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눈 먼 벌치기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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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p0o9i8] 쪽지 캡슐

2003-10-23 ㅣ No.5465

 

강원도 깊은 산중 늑목골이라는 작은 마을에 눈 먼 벌치기가 살았습니다.

세상은 온통 뿌연 안개 속이었지만 벌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꿀을 딴다는 남자.

그에게는 설상가상으로 다리가 불구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말이 사는 것이지, 앞을 못보는 채로 벌을 치고 불구인 아버지를 봉양하며 살림을 꾸려간다는 건 정말이지 죽기보다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를 어쩌지...."

나무에 걸려 넘어지고 잘못해서 벌에 쏘이고...

밥상을 방까지 차려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이장으로부터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수술만 하면 잃어버린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을 얻은 그가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을 때 정밀진단을 마친 의사가 말했습니다.

당장 개안수술을 할 경우 성공 확률은 100퍼센트. 문제는 수술비였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꿀을 따서 판 돈을 한 푼 두 푼 모았습니다.

안 입고 안 먹어 눈물나게 모아 수술비 2백만 원이 거의 다 될 즈음, 지극 정성으로 모시던 아버지가 앓아 누웠습니다.

그는 모았던 돈을 다 털어 아버지 병구완에 썼지만 아버지는 끝내 눈 먼 아들을 홀로 두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깊은 수렁에 빠진 그가 다시 기운을 내 벌을 치고 돈을 모아 2백만 원을 만든 것은 6년 뒤.

그는 2백만 원을 손에 쥐고 다시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검사결과는 절망적이었습니다. 시신경이 다 죽어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발통을 버리고 희망도 버리고,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던 그에게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나타났습니다.

한 쪽 다리가 불구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아 그 만큼이나 깊은 절망속을 헤매던 한 여자가 마을의 누군가가 라디오 방송국에 써보낸 눈 먼 벌치기의 사연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여자는 물어물어 산골짝 오두막에 눈 먼 벌치기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작수성례. 그의 아내가 되어, 아니 그의 눈이 되어 아픔을 감싸 안았습니다.

 

눈 먼 벌치기의 신혼집엔 날마다 행복이 너울댔습니다.

아내는 그 착한 손길로 그가 지금껏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기쁨을 선사하는 천사였습니다.

삼시 세끼 더운 밥을 지어올리고 맛난 반찬을 떠먹여 주기까지 하는 천사.

그는 이제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꿀처럼 달콤한 날들이 그렇게 흐르고 흘러 아이도 어언 셋이나 생겼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안돼! 여보 안돼. 제발 죽지 마."

안된다고 했지만, 가지 말라 했지만 아내는 끝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먼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가고 난 뒤의 생활을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아이 키우는 건 벌치는 거랑 다르다고 애들을 고아원에 보내라고 성화를 댔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애들... 고아원에 보내지 말아요, 여보."

"약속할게."

"고마워요.... 여보."

아내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철부지 셋을 업고 안은 눈 먼 홀아비...

누가 봐도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셋째를 안으면 둘째가 울고, 둘째를 업으면 첫째가 울고....

"나 혼자 어떡하라구. 흑흑...."

너무 힘들고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다 집안이 온통 울음바다가 돼 그도 함께 울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인지 세월은 철부지 삼남매를 착하고 야무지게 키워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 학교를 따라 읍내로 이사도 했습니다.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느이도 잘 자거라."

이제 늙은 벌치기의 소원은 단 하나.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저마다 제 살 길을 찾고 나면, 아버지의 뿌리가 살아 있고 아내의 숨결이 배어 있는 늑목골 그 가난한 노두막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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