.

 

Stay with me, Jesus, for it is getting late and the day is coming to a close and life passes, death, judgment and eternity approaches. It is necessary to renew my strenth, so that I will not stop along the way and for that, I need You. It is getting late and death approaches, I fear the darkness, the temptations, the dryness, the cross, the sorrows. O how I need You, my Jesus, in this night of exile!

 

Stay with me tonight, Jesus, in life with all its dangers, I need You.

 

Let me recognize You as Your disciples did at the breaking of the bread, so that the Eucharistic Communion be the Light which disperses the darkness, the force which sustains me, the unique joy of my heart.

 

Stay with me, Lord, because at the hour of my death, I want to remain united to You, if not by Communion, at least by grace and love.

 

Stay with me, Lord, for it is You alone I look for, Your Love, Your Grace, Your Will, Your Heart, Your Spirit, because I love You and ask no other reward but to love You more and more.

 

With a firm love, I will love You with all my heart while on earth and continue to love You perfectly during all eternity. Amen.

 

Padre Pio’s Prayer After Holy Comm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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