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햇볕이 되고 싶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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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0-21 ㅣ No.5461

 

아직은 바람 끝이 싸아한 초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양달에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에헴 나는 경찰이다."

"음.. 나는 엄마 해야지."

저마다 배역을 정하는데, 한 아이가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야! 너는 뭐 할거야? 빨리 정해 봐."

친구들이 재촉을 하는데도 쭈뼛대기만 하던 아이가 뭔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햇볕이 잘 드는 벽으로 뛰어가, 기대서서 말했습니다.

"난 햇볕이야, 너희들 모두 이리 와 봐."

"햇볕이라니!"

내가 그 뜻밖의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어리둥절하던 아이들이 쪼르르 그 아이 옆으로 달려가선 벽에 도토리 같은 몸을 기댔습니다.

"와, 따뜻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정겹던지 나는 무심결에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햇볕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민우는 왜 햇볕이 되고 싶어?"

"......"

아이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헤헤.. 우리 할머니가요,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데 거기는 햇볕이 없어서 춥대요."

시장모퉁이 난전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아주 잠깐씩만 비추고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리는 햇볕이 미웠다는 아이.

아이는 이 다음에 크면 햇볕이 돼서 할머니를 하루 종일 따뜻하게 비춰 드릴 거라며 해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나는 그 기특한 아이를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마치 햇살을 가득 품은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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